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08)
결전
* * *
용병왕. 성녀. 대마법사. 얼굴 없는 기사.
다른 세계. 같은 시간대에서 살던 넷이 뭉쳤다.
넷은 몇 가지 공통점을 공유했다.
인간의 한계를 도전하는 듯한 강함.
쓰라린 실패의 경험.
그리고, 내면에서 함께 했던 별개의 존재.
위대한 영웅들이라 불리었던 네 명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우리가 함께라면 악마라도 능히 사냥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증명하듯.
넷은 함께 뭉쳐 다니며 악마를 사냥했다.
하위 서열 악마 따위는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이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홀로 악마를 쓰려뜨려 온 역전의 용사.
그 강력함은 하늘에 닿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잇따른 악마의 죽음에 제국의 주민들은 열광했다.
“영웅들 만세!”
“이름 없는 영웅들께 영광을!”
이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원래의 세계를 버리고 도망친 순간. 이름 역시 버려두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 악마를 처단하고 대륙의 평화를 되찾는 날. 다시 이름을 되찾기로 맹세했다.
주민들은 이 영웅의 등장에 크게 기뻐했다.
전쟁이 머지않아 끝나리라는 분위기가 흘렀다.
영웅들 역시 안심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균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황제였다.
“황제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우리가 자기 권위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성녀의 중얼거림에 용병왕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뭐 어때요. 군대를 이끌고 오라죠! 덤벼들면 다 때려눕히면 될 뿐인데요!”
“으음. 차라리 군대라면 괜찮을지도…….”
실제로 17차례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
독과 함정. 마법과 암기를 사용한 전문적인 암살이었다.
설마 대륙의 영웅을 상대로 이런 식으로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용병왕은 분개했다.
“이대로는 못 참아요! 가죠! 당장 황제의 목을 따고 우리가 황좌를 차지합시다!”
거친 발언에 대마법사가 동조했다.
“황좌를 차지하는 건 위험하지만, 어떻게든 황제를 치워야 한다는 점은 동의하네요.”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은 피가 흐를 거예요.”
얼굴 없는 기사는 강건하게 말했다.
“득보다는 실이 많은 계획인 것 같군.”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말싸움 끝에 용병왕이 칼을 뽑았다.
얼굴 없는 기사 역시 검을 뽑았다.
예리하게 빛나는 룬검.
상대의 힘을 흡수해 봉인해버린다는 강력한 무구였다.
“싸, 싸우지 마세요.”
성녀의 만류로 칼부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날. 넷은 처음으로 느꼈다.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으나, 그 사고방식도, 성격도 다르다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영웅들이 해산하기 전.
얼굴 없는 기사가 대마법사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뭐죠?”
“네 마법에서 악마의 냄새가 나던데.”
얼굴 없는 기사는 처음부터 대마법사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건 주문쟁이를 싫어하는 기사의 본능 탓이기도 하지만, 관찰에 의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 자는 위험하다.’
대마법사는 욕망이 강하다.
원하는 게 있으면 반드시 이뤄야 직성이 풀리고, 그걸 해낼 능력도 있다.
심지어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걸까?
대마법사가 차갑게 말했다.
“악마의 냄새라니. 터무니없는 억측이네요.”
“흐음. 그런가?”
얼굴 없는 기사는 말없이 룬검만을 툭툭 두드렸다.
마치, 지켜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게 영웅들은 해산했다.
마지막까지 홀로 자리에 남은 대마법사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여럿이서는 안 돼. 나 혼자만이…….”
넷은 그날 이후로 데면데면하게 되었다.
각자 서로의 분야에서 활동했다.
성녀는 교단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용병왕은 용병 길드의 수장이 되었다.
얼굴 없는 기사는 북부를 주로 돌며 전사들과 친분을 다졌고, 특히 하이엘프들과 교류하며 실력을 늘렸다.
대마법사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거느리는 한편. 전방의 군단, 특히 2군단과 1군단 쪽을 돌아다녔다.
대마법사가 악마의 진영 깊숙이 들어가 악마에게 지식을 전수받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가끔 돌곤 했지만, 누구도 그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은 황제가 그녀를 모함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트렸다고 여겼다.
그 뒤로도 영웅들은 악마를 상대해야 할 때 같이 뭉치고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이미 이들은 같은 동료라고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같은 목표를 가진 동지였다.
이 세상만이라도 구해내는 것.
더는 세상이 불타는 모습을 보지 않는 것.
그 꿈을 위해서라면 넷은 기꺼이 힘을 합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
흩어져 있던 영웅들에게 편지가 왔다.
대마법사가 보낸 편지였다.
‘그분을 이곳으로 불러올 거예요.’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대마법사가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하지만 불러온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긴가민가하지만 영웅들은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함께했던 존재에 대해서 궁금했으니까.
성녀와 용병왕은 어느 버려진 고성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마법사님이 말한 곳 같은데요.”
“예.”
“기사님은 안 온 걸까요?”
“원래 두 사람은 사이가 안 좋았으니…… 들어, 갈까요?”
둘은 주저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아주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숱한 사선을 넘어온 자에게 예감이란 결코 무시할만한 게 못 되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는 게 현명하리라. 하지만.
“들어가죠.”
호기심이 불안함을 이겼다.
둘은 고성으로 올라갔다.
대마법사가 고성의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밖에서는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르릉.
저 멀리서 천둥이 울부짖었다.
비바람을 등진 마법사는 유난히 음산해 보였다.
“왔군요.”
“……기사님은 안 올 것 같아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마법사는 바닥에 손을 슥슥 그었다.
피로 된 마법진이 빠르게 완성되어갔다.
성녀는 꺼림칙함을 이겨내고, 억지로 물었다.
“저. 그분을 불러온다는 건 무슨 의미죠?”
대마법사가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말 그대로예요. 제가 세계의 구멍을 뚫고 여러분의 세계로 찾아간 것처럼, 저 윗세계에도 구멍을 뚫는 거죠. 직접 올라갈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끌어내리는 건 가능할 거예요.”
“그분을 이곳에 불러낼 생각이라는 말인가요?”
“싫은가요?”
“그건…… 아니지만요.”
성녀가 주저하며 말했다.
용병왕은 불안한 표정으로 또르르 눈알만 굴렸다.
한동안 침묵 속에서 비 내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런 정적을 깬 건 성녀였다.
성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조금 그렇지만…… 예전에. 기사님이 말한 것 기억나시나요? 마법사님의 마법에서 악마의 냄새가 난다는 걸.”
“…….”
“저도 그때는 기사님이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마법사님이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 그. 일전에 상대하던 가니아고스가 다루던 마법과 비슷한 것 같아서요.”
“이미 답을 정해놓고 오신 것 같은데요? 제 대답이 중요할까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저희는, 그. 동료잖아요.”
마법진을 그리던 마법사의 손길이 멎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사람은 완전해질 수 없어요.”
“……네?”
“저는 여러분들을 찾기까지 여러 세계를 헤맸어요. 하지만 그 모든 세계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멸망하고 말았죠. 악마가 너무 강력해서? 저 하늘 위의 신들이 무능해서? 그것도 하나의 이유죠. 하지만 진짜 원인은 하나. 사람 때문이었어요.”
대마법사가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바닥에는 피로 그려진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졌다.
보기만 해도 등골이 쭈뼛 서는 불길한 문양이었다.
“사람은 여럿이 모이면 반드시 싸워요. 강한 적을 대상으로 단합하는 듯하다가도, 금방 자기들끼리 칼을 겨누죠. 사람이란 애초에 글러먹은 존재인 거예요.”
“저기. 저는 이해가 잘……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저는 그러다 깨달음을 얻은 거예요. 사람이 글러먹었다면, 사람을 넘어서면 되는 거잖아요? 여럿이 모이면 반드시 싸우게 된다면, 저 혼자서 강한 힘을 가지면 될 뿐이고요.”
잠자코 듣던 용병왕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무기를 꺼냈다.
“잡소리 그만하고. 사제님의 질문에나 대답하지?”
처음으로 드러낸 적의.
하지만 대마법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흑기사를 아나요? 밤의 여신을 따르는 반언데드 기사. 그들은 타인의 생기와 혼을 강탈해 힘을 키워나가더군요. 거기서 영감을 얻었어요.”
“빨리 제대로 대답하라고! 아무리 그쪽이 강대한 마법사라도, 우리 둘을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어!”
“인간을 초월하고 여럿의 힘을 하나로 모은다. 바로…… 이렇게.”
대마법사가 피 묻은 손바닥을 바닥에 대었다.
우우우!
바닥에 그려진 문양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성녀와 용병왕은 곧바로 방어해내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문양에서 만들어진 빛의 촉수가 그 둘을 단단히 옭아맸다.
“이, 이게 무슨!”
“끄아아!”
순식간에 혼과 생기가 황혼에게 빨려 들어갔다.
용병왕이 외쳤다.
“가, 감히 우리를 배신하다니!”
“배신이 아니에요. 여전히 제 목표는 같아요. 무능한 여신도. 악마들도 다 무릎 꿇린 뒤, 제가 만든 질서 아래에서 비로소 세상은 평화를 찾을 거예요. 여러분들이 바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죠.”
“인간을 포기하고 괴물이 될 셈인가요!”
“괴물이라…….”
대마법사는 미소를 흘렸다.
“얼마든지.”
화아아아!
성녀와 용병왕의 몸은 순식간에 생기를 잃고 쭈그러들어, 껍데기 같은 시체만을 남겼다.
위대한 영웅들의 너무 비참한 최후.
대마법사는 눈을 감고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힘을 느꼈다.
“정말이지 황홀하구나.”
울컥!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온다.
둘의 영혼이 머릿속에서 절규를 내지르며, 힘껏 저항하고 있었다.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저들도 머지않아 포기할 것이다.
힘과 함께 성녀와 용병왕의 기억도 흘러 들어왔다.
이 기억을 제대로 분석한다면 저들의 기술도 능히 사용할 수 있으리라.
“그다음은…… 그래. 약속대로 의식을 진행해야지.”
세계에 구멍을 뚫어 그를 데려온다.
이건 일종의 예행연습이었다.
저 높이 있는 두 여신을 떨어트리기 전에, 한번 연습해보는 것이다.
“내 몸에 강림시키면 되겠지. 그러면 예전처럼 하나가 되는 거야.”
상대는 자신을 버렸지만, 용서할 거다.
앞으로 한 몸으로 영원히 같이 살아갈 테니.
마법사는 더욱 강대해진 힘을 연료 삼아 의식을 이어갔다.
손을 휘이 젓자 하늘에 구멍이 뚫린다.
구멍 난 공간에는 별이 반짝이는 우주가 있었다.
저 반짝이는 별 중 하나를 끄집어 내릴 것이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다른 세계의 존재를 이곳으로 불러오다니.
육체까지 옮기는 건 불가능하고, 영혼만을 겨우 옮길 수 있을 거다.
그마저도 상대가 완고하게 저항한다면 어려움은 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과 힘을 믿었다.
만약 지금 실패하더라도, 더 큰 힘을 모아 다시 시도하면 그뿐.
그리고 의식은 예상외로 너무나 싱겁게 성공했다.
저항이 없다시피 했다.
상대의 영혼이 많이 약한 상태인 걸까?
모른다. 지금부터 확인하면 될 뿐이다.
“하하! 하하하하!”
그녀는 광소를 터트렸다.
해냈다!
영웅들의 힘을 흡수하고, 원하는 모든 걸 이뤘다!
그녀의 지혜 앞에 불가능한 건 없으리!
하지만 승리를 확신했을 때가 언제나 가장 위험한 법.
푹!
“어?”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서 돋아난 칼날을 내려다보았다.
룬검이다.
검에 새겨진 룬이 이내 요사하게 빛나더니, 그녀의 가슴에 단단히 틀어박혀 힘을 빨아댔다.
“이이!”
대마법사는 당황했다. 하지만 숱한 전장을 헤쳐온 역전의 용사답게 그 반응은 본능적이었다.
콰아!
손에서 분사된 화염 폭풍이 습격자를 덮쳤다.
습격자의 정체는 예상대로였다.
얼굴 없는 기사.
“크윽!”
열기와 거센 바람에 기사가 저 멀리 날아갔다.
뒤이어 대마법사가 고드름을 난사했다.
이미 룬검을 사용한 기사는 피하는 데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공격을 피해낼 수는 없는 법.
뾰족한 얼음송곳이 갑옷의 틈새 곳곳에 틀어박혔다.
가볍지 않은 부상.
얼굴 없는 기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룬검에 찔린 대마법사는 연신 핏물을 쏟아냈다.
둘은 서로를 노려본 채 잠시 숨을 골랐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너만큼은 진즉 죽여 두었어야 하는데……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마지막 기회를 줄게. 이 검. 뽑아.”
룬검은 가슴에 단단히 틀어박혀, 도무지 뽑혀 나오지 않았다.
계속 상처를 치유하고 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대마법사의 마지막 제안에 기사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 룬검은 오직 나의 말만 따른다. 내가 명령하지 않으면 그 룬검은 절대 뽑혀 나오지 않을 거다.”
“그래.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검에 힘을 빨리다 비참하게 죽어라. 이 마녀야.”
그러고는 즉시 창밖을 향해 뛰어내렸다.
대마법사가 다급하게 쏘아보낸 얼음송곳이 또다시 몸에 틀어박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아. 하아. 도망을 쳐? 왜?”
당황한 황혼이 땀과 피를 흘리며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의식.”
분명히 그녀가 불러들이려 했던 영혼이 사라졌다.
대마법사의 시선은 기사가 사라진 차창 너머로 향했다.
이윽고.
비통한 울부짖음이 온 고성을 울렸다.
* * *
조금 늦었지만 어떻게든 마녀의 음모를 저지했다.
마녀가 죽었을까?
그러면 좋겠지만, 기사의 직감이 말했다.
저 마녀는 가슴에 룬검이 틀어박히는 정도로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마 더 끔찍하고 사악한 계략으로 온 대륙을 위협하겠지.
저 여자의 야망과 돌아버린 정신세계는 악마보다도 더 위험했다.
“쿨럭.”
피를 뱉어낸 기사는 달리고 또 달렸다.
북쪽의 용뼈 산맥으로 가면 대마법사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으리라.
거기서 친우인 하이엘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
‘몸 상태가 안 좋아.’
상처가 깊다.
마법에 너무 깊숙이 당했다.
이 정도 몸 상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 기다리는 걸까?
그렇다면 오히려 바라는 바다.
지켜야 할 걸 지켜내지 못한 기사는 죽음을 원한다.
하지만 그가 아직 쓰러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있다.
그의 몸속에 새로 들어온 다른 하나의 영혼.
대마법사가 그토록 집착했던 상대이자, 동료들 모두의 친우와도 같은 존재.
자신이 죽으면 이 자 역시 죽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해. 방법이 없을까?’
그는 품을 뒤지다, 우연히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밤의 교단을 따르는 신도가 선물해준 성서다.
기사 아렌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바이만 왕국이 멸망할 당시.
바이만의 마지막 왕은 자신의 딸 엘레나가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때까지의 신앙을 모두 버리고 흑기사가 되어 강력한 힘을 얻었다.
기사는 그 최후를 기억한다.
누군가는 신앙을 배신했다고 왕을 비난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보다 명예로운 선택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제 자신도 선택을 내릴 때가 온 것 같다.
‘밤의 여신이시여.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기사가 여기 있습니다.’
흑기사가 되는 과정은 놀랄 만큼 순탄했다.
머리가 자라 하얗게 새버렸고,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더 이상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심장은 뛰지 않고, 대신 밤의 신성이 그 안을 가득 메운다.
밤의 신성은 이내 그를 위한 흑색 갑주를 만들어냈다.
“정말이지. 기묘한 몸이로다.”
상처가 아물었다.
힘을 크게 잃었지만, 어쨌건 그는 살아남았다.
이제 눈을 감을 시간이다.
설산의 눈 속에 파묻혀 점점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기사는 생각했다.
이런 시체 같은 몸을 물려줘도 괜찮은 걸까.
몸의 다음 주인이 잘 해낼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 그의 친우인 엘프들에게 남길 쪽지를 적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이름을…….
“그래. 이름은 엘프식으로 데일이 좋겠군.”
모든 의무를 마친 기사는 차가운 설산에 파묻혀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