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30
230
네크로폴리스는 볼모를 잡지 않는다.
동전은 속세에서나 통용되는 것. 꺼진 생명의 잔재야말로 죽은 자들의 군세를 지탱하는 원천이다.
단, 육신을 취하되 영혼은 전송하라.
언젠가 바스러질 피륙과 달리, 넋은 떠나가야만 하는 존재들이니.
눈물과 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는 토드의 견해에 따라 세워진 강령이었다.
“심심풀이 삼아 인간을 무두질하는 족속들에겐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
굴레에 묶인 채 끌려오는 놈들치고 몰골이 멀쩡한 개체가 없었다. 뿔이 뽑혔거나, 날개는 난도질당하고, 발굽은 부러져 절뚝대는 경우가 허다했다.
악의에 절인 악마들조차 쇠잔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젠 또 뭔 짓을 하려고···
무릎 꿇리는 즉시, 배속된 근위병들이 뭉툭한 대검을 내리쳤다. 놈들은 되려 반색했다.
―아아, 드디어 해방이다! 지긋지긋했어.
사념체들에게 육신의 죽음은 환복 정도의 감흥에 그친다. 목숨 하나만 쥐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필멸자들에 비하면 얼핏 불공평한 처우일지 모른다.
펄떡대는 몸뚱이가 채 멎기도 전에 희끄무레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이름 모를 아무개의 영혼조차 저것보단 밝으리라.
놈들의 본질은 흐릿하고 탁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타오른 적도 없고, 타오를 일도 없기에 응어리진 채로 영영 존속할 뿐인 것들.
“어딜 가십니까.”
도주하려던 악령들이 붙들렸다.
“안 되죠. 안 돼. 이래선 또 수십 년 뒤에 살아나선 패악질이나 부릴 테니.”
토드는 목줄 잡아당기듯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 거미 다리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며 악령들을 착착 갑옷 앞으로 몰아세웠다.
“잠가라, 갑옷.”
리치들이 일제히 낭송을 읊었다. 불티를 튀기며 격렬하게 요동치던 갑옷이 얼마 못 가 잠잠해지더니, 맥 빠지는 증기를 흘리며 단단히 이음새를 결합했다.
철컥.
재갈을 물리지 않은 덕에 왁자지껄 토드를 조롱하던 악마들이 고요해졌다.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관짝입니다.”
혹여 틈새 비집고 탈출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마르커스를 위시한 망자들이 성유도 뿌려준다.
그제야 격한 호평이 돌아왔다.
―이, 이 악독한 놈! 눈물 한 방울까지 쥐어 짜내더니, 이젠 우릴 아예 쇠판에 가두겠다고?
―인간이 생각할 술수가 아냐! 조상 중에 복마전의 핏줄이 섞인 게 분명해. 아니, 분명 비열한 것이 밑바닥 황무지에 굴러다니는 들개의···
“하하. 무저갱 회원님들이 이토록 좋아해 주시니 저도 즐겁습니다.”
피로 새긴 문양에 악마들은 착실히 안착했다. 곳곳에서 사지 비트는 소음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새 몸뚱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토드는 휘파람을 불며 사자의 서를 넘겼다. 책장에 피로 새겨진 이름들이 빼곡하게 들이찼다.
“놈들을 최선봉에 세우고, 아낌없이 소모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스트레이커가 소리쳤다.
【출정!】
끼야아악-
악마의 두개골을 깎아 만든 나팔이 째지는 비명을 울렸다. 웅크렸던 망자들이 잿가루를 떨구며 궐기했다.
양익을 맡은 용아병들은 대오를 구축한 채 행진하고, 살점 거인들은 혹여 다른 망자를 밟지 않도록 조심스레 뒤뚱댔다. 이따금 대열에서 엇나가는 놈들이 있으면 유해룡이 울부짖으며 허공을 아울렀다. 제각각일지라도 망자들은 거미 깃발 아래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 하! 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서 죽음이 일어나는군!】
안광을 이글거린 파멸의 기사가 고삐를 쥐었다.
【자네도 보이나?】
“하수인들의 눈을 빌어 잘 보고 있습니다.”
【실로 장관일세. 자네가 이 광경을 온전히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게 유감일 따름이야.】
토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눈이 없어도, 남들이 믿지 못할 것들을 봐왔으니. 충분히 만족합니다.”
낮게 기함한 이스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임박한 전투가 무저갱에서 종장을 장식하겠지.】
“그러겠지요.”
【···다음 계획도 있나?】
“글쎄요.”
무저갱의 기강을 잡은 이후? 흑색 학파의 존속이라는 사명만을 위해 달려왔던 여정이었다.
그 뒤는 방점을 찍어두지 않고 막연히 여백으로 남겨뒀었다.
“계획이야. 지금 상황을 끝낸 뒤에 얼마든지 생각나겠죠.”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하필 돌부리가 발끝에 걸렸다.
【요즘 자주 휘청이지 않나.】
몸이 기울어지기 전에 단단한 장갑이 어깨를 부여잡았다.
“···고맙습니다.”
【본인이 곁에서 돌봐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만.】
파멸의 기사는 눈두덩 위로 두른 안내를 훑어내렸다.
【자네처럼 사특한 사령술사라면. 추후 안구를 회복하는 음모 정도는 자네의 사악한 대계에 포함되어 있으리라 믿겠네.】
“왠지 맹인은 강자처럼 보이는 느낌이 있지 않나요?”
토드의 너스레에 이스라가 딱 잘라 말했다.
【장부가 코앞도 살피지 못하는데 어찌 다음을 도모하겠나!】
그 천하의 돌격대장이 이렇게 뼈있는 일침을 가한다고? 토드도 살짝 당황했다.
다소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어조 너머, 잔잔하게 일렁이는 안광이 보였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부딪쳐오지만, 눈빛에 묻어나는 사려를 감출 생각도 없는 게 그녀답다고 해야 할지.
“음. 당신 말이 옳아요.”
사령술사가 아무리 하수인들에게 의존적인 클래스라지만, 최소한 자신의 앞길은 알아서 챙겨야겠지.
“가끔 느끼는 거지만, 이스라 당신한텐 번뜩이는 통찰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토드가 진지하게 뇌까리자 짐짓 이스라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에헴, 이 또한 평소 기사도 전집을 탐독하여 식견이 넓어진 덕분 아니겠나.】
“일리가 없진 않아요. 그런데 제가 평소 지켜본 바론 이따금 다른 사람이 깃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파멸의 기사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하, 하! 하. 모앤더! 군기를 세우게! 항상 선봉을 맡아야 할 흑위대가 뒤처져져서야 쓰겠나!】
애꿎은 기수만 닦달한 이스라는 휘하 죽음의 기사들을 이끌고 앞서나갔다.
사령술사는 말없이 웃으며 꽁무니에 따라붙는다.
///
재로 뒤덮인 삭막한 황무지.
이형의 군대가 대치했다.
개전을 앞두고 이렇다 할 통첩이나 도발도 오가지 않았다.
―캬아악!!
분노로부터 빚어진 복마전의 자식들.
“오토마톤 부대부터. 앞으로.”
개인의 의지에 사역되어 움직이는 망자의 군단. 두 군세는 원초적인 염원에 이끌린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렇기에 더욱 양립할 수 없었다.
횡대로 늘어서 있던 오토마톤들은 검붉은 격랑에 휩쓸렸다.
역시 중앙이 가장 극렬한 공세를 받는다. 악마들은 힘으로 전열 전체를 허물어뜨리길 원했다. 저돌적인 전략이지만, 개체별로 우수한 백병전 능력이 결부되어 효과적이다.
우직하게 밀고 들어오는 병력을 보면서 토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단순히 고기 방패 용도만 기대하고 그놈들을 세운 게 아니거든.’
적들이 픽픽 쓰러지니 열기에 고양되었던 악마들도 조금씩 위화감을 눈치챘다.
―찌르지 마! 안에, 안에 있다고!
갑옷의 틈새로부터 동족의 비명이 새어 나온다. 거침없이 도끼로 짓뭉개던 투사들이 주춤거렸다.
―이게, 뭐냐.
―날 꺼내다오! 여기 갇혀있다!
아우성치는 음성과 별개로 갑옷은 무기를 휘두르며 목숨을 노렸다. 악마로 하여금 악마를 상대하게 만든다니. 흉포한 성정의 개체들조차 동족상잔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곤 눈에 띄게 둔해졌다.
으직!
―전부 곤죽으로 만들어라.
단숨에 지르밟은 대악마가 뇌까렸다.
―그게 동포들을 구할 길이다.
위엄있게 잿가루를 날리며 전선을 통솔하는 것도 잠시. 오토마톤과 뒤얽힌 악마들 위로 허공이 찢어졌다. 샛노란 동공이 한껏 트인다.
“별의 자손은 종복으로서 의무를 다하였노니.”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거해는 전장의 반절 넘게 그늘을 드리웠다.
“이제 그가 비롯된 땅으로 돌아갈지어다.”
황급히 뒷걸음질 치는 놈들이 속출했지만, 이미 늦었다.
일방적으로 밀렸다고 생각했던 시체들은 어느새 역쐐기꼴로 악마들을 감싸고 있었다.
자진해서 이빨 촘촘히 박힌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셈.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던 놈들도 그들에게 닥칠 선고를 직감했다.
―안 ㄷ···
“시체 폭발.”
불어터진 사체가 한계까지 부풀어 오름과 동시에, 여태껏 퇴적된 가스와 더불어 요사스런 녹광이 지옥을 환히 밝혔다.
번쩍―
귀청 먹먹해지는 굉음이 단말마를 덮는다.
고기 방패들과 뒤엉켰던 악마들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해버렸다. 몇몇 대악마들은 기어코 대폭발의 여파를 견뎌냈지만, 온전하지 못한 꼴로 비틀거렸다.
―이까짓, 손실쯤은.
순간적으로 공백이 생겼지만, 싱싱한 악마들이 빈자리를 금세 메꾼다. 수천의 영혼을 일거에 거둬간 주문에도 불구하고 마귀들의 호전성은 쉽사리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놈들이 망각한 게 있다면 폭발의 여파로 변형된 전장. 사혈이 쏟아진 토양은 극도로 부패한 진창으로 변모했다.
【장창대, 10보 약진!】
백부장들의 구령에 맞춰 근위병들이 나선다. 빽뺵하게 들어찬 칼날의 창틀을 향해 악마들은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콰직, 콱!!
무모한 육탄 돌격이 쉼 없이 쏟아져도 대형은 굳건했다. 판을 짜는데 불과했던 고기 방패들과 달리, 이들은 주력부대. 모기와 구더기가 들끓는 네크로폴리스에서 밤낮없이 혹독하게 숙달한 정예병들이었다.
―가아악···!!
도저히 견디다 못해 장창진을 우회하는 놈들은 날아드는 은탄과 포탄에 걸레짝이 되었다. 용케 포화를 뚫고 도달하더라도, 어김없이 말발굽 소리가 울린다.
【제법 발이 빠른 놈이로군!】
푸르스름한 말에 올라탄 이가 말했다.
【그래 봐야 흑위대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순 없다.】
검게 옻칠한 기사들은 수렵에 나선 것처럼 악마들을 잡아 죽였다.
【하-】【하.】【하.】
【뛰어라.】【마귀야.】
흉흉한 기세에 필사적으로 달리던 악마들은 그대로 방향을 틀어 내빼기 바빴다. 추이를 가늠하던 파멸의 기사가 장검을 들었다.
【우리도 측면 교전에 가담한다! 나팔을 울려라!】
이스라와 더불어 단원들 역시 세차게 안광을 불태운다.
【단장의 뜻대로!】
흑위대는 늪으로 전락한 황무지를 종횡무진 누볐다. 전원 유령마를 마련해준 보람이 있었다.
일말의 두려움 없이 들이닥치는 기병대에 악마들은 승기를 잡나 싶다가도 번번이 와해되었다.
토드의 시야가 그들에게서 떠나, 전장 전체로 뻗어 나갔다.
‘하수인들이 선전해주곤 있어도, 여전히 전세는 팽팽해.’
새삼 여기가 복마전이라는 게 체감될 정도로 악마들이 우글거린다. 천장과 바닥, 능선 어귀에 이르기까지 사방이 적이다.
일으킬 만한 시체도 많지만, 이처럼 교전 상황에선 사자 소생을 시도했다간 악마들더러 표적으로 찍어달라고 홍보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저놈들을 이끄는 게 앙갈라툼이라는 걸 괜히 귀띔해주진 않았겠지.’
앙갈라툼은 성전사를 플레이했던 시절, 처음으로 퇴치했던 대악마. 군주가 토드와 놈과의 원념을 모를 리 없었다.
토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모할 정도로 병력을 갈아 넣고 있어. 마치 이쪽으로 온 신경을 돌리겠다는 듯이.’
활짝 젖혀진 사자의 서가 책장마다 웅혼한 마력을 흩뿌렸다. 가닥으로 이어진 매듭은 하수인들을 잇고, 끊임없이 멎어버린 육신을 움직이는 동력과 축복을 공급한다.
이스라, 마르커스, 대작, 스트레이커, 클라우스, 소테리스, 고드프리···. 수중에 유휴 상태인 고위 망자가 없다. 모든 네크로폴리스의 중진들이 각자 전선을 도맡고 있었다.
‘여기서 한 명이라도 빠지면, 엇비슷하게 맞춘 균형이 무너질 거야.’
사령술사는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배후에서 암약하며 하수인들을 조율하고, 승리를 획책하는 것이 통솔자의 몫이다.
‘여기서 모든 전력을 희생시켜 승리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토드는 거미 목걸이를 풀어 책장에 걸었다. 만류하듯 성물함이 작게 진동했지만, 토드는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외뿔 악마가 시선을 마주해온다.
‘전에도 한 번 잡아봤던 녀석이라서요.’
강렬한 적의가 느껴진다.
초월자들의 규격에서 레벨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앙갈라툼은 유배만 아니었다면 의원을 넘어 군주 반열에 가까워질 놈이었다.
‘그래서 군주가 나더러 솎아내길 바라는 거였구만.’
아른거리는 열기에 목덜미까지 후끈거리는 기분이다. 토드는 용골 지팡이를 단단히 쥐었다.
―무저갱을 침범한 건 네놈만이 아니다.
핏발 서린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태양을 떠받들던 무지렁이가 끝내 사그라든 것처럼, 네놈도 그리되리라.
살벌한 기백에 눌릴 법도 했지만, 토드는 막연한 벗을 만난 기분이었다.
“이 모습으론 초면이지만, 피차 우리가 겉치레 필요한 사이는 아니지요.”
느슨한 입가까지 탐색하던 악마가 나지막이 탄식했다.
―그 알량한 필멸자를 인도하던 배후가···.
탄탄대로를 걷던 대악마에겐 벼락같이 벌어졌던 일이다. 느닷없이 들이닥쳐 성검을 들이밀던 필멸자. 놈은 합창단을 이끈 채 모든 축복을 몰아받으며 자신을 패퇴시켰다.
유달리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를 띠고 있던 성전사. 지금은 그 환영이 눈앞의 인영과 겹쳐 보인다.
―네놈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