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n obsessed tyrant and a sleeping cat every night RAW novel - Chapter (113)
Chapter 112
궁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오른 나는 천천히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던 해가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어져 붉은 볕을 곳곳에 드리우고 있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며 웃음을 터뜨리거나 길가에 펼쳐진 가판대에서 무언가를 고르는 사람들이 차창에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맞은편에 앉아 창밖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하젤이 문득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나는 황급히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볕이 좋아서 몸이 늘어지는 거예요.”
하젤이 티타임이 길어져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젤은 가스파르와 데인과 함께 캐번디시 부인의 집을 구경했는데, 데인이 데인버그를 제외한 위페르의 곳곳이 너무 덥다며 약간의 곤혹스러움을 내비쳤다고 했다.
나는 하젤의 말을 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엘리제 황후에게 들었던 말을 곱씹었다.
방금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모든 게 꿈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상태란다.’
엘리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목숨을 대가로 기도를 올려 시간을 되돌렸으니 그에 따른 대가는 치러야 했지. 가엽게 여기셨는지 죽지는 않았다만…….’
신성력은 거의 없는 셈이 되었고, 눈은 겨우 빛을 구분할 수 있는 정도라고 했다.
엘리제가 있던 방에 들어갔을 때 사방이 암막 커튼으로 막혀 있다가 내가 있는 방향의 창문에만 커튼이 열리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캐번디시 부인이 내가 있는 방향에 빛이 들게 하여 엘리제가 내가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 짐작하여 몸을 틀 수 있게 한 것이다.
캐번디시 부인을 제외한 누구도 엘리제의 눈이 거의 멀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황후가 눈이 멀고 힘을 잃었다고 한다면 위페르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도 당연하지만 무엇보다 이를 반기는 건 아돌프의 정부들이겠지.’
귀족들을 제외한 제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황후와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아돌프 사이에 있는 유일한 적통은 킬리언 하나뿐이었다.
킬리언의 입지에 조금이라도 해가 돼서는 안 되기에 엘리제는 이 사실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킬리언이 황제가 될 때까지 숨길 예정이라고 했다.
‘사실 레네트에게도 알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잖아, 소피아?’
엘리제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간략히 말해 준 후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가볍게 웃으며 캐번디시 부인에게 동의를 구했다.
캐번디시 부인은 엘리제가 이 방에서 의자에 똑바로 다다를 때까지 부단히 걷는 연습을 했다고 덧붙였다.
또 내가 앉을 자리를 그녀의 맞은편 정면에 있는 의자로 미리 정해 놓고 그곳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연습도 했다고.
‘혹시 알아봤었니?’
‘전혀요. 정말 몰랐어요.’
‘다행이구나.’
엘리제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럽기까지 한 미소를 지으며 놀란 내 마음을 선뜻 진정시켜 주었다.
나는 그녀가 천천히 걸어와 의자를 짚었던 점,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음영이 드리워지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던 점, 그리고 손을 달라는 그녀의 말에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캐번디시 부인이 중간에서 내 손을 엘리제의 손에 옮겨 주었던 일들이 새삼 떠올랐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편지를 자주 쓸 수가 없어졌어. 소피아에게 대필을 시키자니 우리의 필체가 너무 다르고 말이지. 좀 더 연습해 봐, 소피아.’
엘리제가 흔연히 말하며 차를 마셨다.
모든 절망과 실의를 달관한 듯 평온하고 고요해진 여인의 모습이었다.
‘킬리언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단다. 내가 킬리언에게 지금의 나를 말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가 말해 준 킬리언의 비밀을 되새기며 당장 그를 보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궁전에 도착했습니다, 황태자비 전하.”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창가에 기댄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오랜 역사를 견뎌 온 거대한 궁전이 굳건한 자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전하께서는 황태자비 전하께서 오시면 언제든 지체 없이 집무실을 개방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집무실에 혹여 다른 이와 함께 있을까 싶어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는데, 시종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데, 문 앞을 지키던 시종들이 예의를 갖춰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천장에 닿을 듯한 거대한 아치형 창문이 주르륵 이어진 가운데, 저 멀리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창문을 향해 의자가 살짝 돌아간 채였다.
장난 좀 쳐 볼까.
“전……하……?”
얌전한 고양이처럼 숨죽여 다가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 순간 나는 소리 내던 입을 급히 다물었다.
키가 큰 의자 등받이에 넓고 두툼한 어깨를 깊게 기댄 채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나는 고개를 내미느라 숙였던 몸을 일으킨 후 그의 책상을 돌아봤다.
모서리와 다리 등 곳곳에 금이 세공된 직사각형의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아르제넬스 해협 교섭권 갱신안, 레이센드 항만 수주건, 외국 대사들의 서신 등 글자만 읽어도 머리가 아픈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
아돌프가 흑마법약 중독이 심해져 국무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고, 그 일은 고스란히 모두 킬리언의 몫이 된 지 오래였다.
이 정도면 반기를 들 만도 하고, 실질적으로 원작에서는 즉위식 당일 피의 전쟁을 일으켰지만, 이번 생의 킬리언은 되도록 모든 일을 평화롭게 해결하려는 듯해 보였다.
“……피곤할 만도 하지, 음.”
그와 같은 침실에서 잠을 잘 때에는 그나마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있었지만, 요즘 같은 경우에는 들리는 소문으로만 짐작할 뿐이다.
킬리언이 거의 자지 않는다는 건 황실에 드나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지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잠드는 시간이 적었다.
나는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피며 고개를 기울였다.
조각 같은 얼굴에 나붓하게 그려 넣은 듯한 감긴 눈매와 굳게 다물린 입술이 아까 본 엘리제 황후를 연상케 했다.
재킷과 크라바트는 벗어 둔 채 하얀 셔츠와 검은색 팬츠를 입고 있는 그는 평소보다 느슨하고 무방비해 보였다.
팔걸이에 올라와 있는, 소매를 걷어 올린 길고 탄탄한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이내 몸을 바로 세웠다.
‘조금 이따가 오는 게 좋겠다.’
공부나 일을 하다 잠깐 잠드는 그 찰나가 얼마나 달콤한지 잘 알기에 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돌아섰다.
그 순간 확 낚아채는 듯한 손길이 나를 잡아당겼다.
“꺅!”
소스라치게 놀라 짤막한 비명 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가는 찰나 엉덩이 아래 단단한 허벅지가 확 부딪치는 듯했다.
“어딜 가려고.”
끝이 조금 갈라진 낮은 음성이 귓가를 쿡 두드렸다.
얼결에 그의 무릎에 앉은 꼴이 된 내가 딸꾹질이 나올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이제 막 눈을 떠 감감한 눈빛인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잠깐 졸긴 했어.”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선명해진 붉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아주 잠든 건 아니고.”
“아…….”
“왜 그냥 가.”
“깊이 잠든 것 같아서요.”
“깨워야지.”
겨우 잠든 줄 빤히 아는데 그걸 어떻게 깨우나?
“음……. 네.”
나는 대답을 삼킨 채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나른한 한숨을 가만히 내쉬며 내 머리칼을 정돈하고 어깨 너머로 쓸어 넘겼다.
“그런데요, 전하. 제가 여기에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왜?”
“어……. 어색하니까?”
“익숙해져, 그럼.”
그의 태연한 대꾸에 잠시 말문이 막혀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태자가 익숙해지라시면, 익숙해져야지, 응.
저토록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데 혼자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는 게 별스러운 것 같아 나도 최대한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내가 그의 눈길을 피해 홧홧해진 얼굴을 달래느라 허공을 올려다보는 사이 킬리언은 느릿느릿 내 손끝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캐번디시 부인과의 티타임은 어땠어.”
그의 질문에 내 고개가 대번에 그를 향했다.
자신을 봤다는 말은 하지 말아 달라던 엘리제의 부탁이 떠올랐다.
지금의 그녀를 보면 킬리언이 견딜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좋았어요.”
“어머니는 잘 만났고……?”
“!”
어떻게 알았지?
흠칫 놀라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는데, 킬리언이 미약한 실소를 터뜨리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어제 어머니가 머무는 성에서 간밤에 마차가 빠져나갔다고 하던데. 밋시오도 함께.”
“아…….”
“캐번디시 부인은 국가가 주관한 행사 이외에 어머니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사람이고.”
“…….”
“그대와 티타임을 갖기 위해 이 오랜 시간을 비워 둘 리 없는 인물이라.”
짐작해 본 거지. 킬리언이 말미에 덧붙이며 나를 잠자코 응시했다.
그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나쁜 대화가 오갔나?”
“아니요! 좋은 분이셨어요!”
내가 냉큼 소리치자, 킬리언이 한쪽 입가를 비스듬히 올렸다.
“다행이네.”
“……왜 저만 불렀는지 안 궁금하세요?”
“그대만 만나자고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킬리언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그리고 엘리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엘리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게서 눈길을 떼어 내지 않고 고요히 마주하고 있는 킬리언을 보며, 초점을 잃은 엘리제의 아름다운 두 눈이 떠올랐다.
“황후 폐하께서는 전하를 보고 싶어 하세요.”
나는 애써 환히 웃으며 엘리제의 안부를 전했다.
“아마 금방 만나게 되실 거예요.”
“좋은 대화가 오가긴 했나 보네. 이렇게 웃어 주는 걸 보면.”
“전하.”
“응.”
나는 그를 부르며 잠시 숨을 깊게 들이켰다.
‘킬리언에게 내가 지금의 상황을 알려 주지 못한 데에는, 그 아이에게 한 가지 취약점이 있기 때문이란다.’
엘리제는 슬픔을 내비치지 않는 고아한 미소를 보이며 나에게 담담히 말을 이었다.
‘킬리언이 극한의 감정을 느낄 경우, 특히 그게 분노에 해당한다면 심장에 무리가 생겨. 무리가 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타들어 가 버린다는 이야기야.’
늑골 밑이 선득해지는 한마디였다.
‘……오러 때문인가요?’
오러를 발현하지 못해 심장에 무리가 왔던 데인이 떠올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엘리제는 자칫 긴장한 기색을 드러낸 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단다.’
나는 한동안 말문이 막힌 채 엘리제를 숨죽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불의 오러가 킬리언의 심장을 불태울 수도 있어.’
위페르를 위한 것이라 하지만, 실은 자신을 위해 과거로 돌아온 어머니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엘리제의 두 눈이 멀고 신성력이 거의 바닥나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아돌프의 행패로 궁전이 아닌 외곽의 성에 머물며 요양해야 하는 어머니를 가엽게 여기는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들끓는 증오가 곤두서 있을 킬리언에게, 현재 엘리제의 상태를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진실은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에 휩싸이게 만들 터였다.
나야 엘리제를 처음 봤기에 그녀의 행동에서 어색함을 쉽게 읽어 내기는 어렵겠지만, 킬리언은 자신의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챌 것이다.
위페르의 존망을 위해서도, 그리고 킬리언 그를 위해서도 엘리제의 상태는 숨기는 게 옳다고 했다.
‘킬리언이 너로 인해 더욱 강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야. 오러를 완벽히 견딜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구나.’
킬리언의 심장 뒤편, 그러니까 등에는 긴 상흔이 남아 있다고 엘리제가 설명했다.
어린 시절 심장이 불의 오러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 때 생긴 상처인데, 다른 상처처럼 새살이 덮여 사라지는 게 아니라 했다. 그가 오러를 견디고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짐에 따라 그에 비례하듯 상처가 줄어드는 중이라고.
나는 킬리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의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로 집어넣어 사락 쓸어 넘겼다.
“전하. 절대 아프거나, 다치지 마세요.”
“……갑자기 왜 이러지?”
“자주 말할게요.”
“무슨 대화를 하고 왔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해 주니까 기분은 좋아졌어.”
킬리언이 내 허리를 느슨히 안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제가 꼭 다시 만나게 해 드릴게요. 제가 전하를 강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는 거라면 옆에 꼭 붙어 있을게요!’
엘리제에게서 킬리언의 상흔에 대해 듣는 순간 즉흥적으로 튀어 나간 대답이었다.
나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목 끝에 간신히 찰랑거리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가 다치지 않고 온전하기를 바랐다.
그를 도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단순히 나를 구해 준 그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좋아해요.”
가까스로 달싹이는 입술 새로 그의 고백에 대한 대답이 흘러나갔다.
“좋아하게 됐어요, 전하를.”
“…….”
문득 굳은 낯빛의 그가 서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