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92
833화 달빛 아래
누이 뒤에 선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병이 있다고 해도 내가 네가 돌아와 치료해 줄 때까지 기다렸겠니? 내 의술 실력이 과연 너보다 못할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에 범약약이 살짝 몸을 떨었다. 재빨리 마음을 추스른 그녀가 천천히 일어나 옷을 정리한 뒤 돌아서서 말했다.
“오라버니 왔구나.”
최대한 감정을 억제했지만, 그녀의 눈매와 눈동자, 입가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범약약이 기뻐하는 표정을 보자 범한은 순간 영문도 없이 마음이 슬퍼졌다.
범한이 멍하니 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년 동안 보고 싶어도 보지 못했던 익숙한 얼굴을 보던 그는 누이의 차가운 눈빛이 자신 앞에서 3월 봄 날씨처럼 따스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범한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 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범약약이 습관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경력 4년 봄, 경도에 처음 온 범한이 사남백작 저택에 들어섰을 때처럼 두 사람은 오래도록 떨어져 있었음에도 몇 마디 말과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낯선 감정이 사라졌다.
다시 아주 오래전에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던 원숭이와 병약한 새끼 원숭이처럼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시시덕대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범한이 바닥에 놓인 상자 위에 앉고는 바삐 움직이는 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오라버니는 내가 일찍 온 게 싫어?”
범약약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땀으로 산발이 된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길이 순탄해서 며칠 빨리 도착했어.”
“천 리 길을 달려 남쪽으로 내려왔으니까, 집안에서 이틀은 가만히 쉬는 게 좋아. 여기 의관의 일은 네 형수가 알아서 처리할 거니까 너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진료만 하면 돼.”
범한이 탐탁지 않다는 눈빛으로 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이는 비록 여전히 체격이 왜소하고 말라 있었지만, 눈빛은 훨씬 생기 있고 좋아 보였다.
게다가 지난 2년 동안 외진 산간벽지에서 의술 활동을 해서 그런지 피부도 검게 탔고, 심지어 눈가 언저리에 항상 보였던 차갑고 냉담하던 모습도 많이 사라져서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비록 항상 서신을 주고받았지만, 옆에서 세심하게 보살펴 주지 못한 것에 범한은 약간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애당초 혼인을 피하기 위해 경국을 떠나는 계획을 세운 건 그였지만, 누이의 모습을 보니 2년 동안 잘 지냈는지 걱정이 되었다.
“집안에 여종들이 바뀌어서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이 응접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서점을 보러 가고 싶어서 나온 거야. 그런데 형수가 고른 의관 자리가 서점 맞은편에 있더라고.”
범약약이 자신이 놓아둔 약상자에 앉아 있는 범한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약을 궁둥이로 깔고 앉아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 약을 쓰고 싶어 하겠어?”
“내가 누구니? 시선인 내가 깔고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소문나면 사람들이 앞다퉈서 이 약을 사려고 할걸.”
범한이 웃으며 농담을 하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저택에 아무도 없었다고? 형수 못 봤어? 사사는?”
범 상서가 유씨를 데리고 담주로 내려가서 그곳에 있던 종과 여종 중에서 몇 명은 장원으로 보냈고, 나이가 찬 여종들은 시집을 보냈다. 그래서 몇 년 만에 범씨 집안은 범약약이 말한 대로 낯설게 변해 있었다.
범한은 아주 민감하게 이 점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늦잠 자는 걸 좋아하던 사기도 올해 혼인을 해서 현령 부인이 되어 있었다. 수년 동안 경도에서 상당히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니 범약약이 낯설게 느끼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형수와 사사는 등 대가가 장원으로 모시고 갔어.”
범약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마치 오라버니가 왜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오늘에야 등자경과 함께 성으로 돌아와서 두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어.”
대호족 가문들은 대부분 경도 밖에 자신들의 장원과 산림을 가지고 있었다. 하물며 범씨 집안은 대가문이었다.
범한 자신도 이전에 장원에 가서 자주 놀았음에도 겨울 연말에 있을 명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게다가 범씨 집안의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는 임완아가 자신을 도와줄 사사를 데리고 집안일을 처리하러 장원에 갔다는 사실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범한이 약간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돌아왔으니까 아무리 바빠도 집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야지.”
범약약이 그를 힐끗 보고는 언짢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도 내가 3일 일찍 돌아온다는 걸 몰랐잖아. 그런데 누가 그걸 예상해서 미리 준비할 수 있었겠어.”
범한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최소한 네가 지금 배고플 거라는 건 예상할 수 있지.”
* * *
지금 범씨 집안 앞채와 뒤채는 일찌감치 통하게 되어 있었고, 정원도 모양이 바뀌어 있었으며 심지어 안에 거주하는 사람도 같지 않았다.
범한은 여전히 임완아, 사사와 함께 새로 지은 저택에서 살고 있어서 아버지가 거주했던 옛 저택은 비어 있었지만, 나이 많은 종이 범약약이 이전에 지냈던 방을 깔끔하게 정리해 이전과 같이해놓았다. 범한을 따라 저택 대문 안으로 들어온 범약약은 순간 경도에서 보냈던 십여 년의 세월이 떠올라 눈가가 붉어졌다.
범한은 여자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가장 보기 힘들어했다. 물론, 이미 고인이 된 장모를 빼면 말이다. 이에 그가 재빨리 누이를 응접실로 데라고 갔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술을 마시고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으며 각자 떨어져 있는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마음껏 즐겼다.
다만 경도 반란에 대해 언급되자 범약약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푸른 산에서 북제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힘들어했던 시절을 털어놨고, 범한이 눈에서 순간 분노가 일렁였다.
“아우 사철이는 지금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어?”
범한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범사철은 여전히 북쪽 사업을 처리하고 있었다. 범한은 범사철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고 보고를 받아서 그곳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습관적으로 누이에게 물어보았다.
누이의 설명을 듣던 범한은 그제야 범사철이 북쪽에서 상당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비록 북제 황실이 대놓고 그를 건들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방해하며 괴롭히고 있었다.
범한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옥도 다듬지 않으면 보석이 되지 못하는 법이야. 북제 젊은 황제가 정말 태도를 바꿨다면 사철이가 계속 그곳에 머물 수도 없어.”
2년 동안 범사철은 두 차례 경도로 돌아왔다 갔고, 경력 9년 봄에는 담주에도 왔다 갔다. 순간 장자인 범한은 범씨 집안사람들이 서로 각지에 흩어져 있어 한 곳에 모두 모이기가 힘든 상황을 떠올릴 때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황제 폐하는 지금처럼 긴장된 상황에서 범한이 관직에서 물러나는 걸 허락해 주지 않으려 했고, 아버지 범건은 경도에 머무를 수가 없는 처지였다.
물론 아버지로서는 담주에서 할머니를 모시며 지내는 게 마음을 졸이며 경도에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지만 말이다.
범약약이 고개를 끄덕일 뿐 오라버니인 범한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이나 범사철이나 모두 오라버니인 범한의 계획에 따라 일반 귀족 집 자제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 삶에 만족했다.
“일단은 쉬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왕계년이 없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들어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거든.”
범한이 혀 짧은 소리로 그동안 참고 있던 우울함을 털어놓았다. 이 세상에서 그가 마음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임대보와 왕계년 뿐이었다.
물론 오죽 아저씨와 자신의 영향을 많이 받은 누이가 대화상대로는 가장 적합했지만 말이다.
범한은 이 네 사람과는 대역무도한 말까지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임대보는 너무 멍청해서 대화를 제대로 나눌 수 없었고 왕계년은 어디론가 도망간 상태였다.
게다가 오죽 아저씨도 자취를 감춰버리고, 누이는 다른 나라에 가 있어서······ 말동무를 할 상대가 없었다. 그렇게 말동무 없이 우울하게 지내던 범한의 앞에 누이가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범한은 누이가 돌아와 즐거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달아 술을 들이켰고, 술기운을 해독시켜주는 환약도 먹지 않았다. 술에 취해 중얼거리던 범한이 식탁에 엎어지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범약약이 술에 취한 오라버니를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종에게 지시해 오라버니를 부축해 방으로 옮기게 한 뒤 자신이 직접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가 오라버니의 머리카락을 빗어 머리에 꽂혀 있는 바늘을 조심히 꺼냈다. 몇 년 전 범한이 혼인 전 상처를 입었을 때처럼 말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범약약이 손에 들고 있는 각양각색의 빛을 내뿜는 가느다란 바늘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형수라면 이게 독침이라는 걸 알 텐데, 두 사람이 끌어안다가 찔릴 걱정은 하지 않는 건가? 매일 밤 자기 전에 제거하고 잘까?’
그녀는 곧 자신이 궁금해해서는 안 될 걸 궁금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히면서 재빨리 바늘을 작은 상자에 넣었다. 범한의 가장 마지막에 사용하는 비장의 무기인 바늘을 두 사람이 뒤채에서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방은 이전에 지냈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깔린 이불은 새것이었다. 이 방 안에 있는 사람도 이전 그대로였고, 마음도 이전 그대로였다. 범약약이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다가 창문으로밖에 정원을 바라보며 오라버니가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곰곰이 대화를 떠올려보던 범약약은 지난 몇 년 동안 겉으로는 경도에서 순탄하게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내색할 수 없는 압박감을 받던 오라버니가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어 상당히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겉옷을 걸치고 방문을 열고 나가 달빛을 받으며 정원 안을 산책했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방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촛불이 마음속에 있는 헛된 생각을 서서히 밝혀주자 이전과 같은 달빛 아래 서 있는 그녀의 마음이 갈수록 어지러워졌다.
범약약은 이 모든 게 헛된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상관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오라버니가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돌보려고만 할 뿐 다른 생각은 전혀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떪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의관을 하루빨리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초겨울 경치를 바라보며 드러낼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자 달빛에 비친 그녀의 청순한 얼굴도 점차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북쪽에서 생활하면서 범약약의 성격도 많이 변하게 되었다. 그녀의 침착한 얼굴은 이전처럼 냉담하고 차갑다기보다는 오히려 평온하고 태연자약해 보였다.
* * *
경도로 돌아온 범씨 집안 아가씨로 인해 앞으로 어떠한 파문이 일어날지 모른 채 범씨 집안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소식을 듣고 급히 장원에서 돌아온 임완아와 만난 범약약은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범약약은 그동안 태어난 조카들을 보고는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온 집안이 화기애애하고 시끌벅적했지만 이런 즐거운 분위기는 오래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범약약을 하루라도 빨리 의관을 열고 싶어 했고, 황궁에서는 범한에게 범약약을 데리고 입궁해 황제 폐하를 뵈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의관 일은 누군가가 가서 직접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고, 입궁해 황제 폐하를 보는 데도 하루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범씨 집안을 책임지는 차세대 젊은이들은 여유롭게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범약약은 푸른 산에서 수년간 수련을 한 뒤 처음 경도로 돌아왔기에 자연스럽게 친척 어른들과 지인들을 찾아가 인사를 해야 했다.
물어볼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찾아가 인사한 사람은 범씨 집안과 돈독한 사이인 정왕부였다.
이전이라면 편안하게 찾아가서 인사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서로 사이를 껄끄럽게 만든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정왕의 며느리가 될 예정이었던 범약약을 범한이 북제 고하 제자로 보내버린 일이었다.
정왕은 2년 동안 줄곧 이 일을 잊지 않았고, 매번 범한을 볼 때마다 길게 탄식하며 언짢은 태도를 보였다. 두 집안의 돈독하던 사이도 약간은 어색해져 있었다. 그러니 정왕부를 향하는 범약약의 마음도 편할 수 없었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
범한이 누이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범한도 이홍성이 정주에서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섬뜩해지면서 자신이 그때 한 결정이 옳았던 건지 틀렸던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머릿속 생각을 털어낸 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 명절이 홍성도 경도로 돌아올 건데, 그때도 숨어 있을 수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