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249)
249화 – 상장!
순양그룹의 컨트롤타워라는 전략기획실, 거기서 대빵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저 나이만 먹은 게 아니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하는 노회함이 만렙이랄까? 역시가 역시였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레퍼토리도 생각났다. 이 바닥에서는 겸손해야 한다는 말. 겸손한 자세로 화내는 연기 하면서 이상면 실장의 말에 예의 바르게 대꾸하자고.
“대흥중공업 지분을 넘긴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말해 보시라구요. 제가 거기 사위가 된다는 것 정도는 아시죠? 그걸 알면서도 지분 얘기를 꺼냈다면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이거, 제가 또 오해하게끔 얘기를 했군요.”
“미사여구는 불필요하니까 뜸 그만 들이고 바로 말씀해 주시죠. 무슨 의도로 얘기를 꺼내셨는지 확실하게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참, 좀 전에 제가 불쾌하게 만든 건 사과드립니다. 간 볼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그렇게 느꼈다면 사과드리는 것이 맞겠지요.”
“아니, 딴소리하지 말고 대흥중공업 지분 얘기 꺼낸 걸 설명하시라구요.”
“허허. 그저 선물을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해를 하시는 것 같아서 좀 진정되고 말씀드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그게 어떻게 선물이 됩니까! 지금 대흥중공업 승계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요. 그런데 사위 될 사람이 지분을 모으고 있다? 결혼하기도 전에 원수지간 만들 셈입니까?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얘기해 보세요.”
좀 연기가 과했나 싶지만, 나쁘지 않았다.
내가 대흥중공업을 먹어버리겠다는 구상은 결코 소문이 나선 안 된다. 지분 경쟁만큼 소문난 잔치도 없을 테니까. 난 그저 대흥중공업 오너 딸을 사랑하는 선량한 사위인 것처럼 행동하자고.
이 실장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죠. 대흥중공업이 승계작업에 착수했다는 얘기를 접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대주주 지분이 애매하죠.”
“그래서요?”
“유일조선이 이제 곧 사위 기업이 될 텐데, 우호지분으로 보조를 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들고 있는 지분이라 해봐야 얼마 되지 않지만, 아쉬울 땐 괜찮은 역할을 하리라 봅니다만.”
“정말 그런 의도로 대흥중공업 지분을 넘기겠다고 하신 겁니까?”
“그럼요, 그럼요. 저도 승계작업 때문에 골치가 아픈 사람입니다. 승계작업은 주변의 도움이 꽤나 필요한 일이죠. 상무님께서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면 처가에서도 아주 좋아할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런 의도라고 말씀하시겠지만,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유일조선이 대흥중공업 지분을 2.99%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3% 넘기면 권한 자체가 달라져 버리는데요. 제 결혼 생활이 시작도 전에 오해로 불거지는 건 원치 않습니다.”
이런 연기를 펼치는 나 자신이 가증스러워졌지만, 잘 이겨냈다. 대흥중공업 지분만 은밀히 넘겨준다면 김치 싸대기도 기꺼이 맞을 수 있다.
“허허. 그럼 더 잘 됐습니다.”
“잘 됐다니요? 자꾸 말을 빙빙 돌리지 마시라구요.”
“일단 앉으시죠. 꽤 오래 서 계시는데, 제가 다 불편할 지경입니다.”
칼을 뽑아서 무 몇 개를 썰었으니, 아무렇지 않은 척 앉자고. 흥분하고 화내는 연기는 효과는 괜찮은데, 수습이 어렵단 말이지.
다시 앉아서 이 실장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말로는 사위 어쩌고 포장했지만, 눈빛으로 내가 대흥중공업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잘 판단하라는 무언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허허. 다시 대화를 나누고픈 생각이 드셨습니까?”
“속내가 궁금해졌을 뿐입니다.”
“속내랄 것이 있겠습니까? 순양중공업을 매각하고 싶은데, 워낙 덩치가 크기 때문에 선물을 좀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사실 대흥중공업 지분도 차명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대놓고 넘기기가 좀 그랬는데, 상무님께서 오해 운운하니 잘 됐다 싶군요.”
“그래서 순양중공업 인수를 확정한다면, 다른 경로를 통해 대흥중공업 지분을 넘기겠다는 겁니까?”
“우리가 남의 회사 지분 들고 있어 봐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팔아서 현금화하는 김에 이왕이면 도움이 될 곳에 넘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군요. 상무님께서는 그걸로 처가에 도움 주면서 생색을 낼 수도 있고 말이죠. 허허허.”
마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끄덕끄덕. 이걸 바라보는 저쪽도 본심이 통했다는 안도의 한숨.
서로가 서로의 의도를 알면서도 아닌 척하는 연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나저나 저 사람은 내가 대흥중공업을 탐내는 걸 어찌 알았을까? 다시 한번 아버지의 레퍼토리가 떠오른다. 이 바닥에서 겸손하라는 말. 항상 조심하자고.
겉절이 얘기는 충분히 했으니, 대화를 메인 테마로 넘길 차례다.
“실장님.”
“네, 말씀하시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순양중공업에 관심 많습니다. 빅3 중에 하나 고르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순양중공업을 고를 겁니다.”
“우리 애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무님 지적대로 순양중공업이 예전에 비해 좋지 않은 상황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알짜 중의 알짜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선물까지 있으니……. 허허.”
“1조.”
“네?”
뭘 놀래. 협상이 다 그렇고 그렇지. 당신이 6조를 지른 것처럼 나도 똑같이 나왔을 뿐이야.
아니지, 이 실장은 구라로 치는 것이고, 나는 자연빵으로 치는 것이다. 난 진짜 1조에 살 생각이거든.
왜 1조인지 설명 들어간다.
“순양그룹이 보유한 지분을 다 합쳐도 30%도 안 됩니다. 거기다 지금이야 주가가 3만 원대지만, 내년엔 2만 원대도 지키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까 1조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허허. 바로 협상 들어가시는 겁니까? 뭐가 됐건 인수 의사는 있다는 것이지요?”
“올해는 살 생각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년이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네요.”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건 대규모 M&A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게 순양중공업일 이유는 없죠. 우리가 원하는 가격대가 아니라면 협상을 할 이유도 없구요.”
“대흥중공업 지분 5%면 꽤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하아, 이 여우 같은 놈을 봤나. 5%나 들고 있어?
여기저기 분산해서 가지고 있는 대흥중공업 지분이 8% 정도다. 여기에 이유선이 대수조선을 물려받으면 8%가 추가되니까, 총 16%. 계속 사 모은다고 한들 20%를 넘기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5%가 추가된다? 대흥중공업 개미들만 잘 설득하면 주주총회에서 아침드라마 한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겠는데?
바로 당장이라도 인수협상 진행하자고 내뱉고 싶었다.
그러나 급히 먹으면 죽도 체하는 법이다. 운 좋게 다시 살게 됐고, 그 덕에 10년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는데, 이 정도로 흥분할 수 없지.
“뭐, 여러 가지로 준비를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순양중공업을 잘 키워낼 분이란 확신이 생겼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지요.”
“좋게 봐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유일조선은 아직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대흥중공업 지분? 인수할 것도 아닌데 그리 많이 가질 이유도 없죠. 인연이 있다면 나중에 또 순양중공업 건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당장 결론을 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찬찬히 시간을 두면서 소통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돈 없다니까요. 1조에 파시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제안은 고맙지만,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이게 제 결론입니다.”
삼세번. 이번엔 진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 그동안 수많은 M&A를 경험하면서 확실하게 배웠다. 아쉬운 놈이 결국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올해는 조용히 보내고, 내년에 제대로 얘기합시다.
내년? 2014년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내년에 터질 그 일은 막아내야지. 그러고 보니까 내년엔 국제해운도 휘청할 텐데……. 이것 참, 내년에도 아주 바쁘겠구만.
아무리 바빠도 해 넘기기 전에 행사 하나 성대하게 치러내야 한다. 무슨 행사? 떼돈이 들어오는 빅이벤트 말이다.
***
둥. 둥. 둥.
“유일조선 유홍철 회장님께서 유일조선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타북행사로 상장기념식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연말 빅이벤트로 우리 회사의 상장기념식이 열렸다.
빅이벤트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상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에 매년 큰 폭의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고, 영업이익률도 조선사 중의 최고인 조선사가 상장을 하겠다고 하니, 돈이 안 몰리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거기다 플러스! 야말프로젝트 수주라는 호재까지 터졌다.
공모가까지 섹시하니, 다들 빨리 장만 열리길 고대하는 눈치이다.
“자, 오늘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유일조선의 매매개시를 확인하겠습니다. 유일조선의 공모가격은 10만5,000원이었습니다. 최저 9만4,500원에서 최대 21만 원 사이에서 최초 가격이 결정되겠습니다. 그럼 매매개시를 확인하겠습니다. 십, 구, 팔, 칠…….”
좋아! 따상 가자!
“삼, 이, 일. 확인!”
펑펑.
“축하드립니다! 유일조선 시초가가 21만 원으로 결정됐습니다. 여러분, 축하 박수 부탁드립니다.”
상장과 동시에 ‘따블’을 찍었다.
매매개시와 함께 터진 꽃가루가 입에 잔뜩 들어가는 바람에 볼썽사나운 꼴이 연출됐지만, 그럼에도 대단히 기쁘다. 따블 찍었으니까 더도 말고 3일 동안만 상한가 찍자. 꽃가루 따위는 가마니째로도 먹을 수 있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이제 백만장자 대열에 진입하셨습니다.”
“허허허. 이거 철판 두들겨서 돈 벌 줄만 알았지, 이렇게 돈 버는 법이 있는지는 이제 알았다야. 허허허.”
“이게 다 철판 잘 두들겨서 나온 결과입니다.”
“허허허.”
아버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상장만으로도 큰돈을 벌었는데, 매매개시 확인 벨을 누르는 순간 그 돈이 두 배로 늘어났으니 그럴 것이다.
상장으로 많은 이들이 부자가 됐다. 2대 주주인 아버지는 물론이고, 우리사주 청약에 참여한 직원들도 로또 당첨이 부럽지 않을 상황이다.
가장 큰 부자가 된 이는 당연히 나다. 상장으로 가장 재미를 본 대주주 이스턴캐피탈이 내 돈으로 만든 회사이니, 몇 다리 건너면 결국 내 돈이 된다는 말씀. 아, 신난다.
날아다니는 꽃가루 쳐다보고, 축하 인사 받다 보니 상장기념식이 끝났다. 상장을 위해 1년 넘게 준비했고, 행사를 위해서도 새벽밥 지어먹고 출발한 것에 비하면 참 허무하긴 하다.
“여긴 3시까지 미친 듯이 바쁜 곳이잖아. 허접한 회사들은 꽃가루도 안 뿌려주는데, 이 정도면 엄청 신경 써준 거야. 그러니 스마일 하면서 어서 내려갑시다. 연말이라 할 일이 너무 많아.”
이유선이 테이크아웃 커피 2개를 들고 와서는 통영 가기를 재촉했다.
그렇지. 연말이라 할 일이 너무 많아. 아버지야 여유롭게 한국거래소 사장과 면담도 하고, 밥도 먹고, 사우나도 하고, 마, 다 하겠지만, 나 같은 일개미들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근데 웬 커피?”
“여기 오려고 새벽에 일어났잖아. 졸음운전 하면 안 되니까 커피 두둑하게 마셔놔야지.”
“운전 중에 커피는 위험한데…….”
결국 난 통영 가는 길에 휴게소를 3번이나 들려야 했다.
***
“근데 오빠. 우리 회사는 괜찮아?”
통영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개운하게 자고 일어난 이유선이 맥락 없는 질문을 던졌다.
“누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정신줄 놓고 자더니, 난데없이 회사 걱정이야?”
“나 안 잤어! 회사 걱정돼서 요새 계속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코 고는 소리가 예술이었는데, 내가 헛것을 들은 모양이네. 그래서 뭐가 괜찮냐는 거야?”
“왜 그, 조선노연?”
“조선업종노조연대 말이야?”
“아, 맞아, 그거. 그거 만들어졌잖아? WBT조선 때문에 연대파업 들어간다고 하는데, 우리는 괜찮겠냐는 거지. 지금 선박 인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데, 파업한다고 며칠 일 못하면 타격이 좀 큰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WBT조선 살려야 한다며 조선사 노조들이 연대파업을 하기로 했다는 것 말이다.
이 바닥은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 손을 거쳐야 하는 곳이고, 그만큼 사람 관리가 중요하다. 월급 잘 주고, 끼니마다 고기반찬 내놓으면 문제없이 잘 굴러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이 바닥이기도 하다.
아무리 관리 잘하고 풍족하게 대접해 줘도 옆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면 힘을 보태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파업에 동참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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