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60
약먹는 천재마법사 460화
약속이 교차하는 곳(1)
고요하기 그지없는 바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공허 사이로 계백이 간간이 흘리는 어두운 신음만이 울려 퍼질 뿐.
어두운 바다 저편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별무리와 더 멀리서 빛을 비추는 무수한 은하단의 형상까지.
인간의 감각으로는 제대로 인지할 수조차 없는 그 기적과 종말을, 계백의 의식에 동조한 레녹은 또렷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의식하지 않은 순간 불현듯이 바다 저편에서 일어난 불길이 섬광처럼 사라지고, 점액질의 형태로 뭉친 마력의 찌꺼기가 끈적하게 부유한다.
별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자양분을 흡수하며, 끊임없이 호흡하는 거대한 나무줄기.
무수한 운석을 고리처럼 두른 채 웅크리고 공허 저편에서 바다를 노려보는 거인의 잔해.
가오리를 닮은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며 항성의 열풍을 흡수하고, 거대한 눈으로 이루어진 위성이 공전하며 흘러가는 별들을 오시한다.
검은 벼락과 푸른 홍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헤아릴 수 없는 생명과 의식이 합쳐졌다 분열하며 소멸하고, 다시 생성될 뿐.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 어떤 현상이라도 직면하는 순간 미쳐 버리고 말았을 터.
“…….”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외해의 정경.
어느 것 하나 그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들은 없지만, 그 편린을 마주한 것만으로 레녹은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하나가 인간의 입장에서는 종말과도 같은 괴이를 품었지만, 이 어두운 바다에서는 매순간이 찰나에 가까운 잔상일 뿐이다.
인과의 순환을 초월한 외해 바깥에서 존재하는 괴물들은 더 이상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스스로 태어나 소멸하고, 다시 부활하기를 무한하게 반복하는 것조차 무의식의 회귀 속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변덕에 불과했다.
어째서 귀도 교단이 그들을 신이라 부르며 숭배하는지, 그런 광신의 종교가 대륙에서 제일가는 신앙이 되었는지.
지금 계백의 의식을 빌려 외해를 내다보는 레녹은 이해하고 말았다.
그런 신의 힘을 계시받아 화신체로 태어난 사도들이, 어째서 끝내는 광증에 빠져 괴물이 되어버리는지 까지도.
인간의 상리, 세계의 법칙,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는 그들에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다.
헤아릴 수 없는 무료와 배고픔 속에서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줄 무언가를 찾아 헤메고 있을 뿐.
그리고 그 방황과 번뇌의 종착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세계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결말을 강하게 암시하는 정경을 보고도, 레녹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공포가 아니라 감탄에 가까웠다.
‘아름답군.’
단순히 바다의 풍경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만으로, 레녹의 내면에 끝을 알 수 없는 강력한 영성과 직관이 스며든다.
레녹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비웃듯이 스쳐지나가는 그 편린을 관측하고 인지하는 것만으로 사고의 지평선이 급격하게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이 바다를 바라보며 기이하고 위대한 발상과 영감을 채워 넣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레녹은 마음속 한구석에서 치솟아오른 강력한 충동을 억지로 무시하고 의식을 돌려세웠다.
이 이상 빠져들면 위험하다.
지금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계백의 의식과 동조한 상태로 외해를 내다보고 있는 것일 뿐.
여차하면 빠르게 벗어날 수 있도록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있어야 했다.
‘시야가…….’
시선을 돌려 계백이 빠져나온 우물과, 그 별의 형태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계백은 의식을 뒤로 돌리지 않았다.
말뚝을 통해 몸에 박아넣고 활성화시킨 마지막 기아스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을 뿐.
그제서야 레녹은 계백이 외해 밖으로 뛰쳐나온 뒤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방금 그가 되새겼던 아우렐 실포드의 기억은, 레녹이 계백의 감각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부산물이었을 뿐.
진짜 아우렐 실포드는 이미 그 본질조차 사라진채, 그 편린만이 찌꺼기처럼 남아 체내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이번 작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았고, 계백의 존재는 그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이질적이었다.
통제할 길이 없어 대륙 해안선 언저리 바다를 파고들던 미친 괴물을, 느닷없이 바다 위로 끌어올린 것은 물론이고 우물까지 일직선으로 내달리게 만든 것.
미리 준비해 둔 말뚝을 박아넣는 것만으로 계백이 우물 안으로 알아서 기어 들어가게 만든 일련의 조치까지.
광대는 마지막 기아스를 활성화시킨다는 말을 했지만, 레녹은 그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했다.
어째서 계백을 구속하는 마지막 기아스가 활성화되지 않고 잠들어 있었는지, 왜 그것을 지금까지 놓아두었다가 이제서야 활성화시켰는지.
그 기아스의 내용은 무엇인지.
고오오오……!!
생각에 잠긴 사이, 외해 저편으로 솟아오른 계백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암흑의 저편으로, 무언가가 휙휙 스쳐 지나간다.
계백의 감각괴관을 일부 빌려서 외해를 내다보는 레녹조차 제대로 그 형상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
오래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아밀라 베인저의 의식을 뒤졌던 경험을 살려, 그대로 계백의 의식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다.
이 모든 일 자체가 레녹이 계백의 기아스를 우로보로스 마법체계로 분해해 흡수했기 때문에 생긴 공능.
우로보로스를 통해 계백의 기아스에 손을 댄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레녹은 성공했다.
기아스라는 법칙 자체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직간접적인 차원에서 간섭하고 손을 댈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레녹이 지닌 페널티와도 근본적인 부분에서 맞닿아 있는 법칙을 다루는 방법을 깨달았다는 크나큰 성취.
단순히 다른 이들의 기아스에 손을 대는 수준을 넘어, 새롭게 기아스를 만들고 변형시키는 일조차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녹은 그 끝없는 가능성과 새로운 능력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대신,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차륵!!
계백의 체내에서 헤아릴 수 없을만큼 복잡하게 얽힌 사슬의 끝을 쥐고 그 저편으로 향한다.
빠른 속도로 외해를 유영하며 까마득한 공허로 나아가는 승천자의 체내에서, 거꾸로 그 의식의 기저 아래쪽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우로보로스 마법체계를 통해서 한차례 해석하고 분류했던 기아스들을 지나, 대상을 잃고 효력을 다한 폐기물을 거쳐, 마침내 가장 아래쪽 중심부에 숨겨진 열쇠에 닿는다.
계백 아우렐 실포드를 완성시킨 8만여종의 기아스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부여된 명령이자.
계백의 본질이 완전히 반대로 뒤집히며 그 존재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게 된 마지막 기아스.
[■■■■ ■■■ ■■■■.]레녹이 제 손으로 박아넣었던 새카만 말뚝의 형상을 하고 있는 기아스의 끝부분을 잡고 천천히 열어젖혔다.
단장이 직접 만들었다는 말뚝의 힘으로 기아스를 발동시키고, 또 그 의미를 명확하게 계백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그 힘의 흐름을 거꾸로 따라 구현하며 내재된 기아스의 의미를 읽어내기만 하면 충분했다.
한없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실타래의 끝을 잡고, 단숨에 풀어내는 듯한 묘한 감각.
동시에 그 표면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가, 하나둘씩 이해할 수 있는 형상으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끼리리릭…….
‘다시한번……?’
끼리릭……!!
[다시한번 승천에 ■■■■.]끼리리리리리릭……!!!!
[다시한번 승천에 도전하라.]계백이라는 존재를 완성시킨 마지막 기아스.
그리고 가장 깊은 의식의 저편에서 잠들어 있다, 이제서야 비로소 활성화된 마지막 지령.
광대조차 알지 못했던, 단장이 직접 손을 대서 만들었다는 말뚝에 새겨진 문구는 바로.
‘다시한번 승천에 도전하라’는 준엄한 선고였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장에 레녹이 망설였다.
다시한번 승천에 도전하라.
계백은 이 문장을 기억해내자마자 편람과 싸우던 모든 순간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 우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레녹이 한 일은 말뚝을 박아넣은 뒤, 알아서 우물 안으로 기어들어 가려던 계백의 움직임을 보조해 준 것뿐.
어째서 이미 승천에 실패한 계백이 다시 그 원대한 목표에 도전해야 하는가.
그리고 승천에 도전하라는 말을 들은 계백은 어째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외해의 바깥에 몸을 던졌는가.
레녹이 그 모든 의문 사이에서 한줄기 광명을 발견하고, 모든 퍼즐을 끼워 맞추려던 그 순간.
뿌우우우우…….
어디선가 희미한 음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그 공허에서는 인간이 지닌 모든 감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비틀린다.
생명체가 내뿜는 모든 자극과 신호에 반응하지 않고 모든 것을 흡수해버리는 공허에서, 인간은 제 본질조차 잊고 미쳐 버리는 것이다.
인과과 순환하는 일 없이, 원인과 결과가 그 연원을 가리지 않고 발산되어 수렴하지 않는 거대한 암흑의 바다.
그 공간에서 들려오지 않아야 할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레녹이 그것을 제대로 생각하고 이해하기도 전에, 계백이 스스로의 몸을 둥글게 말아 올렸다.
차르르륵…….
그 몸을 구성하는 수만 갈래 사슬이 한데 모여 길쭉하게 압축되어 나선형의 기둥을 그리고, 양극단으로 모여들며 좁아진다.
마치 거대한 탄환처럼 변한 계백의 몸뚱어리 저편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춤추던 어둠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니, 가라앉는 것이 아니다.
쉴 새 없이 춤추는 암흑의 바다가 가려질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계백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단지 계백의 감각으로도 그것을 온전히 인식하고 바라볼 수 없어서, 그 너머의 풍경이 비춰 보이고 있을 뿐.
레녹이 그 존재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순간, 이미 그것은 존재하고 있었다.
뿌우우우우……!!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 사이로, 침잠하던 어둠 끝에서 무언가가 갈라지듯 벌어진다.
수백 미터는 되는 계백의 몸을 담을 만큼 장대한 균열이 양 끝으로 뜨여지고, 그 사이에서 거대한 원이 나타나 천천히 회전했다.
조금씩, 그러나 틀림없이 움직이며 수축했다 벌어진다.
원의 반경이 수백 미터를 망라했음에도 레녹은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계백의 감각을 통해 보고 확신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
지금 그 눈앞에 보이는 원의 움직임이, 마치 동공의 확장과 수축과 비슷해 보인다는 것을.
계백의 앞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며 떠오른 원은, 타락한 승천자보다 거대한 어떤 존재의 눈동자였던 것이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레녹에게 음악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떨쳐 울리기 시작했다.
빠아아아아아아아앙!!
계백에게는 귀가 없음에도, 레녹에게는 단지 의식만이 부유하고 있을 뿐인데도 음악소리가 귀청을 찢을 것만 같다.
마치 이제서야 그 존재를 비로소 인지했냐는 것처럼, 칭송하고 과시하듯 끝없이 웅장하게 볼륨을 높여간다.
그 소리에 눈앞이 거세게 흔들리는 것처럼 감각이 요동치고 의식이 멀어진다.
계백이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내지르며, 탄환처럼 말아올린 그 육신을 그대로 앞으로 밀어 올리고.
반대로 그 직후 레녹의 의식은 그 움직임에 반발하듯 뒤로 튕겨 날아가 버렸다.
지금까지 외해 바깥을 향해 유영했던 순간이 거짓말처럼, 곱절로 빠른 속도로 벗어난 길을 돌아간다.
이 길이 아니라고 온 정신과 의식이, 영혼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듯 하다.
콰아아아아아아!!
그 음악소리를 지우려드는 듯 귓가로 몰아치는 파도소리.
당장이라도 의식을 놓아버릴 것만 같은 충격 속에서 레녹은 어떻게든 눈을 뜨고 빠르게 멀어지는 풍경을 응시했다.
이렇게나 빠르게 그 자리에서 멀어지고 있는데도, 계백보다 훨씬 거대한 생명체의 전신을 두 눈으로 볼 수 없다.
단단한 배와 같은 형태의 머리를 바다 사이에 무겁게 뉘고, 나른한 자세로 늘어져서 비늘 어린 자태를 뽐내는 길쭉한 동체.
수천 미터 크기의 함선을 제 머리로 삼은 용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저것을 레녹과 같은 생명이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까.
별들 사이를 부유하며, 은하들 사이를 헤엄치며, 항성 주위를 배회하는 유성을 잡아먹고 태양의 눈물을 마시는 자.
세계의 결말과 함께 하늘이 열리고 지상에 강림하리라 예언 받는 존재.
레녹은 처음으로 그 거악들 중 하나의 진체를 두 눈으로 목격했던 것이다.
끼리릭…….
계백의 몸이 탄환처럼 느릿하게 회전하며 천천히 거대한 눈동자 한가운데로 돌진한다.
마치 그 몸을 무기로 삼아서 그 존재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렇다면 다시 한번 승천에 도전하라는 그 말은-
푸슛!!
눈동자 한가운데를 계백의 몸이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눈동자의 동공 일부가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한다.
마치 먹물을 녹인 것처럼 새카만 점액질이 눈동자 사이를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눈동자는 자신을 공격한 계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금 시선을 들어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 시선의 방향이 점차 멀어지는 레녹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그 찰나의 순간.
빠지직!!
별안간 들려온 전류 소리와 함께 레녹의 의식이 그대로 꺼져 버렸다.
* * *
“하아, 하아……!!”
필레놈 자치령, 부유섬 군락지.
초월적인 결계술로 숨겨진 달의 정원.
지금은 무너져 내린 거대한 탑, 등대가 위치한 청의 눈의 본부.
주시자 페른은 미친 듯이 숨을 헐떡이며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보, 보고해야 해……. 지금 전하지 않으면!!”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고 땀범벅이 되었음에도 멈추지 않는다.
복도 곳곳에 죽은 듯이 쓰러진 주시자들의 모습.
어설프게나마 무기를 집어 든 이들도 있지만 휘두르지도 못하고 고꾸라진 것처럼 볼품없는 자세다.
희미하게 숨이 붙어있기는 하나, 의식은 완전히 날아가 육신만이 생명반응을 붙잡고 있는 상태.
방비가 충분하지 못했던 걸까. 페른은 감히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조차 없었다.
그만큼 지금 이 등대에 침입한 상대는 그녀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었으니까.
천견이 직접 구성하여, 승천자조차 잠시 묶어둘 수 있다는 달의 결계를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등대의 전산망을 순식간에 무너뜨린 기인.
등대에 남아 있던 수많은 주시자들은 물론이고, 라피스를 대신해 자치령을 지키고 있던 극위능력자조차 그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죽음보다 못한 결말이라는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이내 자신에게 찾아올 것이라 직감하면서도 페른은 멈추지 않았다.
등대가 위치한 탑의 꼭대기.
이제는 수복이 끝난 관제탑을 박차고 들어간 그녀가 쓰러진 주시자들을 밀어내고 장치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상황은 돌이킬 수 없어졌지만 누군가는 이 사실을 바깥에 알려야 한다.
지금 자리를 비운 등대지기에게 이 사실을 전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것이 페른에게는 죽음보다 못한 결말일 테니까.
삐빅, 삐비빅……!!
“안 돼, 조금만, 조금만 더……!!”
관제탑의 장비를 만지는 손에 힘이 빠지고, 눈이 조금씩 감긴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어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이대로 잠들게 되면 자신도 다른 주시자들과 만나게 되는 걸까.
영영 깨어나지 못한 채, 죽음보다 못한 영면에 빠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주시자가 되며 각오했던 끔찍하면서도 장구한 희생보다는 나은 일일지도 모르지.
딸깍……!!
계기판 위에 쉴새없이 핏물을 떨구면서도 간신히 메시지를 완성한 페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신 버튼을 누른다.
그녀의 손가락이 계기판에 떨어지며 등대에 벌어진 모든 상황을 본대에 보고하려던 그 순간.
덥썩!!
어디선가 나타난 손이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아…….”
가물가물해지는 페른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덜덜 떨리는 시선을 힘겹게 들어올려, 그 손을 잡아챈 사람의 얼굴이라도 확인하려 했지만.
그 목 위쪽으로 버벅이는 노이즈가 페른의 마지막 저항조차 무위로 만들었을 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그녀가 그대로 머리를 계기판에 처박고 의식을 잃었다.
쿵!!
힘없이 쓰러진 페른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인영은, 가만히 그녀의 손목을 놓고 등을 돌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조용해진 복도를 지나, 탑의 정상으로 향한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동.
그 공동의 중심에서 느릿하게 부유하고 있는 거대한 천구.
우우우우웅……!
천구의 주위로 흐릿한 광채가 별처럼 회전하며 어두운 공동 안쪽을 신비한 빛으로 밝히고 있다.
인영은 천구의 앞에 놓여 있던 안락의자를 지나쳐, 조심스럽게 천구에 손을 가져다댔다.
매끄러운 손가락이 천구의 표면을 부드럽게 쓸어올리려던 그 순간.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상상해 왔죠.”
인영의 뒤쪽에서 조용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낀 시선을 돌린 인영의 눈에 그가 지나친 안락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방금 전까지 텅 비어 있던 안락의자에,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여성이 단정하게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파란 머리칼. 찬란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단단하게 굳은 입매.
그 표정에 담긴 단호하고도 선명한 결의.
인영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직접 만날 생각은 없었는데……. 또 시간선이 꼬이게 생겼군.”
“…….”
“연락이 닿을 수단은 다 끊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변수가 생긴거지?”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의 음색이 섞인듯한 기이한 울림.
턱을 괴는 기색으로 고민하던 인영은, 계기판에 떨어진 페른의 혈액을 기억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기판이 터치식이었나……, 그건 예상하지 못했어. 이 세계에서는 꽤 구식으로 통하는 방법일 텐데, 용케 등대 관제탑에 설치할 생각을 했군.”
“저야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라피스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설마 판데모니엄의 단장이 단신으로 등대에 침입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