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57
약먹는 천재마법사 357화
승천자의 요람(3)
레녹은 남자의 기억 속에서 몇가지 정보들만 더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하니 주저앉은 남자의 이마에 손을 갖다대 숨을 끊어주는 것까지 잊지 않는다.
귀찮은 상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깔끔한 죽음이었지만, 이런 곳에 오래 신경을 쓰고 있을 만큼 시간이 녹록치 않았다.
승천자를 만나야 하는 이유. 그가 선물하는 대답을 위한 도구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생각은 잠시 접어둬야 했다.
관문이 완전히 개방되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을 터.
다른 이들이 레녹과 이벨린의 모습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
레녹이 남자의 숨을 끊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이 서 있던 저울대의 형상이 희미하게 흐려지면서 그대로 미궁의 모습이 나타났다.
흐려지는 영역 속에서, 레녹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지만 굳이 상대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 눈동자를 매만졌다.
“후우…….”
“끝났구나?”
그 옆에 서 있던 이벨린이 레녹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까 그 여자는?”
이벨린은 대답대신 손가락을 들어 관문 안쪽 벽을 가리켰다.
축 늘어진 전사의 신형. 가슴팍에 세발의 화살이 고스란히 박혀 사인을 드러내고 있었다.
레녹은 그 모습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역을 건드리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군.”
“혹시 몰라서. 그냥 먼저 개입할 걸 그랬나?”
“아니, 네 판단이 맞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상대였어. 섣불리 손을 더 썼다가는 일이 더 까다로워졌을 거다.”
“다 네가 이놈의 영역을 그대로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
이벨린이 한숨을 내쉬면서 레녹의 어깨를 툭 밀었다.
레녹은 거기 떠밀려 그대로 휘청이면서도 뺨을 긁적였다.
“그건……. 할 말이 없군. 하지만 이 놈은 아티팩트와 몇 가지 기아스만으로 자성영역의 새로운 가능성을 직접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걸 확인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어.”
다른 사람의 영역을 대여해서 사용하는 아티팩트. 그리고 그 유물을 가장 완벽하게 사용하기 위해 놈이 쌓아올린 노력들은 레녹에게도 상당한 인상을 남겼다.
레녹은 그를 죽이면서 가능성을 단정 지었지만, 어쩌면 그가 선택한 길이야말로 위계를 완성하지 않고서도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이 아니었을까.
숨이 끊어진 남자의 품 안에서, 복잡하게 회전하는 수정구슬을 손에 쥔 레녹이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 이외에도 적당히 쓸만한 물건들을 찾아봤지만 특별한 물건들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도 이 미궁에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미리 귀중품을 빼돌려놓았던 걸까. 이제 와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벨린은 레녹의 등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살짝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을 뿐이야. 네 탐구심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건 알지만……. 죽고 싶지 않다면 조금만 자제하는 게 좋겠어.”
“…….”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서 한순간의 호기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있어?”
레녹은 이벨린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또 일체의 낭비와 감정소모 없이 이겨내왔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법에 대한 갈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음을 레녹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 끝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떤 가능성이든 흘려넘길 수 없다는 말을 이벨린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벨린은 그런 레녹의 표정을 보더니,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면서 걷기 시작했다.
“뭐, 그런 점을 보완해 주기 위해서 이렇게 조를 짜고 움직이는 거니까.”
“이벨린…….”
“그러니까 이 미궁 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 내가 도와줄게.”
레녹은 그렇게 말하며 앞서 걷는 이벨린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녀와 알고 지낸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벨린은 변하지 않았다.
그 여전한 모습이 오히려 레녹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변하게 만들었다.
“빨리 움직이자. 이제 정말 얼마 안남은 것 같아.”
“……그래. 가야지.”
어느새 레녹과 이벨린의 등 뒤에 놓인 관문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
원형의 방 안에서 열쇠를 두고 시작된 난전의 승패가 정해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관문에서 소요되는 시간이 지나치게 짧다.’
레녹과 이벨린이 관문을 지나자마자 마주친 트레져헌터를 상대하는데 걸린 시간은 20분이 채 되지 않는다.
관문 안에서 마주친 이들이 족히 한 시간은 넘게 아귀다툼을 할 것을 생각하고 전투에 임했건만, 막상 미궁 진입자들이 탈락하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상대적으로 힘의 균형이 편중되어 있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라면…….’
“에반?”
이벨린의 말에 레녹은 결국 생각을 멈추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관문 너머 텅 비어 있는 공터를 지나 미궁의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입구.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정문을 지난 두 사람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입을 벌렸다.
“이건…….”
“이제서야 좀 미궁처럼 보이기는 하는군.”
어둠 속에 잠긴 채 길게 늘어졌던 복도와는 구조가 많이 다르다.
길의 너비가 확 넓어진 것도 모자라, 구불구불 꺾이고 갈림길도 늘어난 심층부.
심지어 눈에 들어오는 보이는 모든 길이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변화하며 방향을 바꾸고 길을 다시 만들고 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
미궁 외부에서 주기적으로 일어나던 대대적인 구조개편.
그 현상은 미궁 안쪽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며 쉬지않고 내부 구조와 길을 바꿔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미궁 안에서 죽은 탐험가들에게 안쪽의 지도가 없었는지 이제 알겠군…….”
레녹이 미궁에서 습득한 탐험가들의 수첩을 뒤적이면서 중얼거렸다.
“아예 지도를 만드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식이었나.”
“첫 번째 관문의 모습도 그렇지만,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서는 통과할 수 없게 만들어놓은 것 같아…….”
이벨린이 그렇게 말하다,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손바닥을 두들겼다.
“혹시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 자체가 진둔이 의도한 바가 아닐까?”
“…….”
“에반 네 말대로라면 미궁의 관문이나 미로가 나타내는 의도 자체가 진둔의 심상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말이잖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와중에도 혹시모를 사태를 염려해 반을 에반이라 불러주는 이벨린인 만큼, 미궁의 본질을 짚어내는 것도 꽤 빠르다.
하지만 레녹은 만약 정말로 진둔이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 자체에 집중할 생각이었다면, 미궁에 들어오는 것조차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러는 대신 미궁 진입 자체가 상대적으로 수월했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레녹은 이벨린에게 그 생각을 털어놓는 대신 단망경을 꺼내 들었다.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을 부여잡고 대답을 구해봤자 의미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보다 한발 앞서서 발을 내디딘 만큼, 최대한 빠르게 전진하는 것 뿐.
“결국 그걸 쓰려고?”
“마력감지가 잘 먹히지 않는 미궁에서 방향을 잡으려면 네 말대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거야. 다음 관문까지는 도움이 되길 바랄 수밖에.”
단망경의 렌즈에 왼쪽 눈을 가져다대고, 다시 마안을 발동시킨다.
그 직후 미궁 한쪽 구석의 풍경이 희미하게 일그러지며, 다시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금발의 소년을 지나, 나이를 먹고 성숙해진 청년의 모습.
다소 천진난만함이 섞여있던 얼굴은 부쩍 차분해져 이제는 그 감정을 쉬이 읽기 어렵게 만든다.
청년은 마치 레녹이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힐끗 그를 돌아보고는 미궁 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자.”
레녹은 말없이 단망경에 눈을 가져다대고 청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 미궁 안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지, 지금 레녹의 눈에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장 확신할 수는 없다.
그저 승천자의 사상전역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받아들였을 뿐.
의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쥘 수 없는 일은 익숙하다.
레녹이 라고 원했던 대답은 항상 예상과는 다른 순간에, 기대와는 다른 형태로 다가오곤 했으니.
중요한 것은 당장 떠오르는 의문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하고 방향성을 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레녹은 알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고 걷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자신의 답이 옳은지 틀린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레녹이 지나온 시간 역시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앞으로 나아갈 뿐.
이벨린은 그런 레녹의 뒷모습을 살짝 가라앉은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 * *
[……]“왜 그래?”
[이대로라면 계획이 좀 틀어지게 될 텐데…….]“계획이라고?”
[나중에 설명해 주지. 일단 지금은 미궁을 통과하는 게 먼저다.]박사의 목소리를 낸 털뭉치가 둥실 떠올라 마이야의 뒤를 따랐다.
마이야는 그런 털뭉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몸을 훌쩍 일으켜세웠다.
첫 번째 관문을 당연하다는 듯 쉽게 통과한 그들이 한결 더 복잡해진 미로 안쪽으로 진입한지 이틀째.
종종 막다른 길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의외로 마이야는 그렇게 헤매지 않고 방향을 찾아낼 수 있었다.
[냄새가 난다. 다른 방향으로 가지.]“좋아.”
마이야의 곁에서 털을 숭숭 내뿜는 이 털뭉치의 존재가, 미궁 안에서 한번 지나온 길을 두번 걷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항하사미궁에서 이런 고리타분한 방식이 먹힐 줄은 몰랐어.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예전에 한 번쯤 미궁에 도전해 볼 걸 그랬군.”
[진둔이 이 미궁을 세운 이유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털뭉치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미궁의 패턴 자체는 11차원 함수를 뛰어넘어 다변화해 내 연산장치로도 패턴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지만, 길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를 방해하지는 않는다.]“다른 의미가 있군. 무엇 때문이지?”
[그것이 자이기스 이더노어가 살아온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장대한 미궁은 그가 살아온 시간과 그로 인해 쌓인 심상의 정경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 사상의 경계. 한 치 앞을 예상하기 어려울 만큼 격변하는 시대를 살았지만, 과거를 되짚어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초월자의 마음이 담겨 있는 셈이지.]생각보다 훨씬 더 진중한 대답에 마이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박사 당신이 진둔을 그렇게 존경하는 줄은 미처 몰랐군. 그쪽이 싫어하는 고리타분함의 결정체가 바로 자이기스 이더노어같은 존재가 아닌가?”
판데모니엄 내부에서도 박사는 거미와 함께 다소 특수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별종중 하나.
그 특유의 극단적인 사고방식과 윤리의식을 내다 버린 연구방향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다른 강력한 초인들과는 궤가 다른 사고와 시야, 그리고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결과물로 입을 다물게 만드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당장의 우열을 인정하고 수긍하면서도, 결코 상대를 올려다보지는 않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굉장히 높은 평가나 다름없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승천에 도전할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들은 능히 존중받을만하다. 그건 진정으로 이 세계의 시간선을 초월한 대답을 내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격을 거머쥐기 위해서는 그만한 각오를 필요로 하지.]“……꼭 승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걸.”
[후후, 불편한 대화였나? 마키나의 승천문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 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것도 모두 그 장대한 실패를 수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마이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확인한 털뭉치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자이기스 이더노어가 승천자가 되기 전까지의 행적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그것을 토대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지. 그리고 승천자에 대해 알면 알수록 깨닫게 되는 거다.]“무엇을?”
[운명에 도전할 자격을 갖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이야.]“…….”
마이야의 등 뒤에서 부유하는 털뭉치가 낮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모든 대답이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다가오는 사람을 거부하지 않는 미궁을 건너는 것 뿐이야.]* * *
검은 섬광이 어두운 미로 사이를 가로지른다.
쾅!
나직한 폭음과 함께 복도를 가로막고 서 있던 석상이 쪼개지고, 돌로 만들어진 사자들이 부서졌다.
“뭔가 갈수록 함정이 더 격해지는 것 같은데.”
이벨린이 어깨를 돌리면서 투덜거렸지만, 레녹은 그녀의 말을 듣고도 고개를 저었다.
“피할 방법은 없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방해물을 상대해야 할 거야.”
“무리를 지어 들어온 녀석들이 확실히 불리하겠어. 라피스가 미리 조를 나눠준 걸 행운이라 생각해야 할까.”
이벨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벽에 잔뜩 돋아나 있는 무수한 창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단순히 두 사람이 서 있는 장소뿐만 아니라, 지나온 길 구석구석이 짓뭉개지고 망가져 있다.
벽이나 바닥이 솟아오르고, 천장이 내리찍히는 구조.
미궁 자체가 구조적으로 공간을 계속해서 좁히면서 여러 명이 함께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든다.
미궁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며 머릿수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만큼 개개인이 우수한 실력자들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강력한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정도 함정과 공간 축소는 버틸 수 있어도, 결국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인원을 나누고 머릿수를 줄여야 하겠지.
“뒤에서 따라오는 인원이 늘었어. 슬슬 시행착오를 끝내고 가닥을 잡은 세력들이 생긴 것 같아.”
바닥에 귀를 바짝 붙이고 집중하던 이벨린이 말했다.
승천자의 마력으로 가득 찬 미궁 안쪽에서 마력감지는 잘 먹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초인들이 힘을 사용하며 퍼져나오는 진동은 미궁을 타고 울려 퍼진다.
레녹이 앞장서 길을 찾는 동안, 이벨린은 궁사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을 이용해서 후방에서 따라오는 이들의 머릿수를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 슬슬 두 번째 관문 가까이 도착한 것 같으니까.”
“그건 다행이네.”
“그리고……. 아마 세번째가 마지막 관문이 될 것 같군.”
단망경을 들여다보는 레녹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첫 번째 관문을 돌파하고 청년이 되었던 환영은, 어느새 장년 남성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환영으로 보이는 남성의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를 생각해 본다면, 세 번째 관문에 접근한 시점에서는 이미 노인의 모습이 되어 있을 터.
만약 이 환영이 한 사람의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거라면, 다음 관문이 마지막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 다시 말해서, 진둔 자이기스 이더노어가 이 미궁을 세 번의 관문을 돌파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설계했다는 의미.
9레벨을 뜻하는 아홉 번도, 진정한 승천을 의미하는 열 번도 아닌 세 번이라.
WORLD 3.0. 세번째 세계.
진둔의 항하사미궁이 만들어내는 세개의 관문.
그 숫자에 레녹이 알고 있는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착각일까?
“……그럴리가 없지.”
“반, 뭐라고?”
“도착했다. 준비해 줘.”
레녹은 그렇게 말하며 세개의 갈림길로 뻗어나간 미로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마치 공간이 바뀌듯이 뒤집히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우주의 모습.
밤하늘을 그대로 구현했다고 착각할 만큼 광대한 공허 속에서, 까마득하게 높이 떠오른 작은 문 한 짝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레녹과 이벨린이 위치한 지상과, 하늘의 끝에 떠 있는 문고리.
그리고 그 사이에 부유하듯이 떠다니는 무수한 돌덩어리의 모습까지.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밟고 올라설 만한 너비부터, 거의 라피스의 부유섬에 가까운 광대한 크기까지 다양한 블록들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
항하사미궁. 그 두 번째 관문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