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516
516.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하실걸요.
세계 최고 갑부와 패션계에서 가장 핫한 모델의 스캔들인 만큼 내셔널 인콰이어가 특종을 터트리자 다른 언론사에서도 관련 기사가 홍수처럼 마구 쏟아졌다.
특히나 한국에서의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스캔들 기사가 나오자마자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박재성과 엔슬리, 빅토리아 시크릿 메인 모델 등 관련 검색어가 1~10등까지 몽땅 다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연히 기사마다 댓글이 수백, 수천 개씩 달렸다.
↳내 마음 속의 엔젤이었는데 이럴 수가~~TT
↳젠장, 이제 정말 다 가졌네.
↳재성이 형 이러기야.
↳박 회장이 뭐가 아쉬워서 엔슬리를 만나나 생각했는데…… 빅토리아 시크릿 화보 보니까. 아주 격하게 이해가 되네.
↳윗님……. 공유 좀…….
↳딱 보니까 돈 보고 달라붙은 거네.
↳그건 아닐걸? 엔슬리 작년 수입이 4,400만 달러였음.
↳한국 돈으로 500억이 넘네…… 미쳤다.
↳예쁜 데다가 몸매까지 죽여주는데 돈도 잘 버는 여자친구가 있다고요?? 실화??
↳2222
여느 때와 같이 회사로 출근하던 재성은 손에 든 애플패드로 스캔들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어보고는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으응.”
세상에 기삿거리가 그렇게도 없는지 언론사들이 아주 신이 나서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재성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마 경제란이 아니라 연예란에 내 기사가 날 줄이야.”
아무리 재성이라도 이런 사태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엔슬리와 같이 밤을 보내고 파리에서 데이트를 즐긴 건 맞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서로 호감이 있는 건 분명해도 기사에 쓰인 것처럼 사귀는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또 모르지. 이대로 좋은 분위기가 이어졌으면 애인으로 발전했을지도.’
차츰 가까워지다가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내주는 사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스캔들이 터져 버린 바람에 그것도 완전히 물 건너가 버렸다.
오히려 전보다 훨씬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미안해요. 내가 괜히 불러내는 바람에……. 이쪽은 소속 에이전시에서 곧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기사를 내놓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재성은 어젯밤 엔슬리와 전화한 내용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가슴팍에서 진동벨이 울렸다.
재성은 안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을 꺼내 박경수 회장의 전화인 것을 보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아버지.”
[어디냐?]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스캔들 기사를 보셨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출근하는 중입니다.”
[바쁜 일이 없으면 평창동에 잠깐 들렀다가 가거라.]“……예.”
[기다리마.]통화를 끝낸 재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스캔들 기사가 난 걸 가지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입맛을 다신 재성은 조수석에 타고 있는 선정혁 대리를 불렀다.
“선 대리.”
“말씀하십시오.”
“평창동으로 차를 돌려요.”
“알겠습니다.”
잠시 뒤 강남으로 향하던 승용차는 방향을 바꿔 박경수 회장의 저택이 위치한 평창동으로 갔다.
* * *
얼마 전부터 부회장으로 승진한 큰아들에게 그룹 경영은 거의 맡긴 박경수 회장은 예전과 달리 드문드문 회사를 나갔다.
후계 승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큰아들한테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오늘도 박경수 회장은 자택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면바지에 가디건을 걸친 편한 옷차림.
커다란 통창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과 진한 원두 향이 풍기는 커피까지 완벽했다.
원래대로라면 서재 소파에 앉아 책이라도 읽고 있어야 했지만 어쩐지 박경수 회장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유는 당연히 아침부터 언론이 떠들어대고 있는 재성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박경수 회장은 매일 아침 각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조간을 돌려 읽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눈뜨자마자 보이는 게 막내아들 놈의 데이트 사진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 접니다.”
“들어와라.”
박경수 회장은 읽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이내 두툼한 원목으로 만든 서재 문을 열고 재성이 들어왔다.
본인도 뭣 때문에 불려왔는지 알 텐데 조금도 위축된 기색 없이 담담한 모습이었다.
재성은 탁자 위에 펼쳐진 신문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비어 있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스캔들 기사 때문에 부르신 거예요?”
“그래.”
박경수 회장은 은색 안경을 벗으며 조용히 대꾸했다.
서류나 책을 볼 때만 쓰는 안경이지만 슬슬 노안을 걱정해야 될 때가 왔는지 최근 들어 자주 사용했다.
“너도 당당하게 독립해서 어엿한 한 그룹의 총수가 됐지만 그래도 자식 문제라 그냥 넘어갈 순 없더구나. 사실이 뭔지 알아야 언론에 휘둘리지 않을 거 아냐.”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재성은 의외로 침착하게 물어보는 모습에 살짝 놀랐다.
예전 같으면 바로 호통부터 쳤을 텐데 어쩐 일로 이렇게 차분한가 싶었다.
재성을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완전히 인정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은퇴를 준비할 나이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재성은 전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리에서 데이트를 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기사에 난 것처럼 사귀는 사이는 아니에요.”
“그럼 잠깐 만난 여자라고?”
“그렇게 말하긴 좀 그렇고……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해두죠.”
아무리 그래도 엔슬리를 하룻밤 상대로 취급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만약 스캔들이 터지지 않았다면 좋은 사이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친구 사이라.”
박경수 회장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남녀 사이에 그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구나. 뭐, 요즘 세대들은 우리 때랑 다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혼자 중얼거리면서 납득한 박경수 회장은 재성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럼 앞으로 더 깊은 관계가 될 가능성은 없다 이거야?”
“지금은 아니고요. 하지만 나중에 또 어떻게 될지 모르죠.”
애매한 대답에 박경수 회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니. 사업은 똑 부러지게 잘하는 놈이 여자관계는 왜 그 모양이야? 쯧쯧.”
박경수 회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이 젊을 적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만나자마자 불꽃이 튀어 호텔로 직행한 적은 있어도 재성처럼 두루뭉술하진 않았다며 은근히 자랑까지 했다.
“어디 모자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원.”
재성 역시 그게 의문이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저도 무슨 마가 끼인 것 같다고요.’
속으로 투덜대고 있자니 어느새 박경수 회장의 일장 연설이 끝나갔다.
“다 큰 성인이니 이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하거라. 대신 결혼할 여자를 신문 기사로 먼저 알게 되는 일은 없도록 해. 어설프게 처신해서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온 집안이 뒤집어질 게다. 특히 네 엄마 성질은 나도 감당 못 해.”
단소연은 어느 모로 보나 얌전한 귀부인이었지만 한번 화가 나면 박경수 회장도 말리질 못했다.
안 그래도 애지중지 아끼면서 감싸고도는 막내아들인데 여자가 생겼다고 하면 당장 얼굴을 봐야겠다면서 호들갑을 떨지도 몰랐다.
“예.”
재성의 대답을 들은 박경수 회장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캔들 이야기는 대충 들었으니 이제 다른 주제로 화제가 돌아갔다.
“그건 그렇고 이야기를 들으니 네 형한테 자동차 전장 사업에 집중하라는 조언을 했다면서?”
“네.”
전장(電裝)은 자동차에 들어가는 모든 전기‧전자 장비를 뜻하는 말이었다.
재성이 마진을 거의 남기지 않고 2차 하청을 주는 애플 생산 물량 덕분에 한숨을 돌렸지만, 여전히 제일 전자 스마트폰 사업부는 부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영업이익을 계속 깎아먹고 있는 제일 전자를 어떻게 하면 되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큰형 박재현한테 재성이 제안한 것이 바로 전장 사업이었다.
“말이 좋아 전장 사업이지. 사실상 자동차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일인데 그걸로 돈이 되겠냐? 솔직히 제일 전자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일 같구나.”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박경수 회장의 모습에 재성이 몸을 당겨 앉으며 전장 사업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큰형이 애를 쓰곤 있지만 이미 스마트폰 진출이 너무 늦었어요. 애플과 사성 전자에 비해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이라 좀처럼 활로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뼈아픈 지적이라 듣기 불편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앞으로 두 회사의 시장 점유율은 더욱 커지고 양강 체제가 고착화될 가능성이 커요. 거기다 중국의 후발 업체들이 탄탄한 내수 시장과 저렴한 가격을 발판 삼아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있으니 제일 전자는 중간에 끼여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겠죠.”
실제로 그동안 만만하게 보던 중국 업체들의 추격이 두려울 정도였다.
정부의 비호 아래 중국 국내 시장을 휩쓴 중국 업체들은 이제 동남아시아를 시작으로 해외 시장까지 빠르게 점유율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고가폰은 사성과 애플이, 그리고 저가폰은 중국 업체들로 양분되는 분위기였다.
‘이런 가운데 제일 전자는 중국 업체들의 성장에 가장 큰 타격을 입고 점유율을 급격하게 잃어가고 있는 처지지.’
다시 돌이켜 봐도 스마트폰 시대가 이렇게 빨리 올 거라 생각하지 못하고 한 발짝 늦어진 것이 너무나도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굳은 표정을 한 박경수 회장에게 재성이 말했다.
“그러니 이미 레드오션으로 변해 버린 스마트폰보다는 다른 사업으로 눈을 돌리는 게 좋겠죠. 앞으로 시장이 급격하게 커질 전장 사업에 미리 뛰어들어 선점한다면 제일 전자의 미래를 책임질 활로가 될 거예요.”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건 박경수 회장도 깊이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스마트폰 시장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쏟아붓고 달려들기엔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꽉 막힌 도로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인데, 여기서 재성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고 온 것이다.
“전장 사업이 그렇게 유망하단 말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IT 기술이 발전할수록 자동차 안에 들어가는 전자 부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예전엔 종이로 된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에 의존하잖아요. 오디오 기능도 완벽하게 디지털로 바뀌었고. 사람들이 전자기기에 익숙해질수록 이런 흐름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어요.”
재성은 자신만만한 말투로 장담했다.
“특히나 미래에 전기차 보급과 자율주행 기술이 적용되면 그야말로 수요가 폭발할 거예요. 스마트폰으로 애플이 세계 시장을 점령했듯이 이번엔 제일 전자가 자동차 전장 사업에서 그걸 재현하는 좋겠죠.”
실제로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 데 작게는 몇백 개에서 천 개에 이르는 반도체가 들어갈 정도로 전장 부품 사용량이 커졌다.
‘그 때문에 몇 년 뒤 반도체 쇼티지가 발생하자 엉뚱하게도 부품이 없어 자동차 공장이 멈춰 버렸지.’
“올해 세계 자동차 전장 부품 시장 규모는 2,390억 달러인데 5년 뒤인 2020년에는 3,033억 달러로 급성장할 걸로 예상하고 있어요.”
“3천억 달러라고?”
“네, 맞아요.”
한화로 360조가 넘는 어마어마한 시장 규모 예상치에 박경수 회장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더욱 고무적인 건 자동차 한 대당 전장부품이 차지하는 원가 비율이 2002년까지만 해도 12%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40%까지 늘어났고 2030년에는 50%를 넘어설 거라고 전문가들 대다수가 예상한다는 거죠.”
박경수 회장은 기대고 있던 등을 바로 세우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갈수록 전장 부품의 중요성이 커지는 만큼 시장을 선점할 수만 있다면 자동차 메이커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굳건히 혼자 설 수 있어요. 오히려 거래를 주도하는 슈퍼 을이 되는 거죠.”
재성은 잠깐 말을 멈춘 뒤 물로 목을 축였다.
“2020년까지 전장 부품 시장의 10%만 점유율을 가져온다고 해도 매출이 얼마 정도일지 상상이 되세요?”
“글쎄다.”
“무려 303억 달러예요. 절반도 안 되는 고작 10%일 뿐인데 그런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요.”
생각한 것보다 더 엄청난 거액에 박경수 회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만큼 대단한 액수였다.
무엇보다 박경수 회장이 솔깃한 건 이런 큰 잠재력을 가진 시장에 애플이나 사성처럼 업계를 장악한 회사가 아직 없다는 점이었다.
비록 스마트폰에서는 한발 늦었지만 정말로 재성의 예상대로 전장 부품 시장이 커진다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그룹 내에는 디스플레이와 모터, 차량용 내외장재를 만드는 계열사들이 이미 존재하죠. 전장 사업에 대한 기반이 갖춰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누구보다 좋은 조건을 가졌는데 왜 망설이냐며 재성이 말했다.
“이걸 한곳에 모으고 적극적 M&A를 통해 경쟁력을 갖춘 회사를 인수한다면 빠르게 점유율을 확대시켜서 지배적 사업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재성의 주장은 논리적이었으며 충분히 현실성이 있었다.
팔짱을 낀 자세로 한참 동안 진지하게 고민을 거듭한 박경수 회장은 마지막으로 다시 물었다.
“정말 네 눈엔 전장 사업이 확실한 사업 분야로 보이느냐. 제일 전자의 미래를 걸 수 있을 정도로?”
재성은 한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하실걸요.”
다른 사람도 아닌 막내아들의 말이었기에 박경수 회장은 왠지 모르게 신뢰감이 들었다.
그래도 제일 전자, 아니, 그룹의 미래를 좌우할 일이었기에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도록 하마.”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든 이미 때를 놓친 스마트폰을 버리고 전장 사업으로 옮겨가도록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 이상 내가 개입하는 건 선을 넘는 거겠지.’
자칫 제일 그룹 경영에 재성이 관여하려는 것처럼 보여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억지로 떠먹여 줄 수는 없으니 선택은 아버지와 큰형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