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37
237.
혈교에 이를 갈고 있던 남궁세가는 생각보다 더 협조적이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선별한 세가의 고수들부터 이끌고 달려왔으니까. 근래에 혈교가 관을 껄끄러워하는 덕분에 현청 근처에 자리를 잡고 조력자를 부를 시간을 번 연적훈은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이번에 그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가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장남과 차남이 반기를 들었던 그 사건 이후 남궁익은 세가를 비워 두지 않았기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이끌고 온 것은 남궁수연이었다. 일부러 연가장과 인연이 있는 이로 보낸 듯했다.
대조적으로 제갈세가의 반응은 일견 미온적으로 보였다. 그나마 남궁청휘가 직접 찾아왔기에 체면치레로 안면이 있는 고수 몇을 붙여 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실 제갈세가는 남궁세가에 비하면 실질적 피해를 본 것이 별로 없긴 하지.’
이전 용봉지회 때 직계 여식인 제갈세원이 납치당할 뻔했지만 그 일은 비밀에 부쳐졌기에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가문의 비고가 털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체면을 구겨 혈교에 원한을 품을 일이었다.
그 때문에 혈교를 놀리듯 비고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퍼트려 결과적으로 혈교와 강호에 피바람을 불게 한 장본인들이기에 몸을 사리는 듯도 했다. 그동안 몇 개의 비고와 비동(秘洞)이 세상에 나타났고 많은 이가 죽곤 했다. 개중에는 제갈세가가 일부러 폭탄을 설치해 사람을 죽였다는 풍문도 있으나 감히 그것이 제갈세가의 짓이라 면전에 대고 입을 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간 여기저기서 피바람이 불 때 가장 조용히 있던 것이 제갈세가였으니 피해를 본 것은 없을 터라 두 집안 무인들의 기세 차이가 극렬했다.
다만 제갈세가에서는 무인들 대신 혈교인들을 함정에 빠트릴 계책을 들고 왔을 뿐이었다.
우선은 연가상단으로 향할 거라 생각할 것이 뻔하니 차라리 전혀 예상 못 하고 있을 무당을 끌어들이는 척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지금 일행이 호북에 있으니 거리상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파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 책은 진본이 맞습니까?”
“그걸 우리가 본다고 알겠소?”
제갈수원이 이끌고 온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물었지만 연적훈은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연적훈이 꾸민 계획이 아니고 그 서책에 가치를 두지 않으니 살펴보지도 않았다. 제갈세가 사람들은 한번 그 서책을 내용을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연적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아 어찌할 생각이오? 혈교를 끌어내는 역할을 다하면 마땅히 태워 버려야 할 물건이오. 진품인지 아닌지도 상관없지 않소?”
“그들이 만약 강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그들을 제압하는 데 그 비법서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이미 만들었다면, 이렇게 다급하고 필사적으로 우릴 추격해 오진 않았을 테니 그리 걱정할 거 없소.”
그동안 무림맹은 혈겁의 장소에서 혈교가 만든 강시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물론 그 비법에 관한 것은 설령 찾았다 한들 정보를 공유할 리가 없으니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는 없었다.
워낙에 지식욕이 왕성한 제갈세가 사람들이니 그들 중에는 순수한 마음에서 궁금해하는 이도 있을 법했지만 연적훈은 단호했다.
“진품이든 아니든 혈교가 노린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오.”
“연장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뒤에서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이를 저지하며 제갈수원이 싱긋 웃었다.
“그럼 우선 저희가 가져온 계책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갈수원의 말에 따라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그리고 연가장의 무인들은 세 무리로 나뉘었다.
각각 이린인 척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을 하나씩 데리고.
연화문은 자신이 데려온 젊은 여협에게 한숨과 함께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 역시도 이런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위험한 일을 맡겨서 미안하군.”
“괜찮아요.”
남궁수연과 당자혜가 맡을 수도 있었겠지만 워낙에 유명한 이들이다 보니 그 두 사람이 없다면 혈교에서도 자연히 의심할 터. 이름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가 이린인 척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덕분에 또다시 서문민영이 면사를 썼고, 연화문과 신수린이 면사를 썼다.
자연히 가짜 제작서는 연화문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십니까. 설마…?”
“우연히 도움을 받게 된 여협들입니다.”
검성이 연가장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남궁수연의 은근한 질문에 연적훈은 고개를 저었다. 한 명이었으면 더 의아해했을 텐데 두 명이라 그런지 오히려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런 위험한 일에 나서 주시다니 역시 연장주님의 인품 덕분인 듯합니다.”
“남궁 소저 역시 이리 도우러 와 주셨지 않습니까.”
“말씀 편히 하세요. 제가 연가장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남궁수연의 말에 연적훈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남궁청휘와 연적훈이 함께 붙어 있으면 자연히 그쪽을 이린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두 사람 역시 다른 무리로 떨어지게 되었다. 청운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저는 남궁세가로 가는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신 소저.”
“이제 연 소저라고 부르셔야죠.”
서문민영에게는 연적훈이 동행해 무당파로 향하고, 연화문에게는 청운진인이 동행해 연가상단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신 소저는 남궁세가로 가시면 될 겁니다. 청휘 형님과 수연 누님이 지켜 주실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어딘지 익숙한 느낌인 제갈수원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린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연 소저가 남궁세가로 간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남궁수연은 면사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데도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 보이는 듯해 웃으며 답했다.
“청휘가 연 소저를 오매불망 찾아 헤매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어머, 남궁 대협은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한 분이셨군요.”
“…….”
어쩐지 따가운 시선에 남궁청휘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심란한지 모를 일이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드니 연적훈이 연가상단으로 향하는 면사의 여인에게 무언가 당부의 말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혈연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분명 저분이 검성 연화문일 터. 자주 보지 못한다는 누이와 나누는 대화는 조금 애틋해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인사를 마친 연적훈은 남궁청휘가 있는 쪽을 향했다. 정확히는 남궁청휘의 뒤쪽에서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수연과 속닥거리는 신수린에게로.
“신 소저.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연 장주님.”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을 보는 연적훈의 눈에는 심려와 그리움이 섞였다.
연적훈이 누굴 떠올리고 있을지 짐작하지 못할 이는 없었으므로 주위가 조용해지며 그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일이 끝나면 꼭 연가상단으로 와 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요.”
“…부디 보중하십시오.”
“장주께서도 보중하십시오.”
마지막까지 조심하라 당부하고 또 당부하던 연적훈은 남궁청휘에게도 여러 차례 조심하라 이르고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서문민영에게로 돌아갔다.
“참… 좋은 분이시네요.”
“좋은 분이시죠. 이린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남궁수연이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이린…이요?”
“네. 연장주님의 따님 이름이에요. 5년 전부터 행적이 묘연하거든요.”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연장주나 남궁청휘에게는 어쩐지 묻기가 어려웠지만 남궁수연은 대답해 줄 것 같아 이린은 슬쩍 질문을 던졌다.
“음. 금발 벽안에 저보다 약간 어렸어요.”
“금발에, 벽안이요?”
이린은 저도 모르게 지금은 평범한 흑발인 자신의 머리카락을 초조하게 쓰다듬었다.
중원에서는 드물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용모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이린은 자신을 진정시켰다.
“네, 무공도 뛰어나고 경공이 특기였죠. 그리고….”
“그리고요?”
여기까지는, 우연히 겹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얼마 전부터 떠오른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남궁수연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 듯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특이한 뱀을 두 마리 데리고 다녔죠. 청아, 홍아라고. 한 마리는 지금 청휘가 데리고 있을걸요?”
“!!”
낯선 자들에게 쫓길 때에도 긴장하지 않던 몸이 뜻밖의 사실에 경직되었다.
* * *
뜻밖에 세 방향으로 일행이 갈라지자 혈교의 추격자들 역시 셋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셋으로 갈라진 것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일행을 세 무리로 나눠 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한 것은 추격해 오는 적의 수를 줄이려는 이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으니까.
“크아악!!”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혈교 고수를 둘러싼 남궁세가의 고수들은 무자비한 손길로 그를 제압했다.
“과거 마교 장로였던 심혈마괴로군요. 혈교로 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아직 살아 있었을 줄이야.”
“그런 걸 다 기억하세요?”
“기본 소양이지요.”
남궁세가에서 온 지원군들을 이끌고 온 이 장로가 젊은 소저의 감탄에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남궁청휘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자신의 검을 갈무리했다.
처음부터 지원 요청과 동시에 나뉘어 온 길이었다.
남궁청휘가 제갈세가에 들어서 연장주의 서신을 전하자 제갈세가는 그 도움 요청에 응하며 곧바로 전서구를 보냈다. 호북에 있는 무당파, 호남에 있는 남궁세가와 연가상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휘에 있는 무림맹에도 일의 전말에 대해 간단히 추린 서한을 적어 보냈다.
제갈세가에서 보낸 갑작스러운 전서구를 받은 이들은 우선 경공이 빠른 고수들부터 추려 연장주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고수들을 선별해 일행이 오는 길목에 미리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다 일행을 습격하는 혈교의 뒤를 쳤다.
‘덕분에 일이 빨리 끝났군.’
짧은 시간 동안 혈교에서도 나름 고수들을 모아 온 모양이었지만 이렇게 각개격파를 당해서야 보람이 없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어찌할까요?”
“혈교의 종자들은 붙잡혔다 해도 쉬이 중요한 사실을 실토하지는 않는다 하니 일단 자진하지 않도록 조치한 후 구금해 둬라.”
남궁세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사이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무당파 쪽에서 전서구가 도착했답니다!”
이쪽 역시 전서구를 보냈건만 역시 그쪽이 더 빨랐던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무당파에서도 무사히 혈교를 제압했다는 소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는지 전보다 조금 초조해 보이던 여인이 무당파에서 온 서신을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곧 면사를 걷으며 남궁청휘를 재촉했다.
“무당파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저희는 장사로 가 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수연, 뒤를 부탁할게.”
“…집에는 안 들르게?”
“나중에.”
옅게 웃으며 서둘러 떠날 채비부터 하는 남궁청휘를 보며 수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아들자식 키워 봤자 소용없다니까.”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남궁수연의 중얼거림에 함께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소가주 자리를 거부하는 검황의 막내아들 때문에 다들 내색은 안 해도 내심 불안한 심사를 감추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