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626
약먹는 천재마법사 626화
강철의 규율(1)
“보얀에게도 나름대로의 계산은 있었겠죠.”
입술을 질끈 깨문 보얀을 보며 레녹이 말했다.
“화로가 지나치게 많아 열원을 특정하기 어렵기에 정령을 몰래 키우더라도 알아차리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
“화로가 다섯 개로 늘어난 뒤에도 정령이 열기를 먹어치우면 티가 나지 않을 줄 알았겠지만, 문제는 정령이 성장하면서 스스로 열기를 내뿜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거죠.”
설령 화로 내부 시설을 점검하기 위해 누군가 안쪽을 살펴본다고 하더라도, 정령은 영체 상태로 변해 숨어 있기만 하면 그만.
그게 아니면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공방 화로 통로 사이를 도망쳐 다니며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기계도시에서는 상대적으로 정령술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점도 오랫동안 정령을 숨기기에 좋은 환경이었을 겁니다. 나름대로 머리를 잘 썼군요.”
“어째서냐, 보얀.”
사이버드가 그제서야 붉게 물든 얼굴로 손을 떨면서 보얀을 돌아보았다.
“내 너에게 단 한 번도 섭섭하게 대우해준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내 믿음을 몇 년 동안 배신하고……!!!”
“……죄송합니다.”
“사과가 아니라 이유를 말해보란 말이다!!!”
서슬 퍼런 호통에도 보얀은 대답하는 대신 정령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정령을 잘 키워서 성공적으로 정령술사가 될 수 있다면, 어떤 의미로는 공방의 장인으로 남는 것보다 더 좋을 수도 있으니까요.”
레녹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인 보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아마 공방에서 보낸 시간이 모두 무의미해진다고 하더라도, 몇년만 버티며 이렇게 정령을 키우면 충분하다 생각한 것 아니겠습니까?”
“네, 네가 뭘 안다고……!!”
보얀은 그 말에 마치 화들짝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나 레녹의 멱살을 쥐었다.
“웃기지마, 오늘 막 상급 공방지구로 올라온 애새끼가 감히……!!”
“얀!!”
사이버드가 강하게 호통을 쳤지만, 잔뜩 흥분한 보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증거 있어? 알량한 추측 몇 번 때려 맞췄다고 내 생각을 다 안다는 것인 양 지껄여대는 거야?”
“증거?”
하지만 레녹은 그런 보얀의 손길에 몸을 내맡긴채로 피식 웃었다.
흔들리는 머리를 보얀의 귓가에 가져다 대고,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그 정령.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내가 맞춰볼까?”
“……!!!”
레녹이 사이버드의 의뢰를 받아들인 것은, 상급 공방지구에서 새로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를 찾아온 사이버드에게 은은하게 풍겨나오는 숨길 수 없는 정령의 흔적.
그것이 어떤 의미로는 레녹이 기계도시에서 찾고 있는 본질적인 목적과도 연관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얀은 정령을 우연으로 손에 넣은 것이 아니다.
그에게 정령을 선물하고, 정령술사로서의 재능을 깨우쳐준 누군가.
그 배후가 레녹이 인지하고 있는 마키나의 비밀과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레녹은 방금 그 반응을 통해 확실하게 확인했다.
“그 반응을 보니 후보를 더 좁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익……!!”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의 비밀이 전부 들켜버릴 거라 생각한 것인지, 보얀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탁!!
레녹을 힘껏 뿌리친 보얀이 품 안에 들고 있던 불의 정령을 앞으로 힘껏 내민 채, 마력을 끌어올린다.
보얀의 마력에 반응하며 스스로의 힘을 동조시킨 도마뱀 정령이 곧바로 입을 쩍 벌리고.
[쉬이이잇!!]기묘한 쇳소리와 함께 격렬한 불길을 그대로 토해냈다.
콰아아아!!!
막대한 열기의 파도가 삽시간에 공방을 잠식하는 것도 모자라, 벽면을 뚫고 그대로 터져 나왔다.
상정했던 것 이상의 엄청난 화력에 다른 장인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고, 그 화염에 휩쓸린 레녹에게 시선이 쏠린 그 순간.
“이익……!!”
옆구리 사이로 불의 정령을 들쳐멘 보얀이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자신이 구멍을 낸 공방의 벽으로 내달려 사라지는 얀의 모습.
화염의 바람 속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웅크리고 있던 장인들이 허둥지둥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겨, 경찰!! 경찰 불러!!”
“아니, 소방관을 먼저 불러야지!!”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아까 라이먼이라는 장인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선 몇몇 장인들이 황급히 불의 정령이 휩쓸고 사라진 자리를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마뱀이 내뿜은 불길에 잔뜩 그슬린 작업대 근처에 시체가 된 잿더미는커녕, 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
화로 옆에 선 채로 하품을 하고 있던 마우저가 태평한 기색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을 뿐이다.
* * *
“하아, 하아!!”
보얀은 옆구리에 도마뱀 들고 미친 듯이 뛰었다.
거리 곳곳에서 보얀이 들고 있는 정령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 황급히 옷깃 속에 도마뱀을 밀어넣고 감추었다.
정령이 내뿜는 열기와 격렬한 질주로 인해 순식간에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지만 보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스승의 코앞에서 범인으로 추궁을 당한 시점에서, 보얀의 온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니까.
“X발, X발……!!!”
입으로는 쉴 새 없이 험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어떻게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골목길로 돌아 도망쳤다.
처음에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정령을 손에 넣었을 때만 하더라도, 정령술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조금 공방에 신세를 질 생각뿐이었다.
작은 바람에서 시작된 희망이, 끝없이 불어나며 욕심으로 변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화로에 정령을 몰래 키우기 시작하며, 공방 내부 온도가 오락가락하는 것을 밝히지 못한 그때부터 이미 늦었었다.
“그 새끼만 아니었더라도……!!”
스승이 데려온 그 수상쩍은 장인이 지껄이는 개소리들만 아니었더라도, 결코 들키지 않았을 텐데.
이대로 몇 년 더 화로의 불길을 먹이로 삼아 정령을 키우며, 어엿한 한 명의 정령술사가 되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보얀의 곁에 남은 것은 화로의 열기를 탐욕스럽게 잡아먹고, 이제는 스스로 불길을 뿜어내기 시작한 정령 하나뿐.
[쉬시싯?]옷깃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혀를 날름거리는 도마뱀을 바라보던 보얀이, 이내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담벼락 사이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정령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나름대로 관련 서적과 정보들을 뒤져보았지만, 보얀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기계도시 마키나에 존재하는 정령술에 관한 정보들은 모두 오래전의 것들뿐.
하지만 보얀은 그렇기에 정령술사가 되는 것이, 이 갑갑한 기계도시에서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라 믿었다.
고지식한 공방의 늙은이들과 장인들의 경험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정령의 불꽃.
이런 정령의 불꽃을 통해 금속을 제련하거나 가공하고 싶어하는 장인이나 사업가들이 없을리가 없다.
그리고 정령술사가 거의 없는 이 기계도시에 이러한 능력은 보얀만이 제공할 수 있는 독보적인 이득.
이 능력이라면 보얀은 기계도시에서 그 누구도 차지하지 못한 독특한 입지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앞으로 2년 안에 공방에서 나와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기발한 발상이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
보얀이 기대고 주저앉은 담벼락의 바로 뒤쪽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벌떡 일어선 보얀을 인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담벼락 뒤켠에서 누군가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령의 속성마력은 물질계에서 큰 특이성을 구현하기 어렵지. 정령 자체의 위계가 높거나, 영체의 본질 자체가 특수한 환경에서 비롯되어야 가능한 일.”
담벼락에 기댄 레녹이 보얀이 끌어안은 정령을 보며 눈짓했다.
“네 정령은 둘 중 어느쪽에도 해당되지 않아. 헛된 꿈이다.”
“…….”
대놓고 눈앞에서 보얀의 생각을 부정하고 있는데도, 보얀은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 공방에서 그를 추궁하던 라이먼이라는 장인과,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풍기는 기세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
어딘가 정갈하고 단정하게 느껴졌던 장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무표정한 얼굴로 보얀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다음 행동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위태로운 일렁임.
형태를 알 수 없는 섬뜩함과 예기가 섞여서 묘한 위압감으로 흩어져 퍼져나온다.
보얀은, 순간 레녹이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와아악!!!”
발작하듯 얼마 되지 않는 마력과 의념을 한껏 끌어올려, 끌어안은 정령에게 한껏 들이붓는다.
주인의 근원적인 욕망과 살의를 선명하게 인지한 도마뱀이 불타는 깃을 꼿꼿이 세우고 몸을 부풀린 채 입을 쩍 벌린 그 순간.
도마뱀 정령의 입안에서 불꽃의 파도가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
보얀이 이제껏 정령으로 시도했던 것 중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저열한 불길.
이거라면 틀림없이 저 남자를 한줌의 시체도 없이 불태워 없애 버릴 수 있다.
궁지에 몰렸던 보얀의 얼굴이 순간의 희열로 뒤집힌 그 찰나, 가만히 서 있던 레녹의 코앞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화염의 파도를 가로막았다.
쏴아아아!!!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골목길. 그 너머에서 느닷없이 쏘아진 물줄기.
멍한 얼굴로 시선을 돌린 보얀이 레녹의 바로 옆에서 그 이유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
“소화전이……!!”
거리 한쪽 구석에 먼지가 쌓인 채 서 있던 소화전이 느닷없이 폭발. 그 물줄기를 정확하게 레녹의 코앞에 쏘아내 불길을 막아낸 것이다.
천천히 사그라드는 불길을 바라보며 레녹이 물었다.
“운이 좋았군. 그렇지?”
“말도 안 돼. 이런 게 우연일 리가!!!”
보얀이 정령의 불길을 쏘아낸 시점에 딱 맞춰 소화전이 폭발할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행운의 신이 그를 비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
하물며 일대 거리가 시스템과 전자신호로 통제되고 있는 마키나에서 오류나 우연이라곤 있을 수 없다.
그것을 알고 있는 보얀이 어떻게든 반박하려 했지만, 레녹은 그런 보얀의 저항을 한마디로 찍어눌렀다.
“우연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지?”
“……뭐?”
“그냥 우연이라고,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하는 게 네게는 더 편하지 않겠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보얀이 그 의미에 대해 멍하니 생각하던 그 순간.
철컥!!
골목길 옆에 서 있던 전봇대가 갑자기 반으로 뚝 부러져 보얀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렸다.
쿠웅!!
“흐아악!!”
시멘트 덩어리의 묵직한 중량을 간신히 피해낸 보얀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선 그 순간.
근처 담벼락이 산산조각 나며 그 안쪽에서 주인 없는 차량이 튀어나와 보얀을 들이받았다.
콰앙!!
[쉬싯!!]보얀의 품에 안겨 있던 도마뱀이 입을 쩍 벌리고 한 번 더 불길을 내뿜자,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는 차량의 형상.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거리의 온갖 시설과 구조물이 악운이라도 닥친 것처럼 일제히 보얀에게 쏟아져 내렸다.
쾅!!
조립이 풀린 신호등이 머리 위로 떨어져내리고, 도로 아래쪽에 뭍힌 전선이 과열되어 발 밑에서 녹아내린다.
근처 쓰레기통이 폭발하며 그 내용물을 뒤집어씌우고, 거리 근방을 순시하듯 회전하던 드론이 보얀의 등허리를 들이받았다.
정령의 힘을 사용해 레녹을 공격하려 할 때마다, 거리 전체가 살아 있는 생물이 된 것처럼 집요하게 보얀의 발을 붙잡는다.
“하아, 하아……!!”
주변에서 폭발하고 비산하는 시설물들을 피해 어떻게든 레녹을 상대하기 위해 보얀이 레녹의 앞으로 달려나온 그 순간.
발 아래쪽 하수구 뚜껑이 폭발하듯 치솟아 올라, 그대로 보얀의 턱을 후려갈겼다.
으직!!!
턱 아래쪽이 사선으로 비틀린 보얀의 눈동자가 그 자리에서 뒤집혔다.
그래도 마력사용자라고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의식을 붙잡고 싸움을 이어가려 발악하지만.
“……우웩!!”
레녹의 코앞까지 접근한 순간,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하며 주저앉아 버린다.
레녹은 그런 보얀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어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보얀을 내려다보았다.
“정령술사로서 재능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군. 영성만으로 무언가를 느낄 정도면, 감각 자체는 살아 있다는 말이겠지.”
“너, 너 도대체 뭐야…….”
파리해진 안색으로 주저앉아 버둥거리던 보얀이 힘겹게 말했다.
레녹은 그런 보얀의 말을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보얀의 품안에서 도마뱀 정령을 꺼내들었다.
아무런 마력이나 힘도 담기지 않은 손길인데도, 보얀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정령을 내주고 말았다.
도마뱀 역시 아까와는 달리 조금도 반항하지 못하고, 죽은 시체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가만히 레녹의 손에 들어 올려질 뿐.
“최근에 정령을 좀 많이 죽였거든.”
레녹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기척을 좀 풀어서 그걸 느끼게 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싶은데.”
“허억, 허억……!!”
이제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는 보얀을 두고, 레녹이 천천히 도마뱀을 들어 올려 바라보며 말했다.
“네 정령, 아까는 설명해 주지 못했지만 꽤 특이한 영체야.”
“……뭐?”
정령을 바라보는 레녹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정령이지.”
다른 장인들에게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레녹은 이 도마뱀 정령이 이 세계에서 비롯된 정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WORLD 2.0에서 불의 정령술을 습득하는 것과 동시에 정령술사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졌던 불의 정령.
엘도르곤. 타르힘. 형태를 알 수 없는 언어로 불렸지만 플레이어들에게는 ‘샐러맨더’라는 이름으로 통했던 정령펫.
보얀이 손에 넣은 것은 바로 2세계의 유물이자 정령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사이버드 공방의 문제점을 비교적 빠르게 인지하고 원인을 찾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레녹이 알고 있던 정령의 흔적과는 다소 궤가 달랐기 때문.
그 희미한 이질감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레녹은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구세계의 흔적이 생각 이상으로 마키나에 널리 퍼져 있다.’
기계도시 마키나에서 구세계의 흔적을 직접 목격한 것이 이걸로 벌써 세 번째.
거대도시에서도 몇번 보기 어려웠던 그 지식과 흔적을 이 도시에서 여러번 마주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공방에서 보얀이 레녹을 습격하고 도망친 그 순간, 곧바로 붙잡지 않은 것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험지나 극단적인 환경조건에서 우연히 정령이 탄생하기도 하지만, 샐러맨더를 너 혼자서 손에 넣었을 리는 없겠지.”
레녹이 물었다.
“누구지?”
“…….”
그것이 보얀의 가장 치명적인 기억이자 약점이기 때문일까.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와중에도 보얀은 어떻게든 대답을 회피하려 했다.
턱!!
레녹은 그런 보얀의 턱을 한 손으로 쥐고, 강제로 자신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대답해.”
키잉!!
“아, 아아…….”
보얀의 눈동자에 비치는 레녹의 눈이 기묘하게 회전하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전투 끝에, 한계까지 몰린 보얀의 정신.
신체적, 정신적으로 도망칠 구석을 완전히 틀어막고, 막다른 곳까지 끌어낸 것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져내린 보얀의 정신이 마안에 관통당해 기억의 가장 깊은 곳을 헤집었다.
파앗!!
[눈가리개. 확실하게 했겠지?] [네, 넵. 물론입니다.]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 보얀과 무뚝뚝한 남자의 목소리만이 들린다.
[내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시야각을 가리는데 빈틈이 없도록 하거라.]어딘가 고풍스러운 말투를 사용하는 남자가 재차 말했다.
[문의 빛을 조금이라도 마주하고 나면, 평범한 인간은 그 자리에서 백치가 될 수 밖에 없을 테니.] [저, 저…… 대체 문이라는 게 뭡니까?]자신을 걱정해 주는 남자의 말에 살짝 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걸까.
기억 속의 보얀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왜 저 같은 장인에게, 대체 이런 짓을…… 시키시는 겁니까.] […….]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오기는 했지만, 이건 몰랐어요…… 이런 건 너무 무섭다고요!!]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걸으며, 양손이 묶인 채로 덜덜 떨고 있는 보얀.
남자는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고, 존재는 소멸에 언제나 선행하는 법이다. 이 법칙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해.] [……예?] [소실되었던 기억을 일깨운 책임은 우리 모두가 나눠 짊어져야만 하지.]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게 되묻는 보얀을 무시하고 남자가 그를 타일렀다.
[네가 선택을 받았다거나, 희생을 해야하는 건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너 말고도 이미 많은 이들이 문 안에서 잊혀진 것들을 꺼내 쥐었고, 그 대가로 잊어버렸으니까.] […….] [너는 문 앞에 서서, 우리에게 실패의 굴레가 아직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주기만 하면 충분하다.]남자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것이 바로 승천에 실패한 우리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동앗줄일테니까.]그 안에 담겨 있는 광기 어린 의지에, 보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저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받아들이고 바들바들 떨며 앞으로 걷기만 할 뿐.
[필요한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오래 참을 필요도 없지. 오늘 이 자리의 대화도, 모두 한 줌의 물거품이 되어 세계 아래로 가라앉을 뿐.]철컥!!
그 순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보얀의 코앞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쿠웅, 위이잉, 딸깍, 쏴아아!!
크르릉, 꿀럭……!!
기계인 듯, 생물인 듯, 괴물과 인간, 그 모든 실재하는 형상이 한데 뭉쳐 움직이는 듯한 기괴한 소리.
모든 감각을 차단당한 채, 두 귀로만 그 소리를 듣고 있는데도 그 압도적인 정보량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팔 다리와 어깨가 주체하지 못하고 덜덜 떨리고, 입 안에서는 침이 잔뜩 고인 채 줄줄 새어 나왔다.
제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보얀이 들려오는 소리속에서 무아지경으로 호흡조차 잊은 그 순간.
남자가 말했다.
[문이 열린다.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