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24
124. 볼란테 (Volante, 날아가듯)
웃기지도 않는 소리.
강성욱 교수는 참가자 이성현의 1차 예선 연주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런 폭넓은 음형과 자칫 발칙하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기존의 룰과 틀을 깨부수는 연주법.
그는 ‘원전연주’로 평가를 하겠다고 분명히 고지를 했음에도 통상연주, 작곡가의 의중에 맞는 연주, 자신의 색이 들어간 연주.
각기 다른 네 가지 방식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공작새의 꼬리처럼 다채롭고 도발적인 1차 예선에 임하는 자세.
강 교수는 거기서 젊은 학생의 패기를 느꼈기에 그를 합격시키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던 것이었다.
‘김정석의 제자 이성현이라면 분명 이변을 만들 거다.’
그게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말이다.
그런 확고한 믿음으로 성현의 연주를 기대했던 것이었는데,
“푸하하하하하핫!”
이건 상상을 너무 초월하지 않았나.
강 교수는 마지막인 여덟 번째 연주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여덟 번째 연주이자,
세 번째 백중철인 그 연주 말이다.
백중철은 이번 ‘한국 종합 콩쿠르’에서 A조의 피아니스트 박의범과 함께 유력한 우승 후보로 불리던 남자였다.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 우승 후보 백중철이 셋이 되었다는 이 현재 상황을 말이다.
강 교수가 너무 크게 웃어버렸던 것인지.
주위의 심사위원들은 화등잔만 하게 눈을 뜨고서 조용히 강 교수를 보는 벙어리가 되었다.
아마 강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다음 말이 긍정적인 말일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 종잡을 수 없어 말을 아끼는 듯했다.
때문에 강 교수는 이 자리에서 발언권이 가장 큰 사람으로서 얼른 솔직한 심정을 입에 담았다.
“재미있네요.”
그러자,
후우우우, 하는 안심의 한숨을 쉬는 자도 있었고 그렇지요? 하며 강 교수에게 미소를 보이는 교수도 있었다.
아마도 이렇게 늙기 전에는 성격이 꽤나 불같았던 강 교수이기에 다른 이들은 조심스러운 것이리라.
“하지만, 제대로 된 심사를 위해서는 다시 들어볼 필요가 있겠군요.”
“그렇죠, 이, 이건 너무 규격 외의 일이니까요.”
“규칙에 따라서 심사위원분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하신다면 녹음을 다시 틀겠습니다.”
다행히 반대하는 심사위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조금 전에는 다들 놀라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딩-!
아무도 자세히 말하진 않았었지만, 녹음기는 정확히 여섯 번째 연주자의 연주부터 들려주기 시작했다.
다시 들어보니,
세 백중철에게는 분명 각각의 특징 같은 것들이 존재했다.
누군가는 기존의 단단한 백중철에 충실했고, 누군가는 부드러운 백중철 같았으며 마지막 연주자는 누가 들어도 백중철보다 더 깊고 어둑한 곡의 느낌을 감각적으로 살려냈다.
앞선 두 백중철 중에서는 누가 진짜 백중철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연주자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네가 성현이구나···.’
대체 어떻게 연주자에게는 지문과도 다름이 없는 주법을 완벽히 복제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현의 연주에는 그 ‘완벽한 복제’ 위로 덧씌워진 어둑한 깊이가 존재했다.
언젠가, 성현이 특히 고독한 분위기의 곡을 잘 살린다는 기사를 봤던 것 같은데, 그 기사를 우연히라도 접하지 못했었다면 강 교수마저 성현이를 구분해내지 못 할 뻔했다.
‘강력한 우승 후보······. 그런데 그 우승 후보와 똑같은 주법을 선보이고는 본인의 완벽한 상위호환을 달성해낸다니.’
더는 성현을 연주자라 불러도 되는지 강 교수는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차라리 음악의 신께서 장난을 치신 거라고 하는 게 더 믿음직한 말이겠어.’
결국, 만장일치로 첫 번째 심사대상자가 된 B조는 결국 본선 진출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마지막 순서로 밀려났다.
총 두 번의 쉬는 시간과 세 번의 심사 시간을 더 가지고 나서야,
“하아아아.”
남은 A조부터 H조까지의 심사를 마친 심사위원단은 눈앞에 놓인 마지막 과제를 보며 신음을 흘렸다.
세 명의 백중철.
도통 셋 중 누구를 탈락시킬지 결정할 수가 없던 것이다.
그렇게, 무려 10분간 이어지는 침묵에 결국 강 교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간 유례가 없던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하는 수 없다는 듯 내민 강 교수의 제안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
내가 M스튜디오 뒷문에 앉아 정말 오랜만에 붉게 물들기 시작한 낙엽 잎을 넋 놓고 보고 있던 건, 2차 예선에 당당히 참여해 말도 안 되는 사단을 만든 지, 딱 나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사실, 백중철의 주법으로 곡을 연주하는 사람이 셋이었다는 점이, 얼마나 심사위원들에게 파격적으로 다가갔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면, 2차 예선의 특이점인 ‘블라인드 테스트’로서는 결코 백중철 본인과 나, 선생님을 구분할 수 없으리란 점이었다.
이런 유례없는 사건에 과연 심사위원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신성한 콩쿠르에서 장난질한다고 화냈으려나, 아니면 신선한 발상이라며 놀랄 것인가.
솔직히 현재의 내가 무조건 이럴 것이다! 하며 말할 수는 없는 처지지만, 그래도 내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번 콩쿠르의 심사위원단 중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강성욱 교수, 적어도 그는 이 같은 ‘신선한 자극’을 퍽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잘 먹혀야 할 텐데”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참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나.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던 백중철이 무섭다며 M스튜디오에 출근하듯 오시던 선생님도, 뒤늦게 내가 낸 사단을 듣고는 입을 떡 벌리던 지은이와 민호도 오늘은 학교로 가버렸거든.
한동안 계속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가 이렇게 혼자가 되니 뭔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은, 이렇게 조용한 것도 좋네.”
작년과 같이 시간은 퍽 빠르게 흘러, 벌써 가을이 되었다.
작년에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아도 연습실에 혼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젠 이렇게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본래의 내 삶이 향하던 물줄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물줄기에 내가 올라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세계무대,
정석 선배가 나를 보고 말한 것이다.
자신이 있는 곳까지, 얼른 올라오라고.
물론 불안함은 있었다.
국내라는 무대에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본 경력이 있는 나라도, 세계무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고지가 아닌가.
아는 것이라고는 전생의 김민호가 걸은 그의 발자취뿐.
지금까지의 무대는 사실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요행을 부렸고, 남들보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세계무대는 고사하고, 이제 내일이면 결과가 발표될 ‘한국 종합 콩쿠르’의 본선도 순수한 내 실력 하나로 승부를 봐야 하는 무대인 것이다.
그러니,
이번 ‘한국 종합 콩쿠르’에서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가 즉, 세계무대의 문을 두드릴 준비가 되었느냐에 대한 척도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길 생각이다.
A조의 유력한 우승 후보 박의범도, 죽음의 조의 백중철, D조의 김민호, G조의 지은이까지.
모두 이겨서 정석 선배의 귓가에 내 좋은 소식이 들어갔으면 한다.
그래서일까?
내일이면 본선 진출자가 발표된다.
그 사실 하나에, 나는 요 나흘간 계속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전생에는 턱턱 막혔던 숨구멍을 시원하게 뚫고 제대로 뛰고 있는 건지 멈춘 것인지 도통 구별이 안 되던 그 심장 박동.
그 두근거림은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울림을 만들고 있었다.
가을이었다.
내가 전생에서 현생으로, 시간을 거슬러 온 지 딱 11개월째.
나는 여느 때보다 차분하고 조용히 M스튜디오의 뒷들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으나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내가 살아있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었다.
이윽고, 다음날.
본선 진출자가 발표되었다.
1차 예선과 같이 휘황찬란한 홈페이지에 떡하니 적힌 사람의 이름들.
[본선 진출자 명단]그 화면 속에···.
이변이 있었다.
본래라면 총 64명 중에서 12명을 가려내는 2차 예선.
그런데 모니터에 띄워진 화면 속에는, 무려 13명의 이름이 적혀 있던 것이다.
그리고 단연 돋보이는 항목은 다름 아닌 B조.
[피아노 – B]1. 이성현
2. 백중철
3. 최윤설
B조에서 유례없는 3인 합격이 발생했다.
“허어어···. 응?”
불안하다는 듯 내 옆에서 손을 꽉 잡고 있던 지은이는 자신의 본선 진출에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 B조를 보더니 이해할 수 없는 걸 본 사람처럼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는 두어 번 더 깜빡이는 큰 눈.
“어어어어어어?!”
그녀의 고음이 텅 비어있던 우리 집을 가득 채우는 건 단숨에 일어난 일이었다.
***
[본선 진출자 명단]이는 누구든 홈페이지의 주소를 알고 있다면 다 확인할 수 있다는 면에서 참 청렴결백한 성격을 띤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성을 그 누구보다 좋아하는 건 다름 아닌 기자들이었다.
“대박 건수 떴다아!!”
한 신문사에서 누군가, 바락바락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비명과도 가까운 외침은 마찬가지로 ‘한국 종합 콩쿠르’에 주목하고 있던 모든 기자들의 귀청을 때렸고, 반응은 바로 튀어나왔다.
“13명?!”
“잘못 적은 거 아냐?”
“이성현이 붙었어! 죽음의 조에서 우승 후보 셋이 떨어지고 이성현이 붙었다고!”
“최윤설은 또 누구야!”
“이 콩쿠르에서 본선 진출자가 열두 명이 아닌 적이 있었어?”
“없어!”
“그보다 이거 봐봐! 김민호, 최지은도 붙었다고!”
“미향예고 삼인방이 다 붙은 거야?!”
“미친!”
“이건 9시 뉴스에 넣어도 되겠다.”
오직, ‘본선 진출자 명단’만을 기다리며 컴퓨터 모니터를 붙들고 있던 아홉 명의 기자들.
그들은 성현에게 언제나 좋은 기사를 써주기로 유명하며, 클래식 전문 예언가로도 불리는 김백찬 기자가 이번 ‘한국 종합 콩쿠르’를 대비해서 꾸린, 일종의 팀이었다.
연이어 터지는 대박 건수들.
연주되는 악기가 많기도 많기에, 김백찬 기자를 포함해 열 명이나 되는 기자가 들러붙었음에도 일손이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김백찬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이 꾸린 팀원들에게 기사를 미리 작성해두는 게 좋을 거라고 당부에 당부를 해놨었는데,
“하, 하하하하,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미치겠다. 성현아!”
그렇게 미리 작성된 열여덟 개의 기사 중에서도 미향예고 삼인방이 모두 합격한다는 기사와 역사상 유례가 없는 13인의 본선 합격에 관한 기사는 없었다.
죽음의 조라 불리던 B조.
김백찬 기자마저 이번만큼은 성현의 본선 진출을 예견하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중철, 김은미, 구연하, 이세진이다.
그들은 당장 해외에 던져놔도 어떻게든 능수능란하게 살아남을 프로 피아니스트들.
베테랑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이들이 무려 넷이나 몰린 상황에서 아무리 천재라도 어떻게 고등학생이 이를 뚫고 나올 거라고 예상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윤설?”
발이 넓은 김백찬 기자마저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속해 있던 것이다.
“하하, 정말···. 네가 가는 곳은 어디든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단 말이야.”
이러니 팬은 안 할 수가 있나, 김백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씩 웃었다.
“얘들아! 야근이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짓는 김백찬.
그리고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이긴 했지만, 명백한 썩은 미소를 날리던 아홉 명의 기자들.
“우, 우와···.”
“오늘은 미리 기사도 써놨으니 집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난 우리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이 안 나.”
“누가 알았겠냐.”
“그러니까···. 누가 알았겠어, 미리 작성해둔 기사가 열여덟 개나 되는데 그걸 다 뒤집어버릴 줄은···.”
오늘도, 클래식 기자들의 신나는 야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