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93
93. 그랜디오소 (Grandioso, 웅대하게)
지은이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그녀는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상상도 못 한 연주를 선보인 것에 더해 지금껏 터져 나온 적이 없던 큰 반응까지 끌어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객석에서 들려온 반응만을 놓고 본다면 그 누구보다 성공적으로 연주해냈다고 자부해도 좋을 정도였으니까.
“흐음.”
하지만 지은은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딱 하나의 건반’에서 아주 미묘한 음색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은도 곡을 연속으로 연주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약한 차이였다.
하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연주하면 그 ‘작은 소음’은 분명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를 제대로 받을 사람은 다름 아닌 성현. 그가 될 것이다.
지은은 불안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미웠던 성현에게 안 좋은 생길 거라는 예상이 드니 괜히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은아.”
그런데 그런 근심 걱정의 대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성현아···.”
이젠 야, 라거나, 성을 붙여 부르지 않고 이름만 부르는 게 더 익숙해진 남자아이.
“고생했어.”
이번에도 자신을 긍정해줄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던 성현.
그 순간에는 정말 밉기도 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성현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던 것 같았다.
“지은아?”
“어? 어어, 나 힘냈어.”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성현이 재차 부르자 멍하니 대기실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던 지은은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갑자기 ‘나 힘냈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순간적으로 지은은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 했다가도 그게 더 이상해 보일까 봐. 어중간한 자세로 멈추고 말았다.
“지은아. 널 기다리는 분이 계셔.”
그렇게 지은이 의아한 모습을 보였지만, 성현은 응? 하며 고개를 까닥일 뿐.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을 이어나갔다.
“기다리는 분?”
“응.”
고개를 끄덕이는 성현을 보며 지은은 뒤늦게 흥분되던 마음을 진정시켰고 납득했다.
성현의 차례는 다다음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30분쯤이겠지. 그런데도 이런 출구에서 지은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자신에게 뭔가 용무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건,
걸음을 옮긴 지은은 역시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텅 빈 로비였다.
사람들은 다들 연주홀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고, 스태프들도 사방이 탁 트인 이런 장소가 아니라 편하게 쉴 수 있는 휴게실로 향했으리라.
그렇기에 공허하다 싶을 정도로 탁 트인 넓은 공간에는 오직 휠체어 한 대만이 놓여있었다.
“할머니···.”
“지은아.”
김순이 할머니가 지은이를 이름으로 부르자 지은은 꽤나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약 반년간 축적되어 풀리지 않고 있던 이야기보따리가 열리게 되었다.
***
나는 지은이를 김순이 할머님에게 데려다주고는 서둘러 자리를 비켰다.
예전에 나도,
아버지와 다시 척을 지게 될까 두려워서 덜덜 떨고만 있던 시기가 있었다.
지은이가 처해있던 상황은 따지고 보면 당시의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서글픈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미 가슴에 비수가 될 만한 말들을 쏟아낸 상황에 내게 아버지가 버팀목이었던 것과 달리 지은이에게 할머님은 피아노를 배운 이유 그 자체였다.
내가 그녀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제대로 무대에 오르는 일조차 포기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만큼 그 모든 압박감에서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승부를 펼쳐 자신의 재능을 개화시킨 지은이는 대단한 아이였다.
“제가··· 제가 죄송해요······.”
“아니, 아니야. 이 할미가······.”
자리를 피하는 내 등 뒤로 울먹이는 지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할머님의 목소리도 떨려왔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아 아마 두 사람의 관계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는 조짐이 보였다.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
남은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할 부분이겠지.
나는 천천히 대기실을 향해 걸었고 어렵지 않게 돌아올 수 있었다.
푹신한 소파에는 휑한 느낌과 더불어 서늘한 감각까지 감돌고 있었다.
오전에는 연습,
본 무대 때는 계속 지은이의 대기실에 가 있었으니 이곳에 앉는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내 대기실에 내가 앉는 게 처음이라니,
“참.”
묘한 괴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휴식을 취하는 것도 잠시, 눈을 번뜩 뜨고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 내가 무대에 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15분 정도.
슬슬 긴장이라는 놈이 엄습해오기 시작할 그런 시간이 된 것이다.
옷을 갈아입으며 내가 준비한 ‘특별한’ 연주의 메모를 보고 있자, 지은이가 로비로 가는 동안 내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건반 하나가 이상해.’
조율에 무슨 문제가 있던 걸까.
지은이는 연주할 때 듣는 사람보다 자신의 음색에 민감한 편이니, 그냥 과민반응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사소한 경고는 내게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물어봤었다.
‘어떤 건반이?’
‘그게···.’
손가락을 허공에 튕기는 시늉을 하다가 생각이 났는지 한 음계를 말해주는 지은이.
나는 그 음계를 듣고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정말 그 음이야?’
‘응.’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지은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왜 웃어?’
‘그 음이라면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아.’
‘괜찮다고? 네가 연주할 꿈이랑, 황제에 계속 들어가는 음인데?’
‘응. 정말로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이상하다는 표정의 지은이.
하지만 나는 그런 지은이의 얼굴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쓱,
구두끈을 다 묶은 나는 대기실에 있는 거울 앞에 섰다.
분명 미향예고에 입학할 때 샀던 정장이었는데 어느새 몸이 딱 맞게 변했다.
내 몸은 그만큼 빠르게 성장 중이었던 것이다.
“석 달 안에 한 벌 더 사야겠네.”
또각, 또각.
나는 옷을 제대로 입는 것과 동시에 대기실을 나섰다.
대기실을 나와 보이는 모니터 속에서, 이제 앞선 연주자의 연주는 마지막을 달리고 있었다.
이미 연주를 마치고 돌아온 대학생들도, 강력한 우승 후보라 지칭되던 정민주도 말없이 다가온 나를 바라봤다.
그들과 눈이 마주쳤으나 나는 웃었다.
“…!?”
그런 초연한 내 태도에 다른 이들은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다.
그야 그렇겠지.
보통, 마지막 연주자가 감내해야 할 긴장감이라는 건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웃었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사람처럼 미소로 홀가분하게 말이다.
“너, 너는 긴장도 안 하는 거니?”
그러자 정민주가 새된 소리를 내며 내게 물었다.
지금의 그녀는 꽤나 지친 얼굴이었는데, 설마 지은이에게 기술로 보나 감정의 진솔함으로 보나, 이렇게 대놓고 밀려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리라.
“걔도, 너도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거니···.”
정민주가 말하는 걔가 지은이를 말한다는 것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그런 말에 주변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랍다는 듯 토끼 눈을 떴다.
그녀가 한 말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은 현재, 이미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나도 놀랐다.
전생에 정민주는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내 선대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사람이었다.
승부욕이 강한 만큼 자존심을 퍽 높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이런 질문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정작 그런 질문을 내뱉은 본인도, 수치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벼운 애교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떻게 그런 피아노를 연주했느냐’인가.
언젠가 이와 비슷한 질문을 김민호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민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었다.
“피아노가 좋으니까요. 연주하는 게 좋고, 연습하는 것도 좋아서 하루도 안 쉬고 매일 피아노를 쳐요.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된 것 아닐까요?”
‘저도 잘 모르지만요.’
민호는 그렇게 말하고서 조금 허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었다.
민호의 답이자, 내 답이 이 자리에 모인 연주자들의 마음에 들었을지, 들지 않았을지는 모르겠다.
“이성현 참가자! 얼른 와요!”
스태프가 급하게 나를 찾아왔거든.
나는 무대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긴장?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안 할 리가 있겠는가.
나는 지은이처럼 어중간한 질문에도 멋진 답을 찾아낼 만큼 머리도 좋지 않다.
그리고 민호처럼 강철 심장을 가진 멋스러운 연주자도 아니다.
나는 나다.
400명이 안 되는 이 광화문 아트홀에서도 바짝 긴장해 지금도 호흡이 꼬이는, 볼품없고, 별것도 아닌.
스포트라이트 밖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그런 나였다.
지금도 손에 땀을 쥐고 뛰고 있다.
또각,
새로 산 구두가 내는 소리가 괜히 신경 쓰여 걸음 폭을 바꿔보다가 스태프에게 한소리를 듣는, 그런 별것도 아닌 둔재가 나라는 놈의 정체였다.
하지만,
그런 한심한 둔재인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
실상 별것도 아닌 내가 믿어준다는 것 하나만으로 정말 용기를 가져주는 아이가 있다.
평생 음악에 ‘음’ 자도 모르고 살던 부모님조차 나를 믿어주고 계신단 말이다.
“이성현 참가자. 준비됐나요?”
그러니, 나도 이만 어쭙잖은 천재 흉내를 그만둘까 한다.
“네. 물론이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날 보며 미소를 지어주시는 스태프분.
나는 그에게도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다짐했다.
이젠 흉내가 아닌, 진짜 천재가 되겠다.
나는 그 어떤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대로 향했다.
***
“드디어!”
‘가온 일보’의 김백찬의 입에서 그런 말이 터져 나왔다.
무대에 오른 마지막 참가자.
누가 뭐래도 가장, 백찬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 빛나 보이는 연주자, 성현이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늠름한 표정과 당당한 몸짓.
마치 수백 번은 무대에 올라본 경력이 있는 사람과 같은 행동들이었다.
성현의 경력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저런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가 전부 말해준다.
성현이라는 아이가 얼마나, 타고 난 재능과 똑똑한 머리 거기다 겸손이라는 미덕까지 겸비한 천재인지를 말이다.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는 이재상 때만큼 뜨겁지 않았고 정민주 때보다 약했다.
하지만, 성현은 그런 사소한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피아노로 향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들.
그가 건반에 손을 가져가자 드디어, 성현의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첫 곡은, 성현이가 가장 좋아하는 드뷔시!’
[Debussy : Reverie L.68](드뷔시 : 꿈)
몽환적인 음색이 피아노를 타고 흘러넘친다.
시작부터 밀려오는 안타까움과 애절함, 도저히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로 연주해낸다고는 믿을 수 없는 ‘감정’이 너무나도 따스하고 온화하게 밀려왔다.
객석에 있는 이들의 귀를 강제로 열고 악보를 들이붓던 흡사, 공포감마저 느끼게 했던 이재상과 천지 차이였다.
성현의 연주는 무섭지 않았다. 압박감도 없고 긴장감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뭐랄까,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오는 음악이 다시금 애절한 감정을 품고 멀어져 갈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따라가고 싶어지는 음색이었다.
더 듣고 싶은 감각이 관객에게서 샘솟게 만드는 힘이 있는 피아노였다.
힘차게 관객을 쥐고 흔들려 했던 정민주의 파도와도 다른, 그런 맛이 있는 연주를 성현은 선보인 것이다.
딱 첫 곡 만에 김백찬은 확신했다.
‘최지은의 말도 안 되는 성장은 정말 예상 밖이었지만···.’
성현은 그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인터뷰를 해보고 싶어질 만큼, 정말 말도 안 되게 성장해 있었다.
“이건··· 준프로니 프로라 불러도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어···.”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 때 보여주었던 말도 안 되는 성장과는 또 다른 경지에 오른 연주가 백찬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성현이는 이미···. 웬만한 프로들은 다 넘어섰었던 거였어.”
김백찬의 입은 성현이 첫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다물어지질 않았다.
***
‘왜···?! 대체 왜?’
객석에서 숨을 죽인 채 무대를 바라보던 재상은 계속해서 드는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왜 소리가···!’
그 원인은 단연, 성현의 너무나도 완벽한 연주 때문이었다.
분명 일곱 번째 연주자를 거치며 슬슬, 재상의 귀에도 조금씩 들릴 정도로 미묘한 잡음을 일으키기 시작하던 피아노가···.
성현의 손이 닿자마자 정상적인 소리를 내는 것이다!
‘어떻게? 피아노가 알아서 고쳐지기라도 했다는 거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눈을 부릅뜨고 재상은 성현을 노려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남청색의 최고급 피아노는, 그 어떤 ‘잡음’도 일으키지 않았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느슨해진 현은, 탄력을 받지 못해 형편없는 울림을 일으키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고 그 ‘형편없는 울림’이란, 동시에 울리는 건반들과의 상대적인 감각으로 인해 그렇게 들리는 것이고···.
“어?”
재상은 멍청한 소리를 입 밖으로 내며, 혹시나 싶었던 것을 확인했다.
다른 건반들과 비교해 이상이 있는 건반을 비약적으로 강하게 누른다면, 느슨해진 현에서 보통 현과 같은 소리가 날 수도 있다.
‘아니, 아니지. 그건 말이 안 되잖아.’
보통의 인간은 그런 상대적인 음을 단번에 맞추지 못한다.
어떤 다른 사람의 음에 자신의 음색을 끼워 맞추는 억지스러운 연주를 10년쯤 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기행이란 말이다!
설마, 설마 하며 성현의 손끝으로 시선을 옮기는 이재상.
그런 그의 눈에는 보였다.
‘지, 진짜냐!’
성현은 문제의 ‘그 건반’과 닿기 직전에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건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문제 음’을 더 강하게 누르는 행동이 분명했다.
[Piano Concerto No.5 ‘Emperor’](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이어지는 ‘황제’까지.
성현의 연주는 가히 완벽이라 칭해도 좋을 만큼 아름답게 진행되었다.
재상의 ‘황제’가 공격적이고 드높은 성벽이었다면, 정민주의 ‘황제’는 날카로운 검을 빼든 형상에 가까운 연주였었다.
그런데, 몽환적인 ‘꿈’에서 이어지는 성현의 ‘황제’는 웅장함을 뛰어넘어, 웅대했다.
재상이 쌓아 올린 드높은 성벽을 비웃듯 밀려오는 웅대함, 성현의 황제는 거대한 산맥을 그려내듯 힘차고, 박진감있게 나아갔다.
꿈에서의 애절함은 황제에서의 절실함으로 탈바꿈되었다.
연주의 기술부터, 감정을 담아내는 솜씨, 이미지를 다루는 능수능란함까지.
무엇하나 부족함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연주자가 지금, 무대 위에 있다.
재상은 절망했다.
자신의 같잖은 술수 따위 성현은 일곱 번째 연주자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 파훼해버렸다고 재상은 생각했다.
김민호를 닮은 소년.
꼭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에 무모한 일까지 저질렀으나, 그것조차 성현에게는 해를 입히지 못한 것이다.
‘졌다.’
모리스의 자작곡까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완패야.’
그렇게 재상이 절망에 물들어 고개를 떨어뜨리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팅-!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무언가가 튕겨 나가는 소리.
그 자리에서 오직 이재상만은 그것이 피아노 현이 끊어지는 소리였다는 것을 곧바로 인식할 수 있었다.
***
팅-!
날카로운 소음이 관중을 휩쓸고 지나갔다.
2층 특별 객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모리스는 당장, 피아노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그는 주최자이자, 심사위원으로서 당장 성현의 연주를 중단시킬 의무가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까닭은 성현의 연주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긴장을 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엇?”
뒤늦게 반응한 모리스가 급한 눈초리로 옆에 있던 스태프에게 위험하니 연주를 중단하라는 말을 전달했으나, 딩-성현은 이상하게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Maurice: Schnee im Herbst](모리스: 가을의 눈)
모리스에게는 그 무엇보다 더 친숙한 음이 들려왔다.
몰려오는 안타까운 감각과 그 속에 담긴 애상.
울고 있으나 울지 않는 것처럼 담담한 이를 묘사한 곡의 선율은 바로 앞에 있었던 ‘사고’를 단번에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릴 만큼 강렬하게 밀려왔다.
“당장 연주를 멈추게 하겠습니다.”
“잠깐!”
무전기를 켜는 스태프를 멈춰 세우는 모리스.
“어르신?”
“있어 보게나. 저건, 저건···!”
모리스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 연신 말을 더듬었다.
분명 음계의 소리를 내야 하는 피아노 현 하나가 끊어진 상황인데, 성현의 연주에는 큰 타격이 없었다.
왜냐?
성현은 모리스의 가을의 눈, 그 곡에 담긴 모든 악보를 정확히 반음 올려서 연주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니콜로 파가니니가 선보인 기행과 같이.
“정말···. 너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라도 했다는 게냐?”
성현은 현이 끊어진 상태로 연주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모리스의 눈앞에서 해내고 있던 것이다.
모리스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신마저 이토록 놀라게 만드는 성현의 기행에 전신에 전율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전율은 성현이 ‘가을의 눈’을 모두 연주해낼 때까지 계속해서 모리스의 몸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는 듯하구나······.”
그리고 어느새 모리스의 입가는 시퍼런 초승달 같은 호를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