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70
70. 소그난도 (sognando, 꿈꾸듯) – 무료 마지막 회
그 날은 유독 눈이 잘 보이는 날이었다.
사실 잘 보이는 날이라고 해도 뿌옇게 사물을 구분하기 힘든 날과 어렴풋이 움직이는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차이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앞이 보인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이는 그런 게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고, 누구도 깨어있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어째서인지 혼자 세수도 하고 싶고, 몸을 단정하게 하고 싶은 날이었다.
아무래도 긴장을 한 것 같았다.
내게 멋진 피아노 연주를 들려줬던 형의 이름은 이성현이라고 했다.
성현,
입에 착 달라붙어 좋은 어감이었다.
성현이 형은 참 묘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알 수 없는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휘어잡으면서도 자기주장에 확고한 믿음이 없는 말투라서 동경과 함께 정이 가는 사람이었다.
‘할 수 있어.’
그런 멋진 형이지만, 참 이상할 때가 종종 있었다.
특히 나와 플루트에 엮인 일이 생길 때면 그 어떤 의심과 고민도 없이 성현이 형은 확신했다.
‘분명히 할 수 있어.’
내가 그 곡을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대체 내 어떤 부분을 보고 그렇게나 굵직한 믿음을 주는 걸까. 내가 시력을 상실하기 전에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일 때문인가,
솔직히 스스로 자신을 냉정하게 돌이켜봐도 그렇게 멋진 믿음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형은 말했다.
‘넌 할 수 있을 거야. 나를 믿어.’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내게 막중한 부담감보다는 용기를 주었다.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치 시력을 잃기 전 엄마와 나의 관계 같아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었지만, 이젠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모두 성현이 형 덕분이었다.
엄마의 울음소리도, 내 온몸이 떨리는 고함도 사라졌다.
아빠는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가족이 모두 밥상 앞에 앉자 아빠는 다 같이 저녁을 먹어본 게 얼마 만이냐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즐거워하시면서도 살짝 울음 끼가 섞여 있었다는 걸 나는 금방 눈치챘으나, 모른 척 해드리기로 했다.
저녁 메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불고기였다.
엄마가 쌈을 싸주고 아빠가 밥을 비벼 내 입에 넣어주었다.
너무너무 맛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눈물이 났다.
“미, 민재야!”
“괜찮아? 혹시 어디 아파?”
입에 넣은 음식도 다 씹어 넘기지 못하고 내가 울자 엄마와 아빠의 윤곽이 벌떡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아파서, 슬퍼서 우는 게 아니었다.
“너무··· 좋아서···요.”
내가 쥐어짜 내듯이 그렇게 말하자 엄마와 아빠는 나와 함께 우셨다.
그 날 저녁, 다시 생각하면 조금 창피한 일이지만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노력하는 것으로 가족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걸 성현이 형에게 말하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내게 다가오더니 나를 꽉 안아주었다.
아빠보다 얇은 팔과 엄마보다 조금 작은 덩치, 누군가에게 안겨본 적이 잘 없던 나로서는 정말 놀랐지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이 밝았다.
아빠의 차를 타고 예전에, 내 질병을 확진 받았던 그 병원으로 향했다.
성현이 형이 이곳을 말했을 때는 정말 놀랐다.
여기가 처음으로 내 세상이 무너져내린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성현이 형은 바로 이곳에서 내가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본래라면 가는 것조차 섬뜩한 장소였지만, 나는 약속 시간보다 1시간이나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
나를 믿어준 형이 내게 해가 될만한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었다.
“괜찮아?”
잠깐 잠이 든 사이, 나는 대기실 대신이라는 큰 승합차에 탑승해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들린 목소리가 성현이 형의 것이 아니었다면 조금 놀랐으리라.
오늘은 눈이 잘 보이는 날인 줄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으니까.
“네. 괜찮아요.”
나는 시각 장애인용 지팡이 ‘화이트 케인’을 잡고 대기실을 나갔다.
성현이 형이 옆에서 부축을 해주었기에 겁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슴이 쿵쿵 뛰는 건, 아마 이곳이 언젠가 내가 확진 판정을 받았던 그 병원이기 때문 아니었을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는 지정된 자리에 앉혀졌고 성현이 형은 옆으로 향했다.
플루트를 조립하는 사이, 웅성거림이 들렸다.
멀리서 다가온 발걸음이 가까운 곳에서 멈추고, 소란스러운 공기에 속이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이었다.
뭘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성현이 형이 내게 말했다.
“괜찮아, 뭐든 좋으니까 네가 원하는 곡을 연주해봐. 내가 맞출게.”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눈앞은 캄캄했지만, 눈앞은 밝아오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연주하고 싶은 곡을 금방 정할 수 있었다.
[You raise me up]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가 졸릴 때면 엄마가 은은한 목소리로 불러주던 그 노래.
호흡을 가다듬고, 입에 해드를 가져다 댔다.
들려오는 엄마의 노래.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선율에 맞춰 숨을 불어넣었다.
청명한 소리가 천장을 향해 솟아오르듯 울려 퍼졌다.
거기에 내 첫 음에 맞춰 거의 동시에 울리는 피아노 소리.
마치, 내가 언제 첫 음을 낼지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반주였다.
퍼지는 음색,
들려오는 선율.
무엇하나 방금 내가 원해서 시작한 곡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가슴이 쿵쿵하고 뛰느라 호흡이 거칠어질 때면 곧바로 들려오는 성현이 형의 피아노 소리에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어서 들려오는 화이트 케인의 소리.
자신과 같은 교습생 분들이 입장하는 것이 분명했다.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갑작스럽게 열댓 명의 사람이 밀어닥쳤다는 걸 발걸음 소리로 파악한 나도 놀랐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놀라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You raise me up’에서 두 번째로 주선율이 힘을 뻗는 그 순간, 자리에 앉은 교습생분들의 굵직한 화음이 더해졌다.
얇고 밝게 나아가던 음이 단번에 화려하게 물든 것이다.
분명, 성현이 형은 원하는 곡을 연주해보라고 해서 연주한 곡이었는데, 다른 사람들까지 이를 맞춰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그렇게 화려하게 덧칠된 음색은 지금껏 들어봤던 그 어떤 곡보다도 좋았기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젠 눈을 떠도, 감아도 세상은 보이지 않았으나 웃을 수 있게 되었다.
***
예정대로 첫 엑스트라 곡을 연주하는 동안 교습생분들이 모두 자기 자리를 찾아 앉으리라는 계획은 성공했다.
지은이네 부모님의 입김이 어찌나 강했던 것인지 스무 명에 가까운 간호사분들이 우리를 맞이해 주셨을 때는 솔직히 나도 놀랐다.
그냥 연주 공간만 얻는 거로도 족할 예정이었으니 말 다 했다.
첫 곡이 끝나자 교습생분들은 예정대로 연습했던 ‘사계’ 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높은 곡조의 화사함이, 방금까지 울려 퍼지던 잔잔함을 날려버릴 정도로 강하게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오는 사람들.
생기 없던 환자복의 아이들도, 지친 얼굴의 어른들도 하나, 둘 모여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간호사분들의 원 밖으로 서서히 인파가 생겨났다.
병원의 관계자분들에게만 공연 정보를 알렸던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속도였다.
이미 ‘나를 세우사’ 연주 때 모인 사람들이 똑바로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람이 늘어났다.
“우와~”
“와아아아.”
맑은 목소리의 감탄이 이어졌다.
환자복의 아이들은 입을 떡 벌렸고, 갑작스러운 무대에 놀란 어른들도 놀란 듯 주변으로 모여 핸드폰을 들었다.
이때도 뭔가 일이 생기면 동영상부터 켜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인파는 금세 불어나 벌써 백 명은 넘긴 것 같았는데, 공간이 워낙 넓다 보니 아직도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버스킹과는 비교도 되질 않는다.
뭐, 그냥 행인들이 아니라 진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이니 이런 이색적인 광경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리 하모닉 클래식 센터’의 교습생들이 봄을 피워내기 전에는 그들 모두가 어두운 표정이었다는 것이었다.
교습생들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밝은 에너지가 분명 주위에 퍼져 다른 사람들의 어둑한 얼굴에서 다양한 감정이 깃든 표정을 피워낸 것이리라.
그렇게 5분여의 연주가 끝이 났다.
“우와아아아아!”
잠시 선율이 멈추자 휠체어에 앉은 아이가 밝은 탄성을 쏟아냈다.
팔에 꽂힌 링거가 흔들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을 만큼 힘차게 말이다.
그러자 이어지는 반응은 거대했다.
“와아아아아!”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너무 좋잖아!”
“와아아아~”
“대박!”
“진짜 잘한다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박수 소리와 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습생분들은 그 압도적인 소리에 잠시 몸을 떨기도 했으나, 이내 그들이 모두 자신들을 향해 함성을 내지르고 있다는 걸 이해한 듯 표정을 풀었다.
교습생분들도,
이 무대를 보기 위해 다가온 환자분들도 모두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이윽고, 나는 머리 위로 손을 번쩍 들었다.
이는 사전에 약속해두었던 신호였다.
이제 다음 사람들의 연주 시간이라는 신호,
갑자기 나타나 10분 남짓 연주한 것으로 플래시 몹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플래시 몹이라면, 숨은 연주자가 있기 마련이겠지.
지잉-
“오오?”
“어어어어어?”
갑작스럽게 바이올린 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숨 가쁘게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의 선율.
그 선율은 나긋나긋 피어난 봄을 내리쬐는 태양처럼 이곳에 모여든, 모든 이들의 이목을 끌며 나타났다.
뒤이어 들려오는 웅장한 화음.
홍진태를 필두로 시작된 여름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널찍한 광장 같은 공간에서 연주하던 나와 교습생들을 기준으로 사방에서 차례로 화음을 더해가는 선율이 울려 퍼졌다.
쌓여가는 화음,
그리고 그 음색을 무대 삼아 신나게 뛰노는 바이올린.
이례적으로 ‘클래식 버스킹’의 모든 회원이 모이게 되었다는 이 순간, 나도 그들의 실력을 잘 아는 것은 아니었기에 솔직하게 놀랐다.
알아주는 바이올리니스트 홍진태를 필두로 한 ‘클래식 버스킹’의 연주는 솔직히 이전 교습생의 연주와는 불허할 만큼 커다랗고 찬란했다.
정말 햇살이라도 된 것처럼 뜨겁게 울려 퍼지는 화음.
차곡차곡 쌓인 화음에서 멋지게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홍진태의 노련함까지 더해지니,
이전까지 놀란 표정이었던 사람들의 얼굴은 아예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웅장함을 피부로 느낀 것인지 어린아이들마저 쉽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자리의 주인공은 센터의 교습생들이다.
“가만히 지고 있을 건 아니죠?”
나는 ‘클래식 버스킹’이 연주하는 여름이 거의 끝나갈 때쯤, 교습생분들에게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그리 말했고,
가장 높은 음계의 ‘도’를 약하게 두 번 눌렀다.
이건 나와 센터 교습생들끼리의 신호였다.
곧 연주를 준비해달라는 약속을 담은 신호 말이다.
2주간 끊임없이 연습하지 않았던가.
이가 없다면 잇몸으로 물어뜯을 기세로 센터에 모여, 진지함으로 무장해 연습하지 않았던가.
센터의 교습생들은 대부분 민재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혹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잃고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
민재와 같이 많은 눈물을 흘렸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선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안된다는 걸 깨닫고도 해내기 위해서, 악기를 잡은 사람들이었다.
정말,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센터의 교습생분들은 ‘클래식 버스킹’의 화려하고 힘 있는 연주를 듣고도 나의 작은 신호에 맞춰 투지를 불태워주셨다.
현재 스물여섯의 나이로 이 센터를 다니며 다양한 곳에 간간이 초청을 받아 ‘시각 장애 연주자’로서 연주를 하던 남자는 내게 말했다.
‘시각 장애’라는 딱지를 떼고서도 인정받은 연주자가 되고 싶다고.
아마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같은 마음은 아니겠지만, 다들 비슷한 마음일 것이라는 게 나의 예상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걸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가능하다면,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면 이들은 모두 어엿한 연주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는 홍진태에게 특별히 부탁해 ‘클래식 버스킹’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들려달라 부탁했고 이렇게 무대는 펼쳐졌다.
“하나, 둘···!”
내 짧은 호흡에 맞춰 ‘클래식 버스킹’의 연주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강한 선율과 함께 터져 나오는 ‘가을’.
우리의 연주를 듣는 관객 모두가 단 1초도 숨을 고르지 못할 만큼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맞춰 센터의 모두가 파워풀한 음을 내질렀다.
동시에 우리의 연주에 전혀 엇나가지 않는 풍부한 음색으로 화음을 곁들이는 ‘클래식 버스킹’.
고작 반주였다.
‘가을’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은 그냥 단순한 반주.
하지만 그 반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선율은 금방이라도 나를 포함한 센터의 사람들을 집어삼킬 것처럼, 마치 눈보라처럼 몰려왔다.
“흡!”
그리고 이에 맞서는 센터의 교습생들은 모두 숨을 크게 들이쉬고 주 멜로디를 내질렀다.
언젠가 나와 홍진태가 둘이서 ‘피아졸라의 가을’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던 것처럼,
지금.
[Vivaldi – The Four Seasons: Autumn](비발디 – 사계: 가을)
나의 눈앞에서 ‘리 하모닉 클래식 센터’와 ‘클래식 버스킹’ 의 싸움은 지금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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