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39
◈ 패도 (4)
입황성 승단식은 성주의 주관하에 이루어진다.
황제가 친히 바라보는 과거시험의 전시(殿試)와 같다. 청색 장포부터 모두 그러하니, 입황성주가 없는 자리에서 자색 승단을 논할 수는 없다.
패협의 이름이 지엄하다 해도 율법을 어지럽히지는 못한다.
당대 마광익주가 전대 신검단주의 장포를 거절할 수 있는 이유였다. 빛깔도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지금의 민무늬 흑포가 나았다.
본래 입던 장포가 제갈가주에게 찢긴 이후 공야세가의 대공녀에게 받은 것이었다.
마연적의 입매가 올라갔다.
젊은 노인의 손에 들린 분홍빛 장포는 오늘따라 더욱 휘황찬란해 보였다.
그가 시전한 기예가 밤하늘의 별빛들을 실뭉치처럼 끌어모은 까닭이었다.
“오기조원, 공월무. 그간 네가 만든 무공들을 스스로 관통하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게다. 그러기 전에 자색의 옷을 입을 듯싶다만…… 우선은 다음으로 미루자꾸나.”
그가 다시금 장포를 걸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연신이 입을 열었다.
“언제 또 뵐 수 있습니까?”
조부가 떠날 채비를 하는 듯해서 물었다.
앞서 정연신에게 대강이나마 자색의 강호를 설명해 준 뒤다.
복마전이라 했다. 건국기에 명족과 함께 나타난 괴력난신들을 대적하고 다닌다는 얘기로 들렸다.
여유가 부족한 참에 손자의 위기를 듣고 먼 길을 왔으니,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돌아가는 게 옳은 것이다.
마연적이 손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툭툭, 커다란 손에서 온화한 기운이 전해졌다.
“노부가 네 강호행에 또 끼어들 수는 없을 게다. 네 승단과 명줄을 위해 멀리서나마 힘을 쓰는 한편으로, 천하의 안위를 외면하고 몸을 빼지는 못할 듯싶구나. 이 할애비는 늘 신검단주였단다. 용가 놈에게 입신검(入神劍)을 넘겨준 이후에도, 딸아이를 떠나보낼 때도…….”
밀린 일이 많다는 의미였다.
잠시 말끝을 흐린 그가 정연신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연신이 네가 자색에 올라, 노부와 같은 소임을 맡을 때쯤에 재회하겠지. 절세고수가 둘씩이나 필요한 일은 극히 드물지만… 근래와 같은 난세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니.”
“근시일 내에 뵙겠군요.”
콧대 높은 조손이 웃음을 나눌 때였다.
우웅―
일그러져 있던 허공이 불현듯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만다라 같은 무늬를 띤 빛줄기들이 제각각 곧게 펴지며 사그라들었고, 막힌 쇠창살처럼 느껴지던 밤하늘 위로는 다시금 투명한 바람이 오갔다.
정연신은 그 광경을 유심히 올려다봤다. 절세고수들을 더 겪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월무.’
지닌 바 모든 초식을 아우르는 의념.
웬만큼 깊은 경지가 아니면, 생사결에서는 한 번 쓰기도 어려울 결전의 절초.
모용가주의 검권은 칼의 속도를 북돋아 주는 기예였다.
정연신과 초식을 길게 나눈 뒤에야 그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헤아리기로는 삼백이십오 초째에.
“네 삼화취정은 정말로 오래 걸리지 않을 게다. 지금도 합일과 해제의 반복이 여실히 느껴지는구나.”
스윽.
분홍빛 옷자락이 흙바닥에 스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마연적이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거라. 환골탈태란 것은 참으로 묘한 변화지. 육신의 원기를 북돋으면서도 기력을 소모시키니, 살을 조금 찌우면 자연스레 정기신이 일치될 게다. 연신이 네 홀쭉해진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더구나. 근육 뭉치가 굵어졌길 망정이지… 되새길수록 새삼 놀랍다만.”
함께 일어선 정연신은 겸연쩍음에 말을 돌렸다.
“잡아 오신 멧돼지들은, 전부 제게……?”
마연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승단하는 모습을 봤으면 했다. 허나 시운이 좋지 않아 그러지 못할 듯싶구나. 살이라도 찌워 할애비의 마음을 편케 해 다오. 숙부에게 고기를 훈연하는 법은 배웠겠지?”
“…예.”
“볼살을 더 채우면 절세미남이 될 게다. 네 어미를 닮아 송옥과 반… 못지않은.”
차마 반악이란 말을 내뱉지 못한 마연적이 몸을 돌렸다. 송옥과 반악은 고사로 인용되는 옛적의 미남자였다.
“다시 볼 때까지 건승하길 바라마. 팔가주의 목을 둘이나 베었으니, 본성 무인들이 네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지. 그들은 너로 인해 강호가 얼마나 흔들리든 개의치 않으니까.”
정연신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늦겨울 바람이 따스했다. 조부님도 무탈하셨으면 한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굵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마연적의 기척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삽시간에 불어온 강풍이 정연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마을로 내려온 정연신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들이 들어왔다.
영웅건의 검객과 양귀비를 질겅이는 놈팽이였다.
어느새 일어선 흑발 적안의 여인을 앞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데, 편안한 기색을 띤 사람은 칠사도뿐이었다.
새빨간 순혈포에 둘둘 감겨 유려하게 내려오는 어깨선.
어떤 경파의 흐름도 보이지 않았다. 이부자리를 몸에 두른 듯한 모습이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홍색 눈동자로 헌원창과 태염룡의 기파를 유심히 살피기만 했다. 가느다랗고 붉은 미소를 띤 채.
순간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내가 더 깊어.
누구라도 저의를 눈치챌 법한 말이었다. 잠시 훑어보는 것으로 무공의 성취를 견준 것이다.
광예결과 마라진혈공. 둘 모두 한 사람에게서 나온 무공이었다.
발을 디디던 정연신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왜 예쁘지?
“대주님!”
한쪽에 물러서서 안절부절못하던 신소빈의 외침이었다. 정연신과 눈을 마주한 소녀가 반색한 얼굴로 크게 손을 흔든다.
아직 백색무사인 그녀가 어찌해볼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 좀 어떻게 해야겠어요!”
동시에 정연신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저벅.
소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양측의 중간에 자리했다. 헌원창과 태염룡으로 인해 뜨거워진 바람을 몸으로 풀어 헤치면서였다.
반투명한 기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찢겨 올라갔다.
‘무거워졌어.’
정연신은 작은 감탄을 삼켰다. 종아리까지 짧아진 바짓단이 다소 거슬렸지만, 동료 두 사람이 자아내고 있던 기파의 바람은 그 이상으로 묵직했다.
여러 일을 겪었다. 마광익 고수들은 끊임없이 대주의 성취를 따라왔다.
“며칠 만에 봐서 적응이 안 되는군. 몰라볼 뻔했소.”
정연신의 멀쩡한 행색을 본 헌원창은 안도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공간에서 대주의 모습을 살피기 힘들었던 데다, 한때 정연신을 납치한 장본인이 그들을 태연히 맞이했다.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왔거든. 백묘가 뭔가 말해 주려고 하던데, 들을 짬이 있어야 말이지. 저만한 요마(妖魔)를 앞에 두고.”
비딱하게 선 태염룡이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대주의 안위를 확인한 직후였다. 양귀비를 씹던 턱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알다시피 혈염교의 칠사도다.”
정연신이 입을 열었다.
“명공도에서 마광익을 살렸지. 본성까지 동행할 거다.”
“지금, 뭐라고……?”
태염룡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정연신은 양귀비쟁이의 벙찐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화입마를 고쳐줘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보은에 협력해.”
그는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입황성은 군문에 가까운 방파였다.
당대 마광익주는 웬만하면 동료를 수하로 대하지 않았지만, 그가 결정한 일에 마광익 고수들이 반론을 제기하는 일은 없었다.
전투에 돌입해야만 날카로워지는 태염룡도 마찬가지였다.
“명령이면 따라야지.”
황보세가의 대공자였던 놈이 무던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팔대세가는 그 세속적인 기질과 별개로 백도 정파를 표방해 왔다.
내심 설득할 말을 고르고 있던 정연신은 의구심을 느꼈다. 그간 함께한 시간과 증진된 무위가 신뢰로 화한 걸까.
“안전하겠지?”
“칠사도는 하수다. 너에게나 고수지. 염려 마.”
“하수……?”
“식량은 수급할 필요 없어. 본성으로 돌아간다.”
주변에 널브러진 멧돼지 세 마리를 힐끗한 정연신이 말했다.
“칠사도, 눈 가려.”
“응.”
사락, 품에서 흰 천을 꺼낸 칠사도가 두 눈을 가렸다. 몹시 고분고분했다. 그간의 행적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혈염교의 귀한 법보라는 보혈단금건이 그녀의 눈을 두르자마자, 혈공 특유의 불규칙적인 기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연신은 불쑥 입술을 뗐다.
“마라진혈공의 마지막 구결은…….”
“으음? 태사야, 우리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왜 마지막이야? 기억나는 게 첫 번째 구결뿐인데?”
시작도 하지 않았다면서 첫 번째 구결을 받았다고 한다.
칠사도의 횡설수설은 매끄러웠고, 조금쯤 가벼운 광기가 섞여 있었다. 정연신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너 정신 들었지?”
“응?”
가느다란 숨결이 섞인 대꾸가 밤공기에 내려앉는 가운데.
그는 아무것도 문초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다.
* * *
입황성 본성이 자리한 호광까지 내려가는 길.
호광성 양양에 당도하자면 지나쳐야 하는 도시가 한둘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풍문이 들려왔다.
“성휘대검군이 죽었다던데?”
“팔가주 말하는 거 맞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아냐. 입황성의 귀공자 있잖아. 어린 마광익주가 유성검을 날려버렸다는 소문이 무성하다고.”
“그, 제갈가주를 참했다던……?”
“그래!”
모용세가주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 알음알음 퍼지면서 넓은 땅을 흔드는 와중에, 격화된 당문과 금시문의 갈등이 사천을 뒤흔들고 있다 했다.
소림사의 원적대사가 산서 공야세가 인근에서 요괴를 격살했다는 소문과 함께였다.
“원적대사의 손이 글쎄, 이따만하게 커져서는, 요괴의 창칼을 단번에 부숴버리더라니까! 심무련의 병졸들은 함께 봉변당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지!”
“백기린 대협은 남쪽에서 활약했다더니… 역시 백도 출신들은 달라.”
“다른 건 구파와 입황성뿐이야. 어떤 마을에서는 정파 행세를 하던 무가가 관청을 점령했다더만. 요즘은 믿을 게 없다니까. 곡물 꿍쳐둔 거 있으면 간수 잘하라고.”
“신강에서 엄청 큰 안개가 일어나서 사천까지 닿고 있대. 천하가 어찌 되려는지…….”
정연신은 많고 많은 풍문들 속에서 원적대사의 안위를 확인했다.
다행이었다. 모용가주와 대치하기 전, 자소단과 더불어 신소빈의 품에 넣은 다람쥐가 이따금 고개를 갸웃대며 올라올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는데.
‘갈혼을 돌려주려면 언젠가 소림사에 방문해야겠지.’
난세를 실감시키는 소문은 일행 다섯 명이 양양에 들어설 때까지 이어졌다.
인파로 가득한 관도.
거칠 황 자를 어깨에 새긴 무인들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정연신의 마음이 편하게 가라앉았다.
정가장이 있던 신야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안정감. 비로소 집에 돌아온 것이다.
멀리 새하얀 성채가 보였다.
입황성에 당도했다. 긴 산서행의 끝이었다.
“태사야.”
“여기선 그렇게 부르지 마라.”
“연… 신아. 연신아.”
“얘기해.”
“뭔가가 떠올라. 내가 누구 팔을 자른 것 같아. 여기서 말이야.”
“뭐?”
“네가 곤란할지도 몰라. 주씨 여자였어.”
“입황마가의 주연정?”
“응, 맞는 것 같아. 너한테 함부로 했다길래.”
눈을 가린 칠사도의 머리칼이 정연신의 어깨를 스쳤다. 그가 멈춰선 까닭이었다.
그녀의 말이 새삼스럽게 충격을 선사한 건 아니었다. 기이한 공력 파동이 본성 전역에서 느껴졌다. 환익보의 기파였다.
동시에.
눈앞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팔다리가 길고 탄탄한 여인이었다. 헌원창과 태염룡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주변을 오가던 행인들이 새된 소리와 함께 분분히 물러섰다.
“용권……?”
“여의천주시다!”
홀연히 나타났다. 입황성의 정문을 하루 종일 주시하고 있던 것처럼.
여의천주 북궁아.
굉장히 화려한 흑포를 걸쳤다. 어떤 예장마냥 밑단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새까만 불길처럼 허공에서 넘실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유난히 긴 다리를 감싼 묵빛 무복은 격전을 거쳐 왔는지 잔상처가 많았다.
디뎌 오는 발걸음이 묘했다.
저벅.
“……?”
정연신의 눈에 익으면서도 낯설었다. 묘하게 흐트러진 환익보를 보는 듯했다.
여인이 입술을 뗐다.
“몸가짐을 보아하니 너희도 환익보를 익혔군. 특히 너. 기파가 느껴지지 않는 게 놀라운데…… 명류대, 아니면 보혈대 소속인가? 박쥐들이 잠룡을 키우고 있었어.”
불문곡직하고 말을 건네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정연신 일행의 걸음이 그대로 멎었다.
“걸음걸이를 견주어 보자. 삼보까지 쫓아오면 귀한 내상단을 주마. 혹시 여정이 고돼서 휴식이 필요하다면, 그건 이해할 수…….”
여의천주가 무어라 얘기했다.
정연신은 더 듣지 않았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실의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