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58)
상행
* * *
여관 안으로 들어온 건 녹색 머리가 아름답게 웨이브 진 여인이었다.
검은 눈동자는 실내의 불빛을 반사해 번들거렸고, 셔츠 위에 걸친 얇은 숄은 육감적인 몸매를 한껏 드러내주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자기 매력을 알고, 그 매력을 활용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물론, 데일이 놀라워한 건 그런 여인의 미모 때문은 아니었다.
데일은 이 여인을 본 곳은 재판장 안이었다. 그때 여인은 다른 재판관들의 옆에 서 있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하나.
여인은 평의회의 일원이었다.
여인이 여관으로 들어서자, 그 뒤를 이어 그녀의 부하로 보이는 장정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프라우는 조용히 앉아 책을 읽던 엘레나를 보호하듯이 섰고, 꾸벅 졸던 하켄이 얼른 데일에게 다가왔다.
“거, 거물이 왔는데요. 평의원이라니.”
“누군지 아나?”
“알다마다요. 외곽구역 상인 길드의 수장, 레베카. 가진 거 없이 태어나 젊은 나이에 상회 하나를 세운 살아있는 전설. 도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요?”
그런 시선을 즐기듯. 여유롭게 걸어온 그녀는 곧장 데일에게 찾아오지 않고, 적당히 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멀뚱히 서 있는 카일라에게 말했다.
“가게에 왔으면 일단 물건을 사야지. 그게 예의 아니겠어? 음식과 맥주를 내와줘.”
카일라가 물었다.
“음식은 뭐로 드릴까요?”
그런 카일라의 질문에 레베카가 미소 지었다. 마치 귀여운 후배를 보는 듯한 미소라 해야 할까.
물론, 카일라에게는 그 미소가 조금 재수 없게 느껴졌다.
“손님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물건을 내오는 것. 그게 상인의 기본이야. 시키는 대로만 해서는 크게 될 수 없어.”
“……맥주랑 소시지, 양파 수프면 됐죠?”
레베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수긍으로 받아들인 카일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적.
여관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찼지만,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분명 레베카는 데일에게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 하지만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침묵의 힘을 알았다. 분위기를 휘어잡는 방법을 알았다.
데일도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먼저 입을 열면 지는 대결을 하는 듯. 실내는 고요한 정적이 계속되었다.
그 침묵을 깬 건 카일라다.
카일라는 접시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레베카와 그 부하들 앞에 요리를 놓았다.
레베카는 소세지를 포크로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 진한 육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음. 가게 미관에 비해서 음식 맛은 괜찮네. 맥주는…….”
맥주를 한잔 홀짝인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직원들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더 훈수가 이어질 것 같아 결국 데일이 말을 꺼냈다.
“훈수나 두려고 이곳에 온 것이오?”
그제야 레베카는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공한 사업가 특유의 자신감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데일 경. 후배들을 보면 자꾸 옛날 생각이 나서 훈수를 두게 되네요.”
“오지랖이 넓으시군.”
“글쎄요. 남의 결투에 덥석 나서시는 분께 그런 얘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레베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다.
데일은 식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가 썩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다.
재보려는 태도나, 남을 아래로 보는 듯한 시선이나, 핵심을 꺼내기 전까지 빙빙 돌아가는 방식이나.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핵심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나는 이야기를 빙빙 돌리는 걸 좋아하지 않소.”
“아하. 그런 방식을 선호하시는군요. 하지만 그전에 우리 일단 서로 인사부터 할까요? 세상 모든 일에는 절차와 순서가 있는 법이잖아요?”
레베카는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가, 다시 반대로 꼬으며 말했다.
“레베카예요. 고아라서 댈만한 부모님 이름은 없지만, 지금은 제 이름을 딴 상회를 운영하고 있죠. 외곽구역의 상인 길드를 이끌기도 하고요.”
굳이 고아라는 점을 강조하는 건, 그런 자리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기 때문이겠지.
데일도 짧게 답했다.
“데일이오.”
“좋아요 데일. 왠지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 그런가요?”
안 그럴 것 같은데.
데일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대신 대화가 옆으로 새기 전에 먼저 핵심에 다가갔다.
“가란드에게 얘기 들었소. 나한테 할 의뢰가 있다고?”
“맞아요. 동패 승급을 앞두고 있다 했죠? 딱 그에 어울리는 일이죠.”
그렇게 말한 레베카는 옆에 앉은 부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일은 뭐 중요한 물건이라도 꺼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레베카의 손에 쥐어진 건 궐련이었다. 부하들이 그 끝을 자른 뒤, 마도구를 이용해 불을 붙여주었다.
하나같이 값비싼 물건들이다.
그녀는 궐련을 입에 머금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행동 하나하나에 과시가 배어 있다. 상인에게는 재력을 과시하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니.
데일은 그런 레베카에게 성큼 걸어갔다. 레베카가 미소 지었다.
“아. 경도 피워보고 싶은가요? 제법 괜찮은 물건이에요. 귀족이나 마법사들이 많이 피는 물건이죠. 원한다면 하나 선물로…….”
데일은 레베카가 문 궐련을 덥석 잡았다. 그대로 잡아당겨, 옆으로 휙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궐련이 부하 중 하나의 맥주잔 쏙에 풍덩 들어갔다.
“이야기를 빙빙 돌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소. 그리고, 애가 있소.”
데일은 뒤쪽에 앉아 있던 엘레나를 가리켰다. 애 앞에서 실내 흡연이라니. 용납할 수 없다.
데일의 행동에 레베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실내에 다른 모두는 경악했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부하가 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일어섰다.
“이놈!”
“뽑을 건가?”
데일 역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당장이라도 서로 검을 뽑으려는 그 순간.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그만.”
레베카는 당황한 감정을 가라앉히듯,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좋아요. 데일 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요. 그럼 이제 일 얘기로 들어갈까요?”
“그래주면 고맙겠군.”
듣던 중 반가운 얘기다. 데일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레베카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외곽구역의 상인 길드장이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지 아시나요?”
“글쎄. 모르겠군.”
“여러 일을 하지만, 가장 신경 써서 하는 건 전선에 물자를 보급하는 일이에요. 중요한 업무죠.”
그냥 중요한 업무가 아니다.
전쟁은 보급이 절반이라는 말도 있다.
아무리 강인한 병사라도 굶으면서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니.
“정확히 말하면, 보급을 보조하는 역할이지만요. 대부분의 일은 황제 폐하와 상위 구역의 귀족들이 처리하니까요. 저는 그 사이에서 기름칠을 하는 역할이라 해야 할까요.”
그렇다 해도 중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번에는 남쪽의 4군단에 보급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거기에…….”
“나를 호위로 고용하고 싶다는 거요?”
“예. 중간거점인 카엘름 성까지만 함께하면 됩니다.”
레베카는 지도를 꺼내 카엘름까지의 거리를 보여주었다. 느긋하게 가면 2주 정도 걸릴 거리였다.
“선금으로 금화 4개에, 하루에 은화 6개씩. 일이 끝나면 금화 6개를 추가로 지급해드릴 거예요. 전투가 있다면 성과급은 따로 드리고, 전투로 얻은 노획물은 당연히 본인이 챙겨도 됩니다.”
“흐음.”
데일은 레베카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좋은 편에 속한다.
일을 무사히 끝나기만 하면 금화가 열 개라니.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금화 한 개만 해도 쉬이 볼 수 없는 거금이라는 걸 생각하면,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당장 옆에서 듣던 하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하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냥 선금만 먹고 튀어도 남는 장사 같은데…….”
고민하던 데일이 물었다.
“고작 철패 용병을 고용하기에는 너무 큰 돈인데.”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죠? 크리스틴 경과 결투를 봤다면, 누가 데일 경을 고작 철패 용병이라 생각하겠어요. 그런 사람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데, 금화 몇 개가 아깝겠어요?”
레베카가 미소를 입에 걸고 말하자, 데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조건의 의뢰다.
돈도 돈이지만 레베카와 이런 식으로 끈이 생기면 좋으면 좋았지, 해가 될 일은 없으니까.
가란드가 굳이 귀띔해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확실히 결투 한번 치르니, 좋은 의뢰가 알아서 굴러들어오는군.’
데일이 가만히 있자, 레베카는 속으로 무얼 생각하는지 안다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확정한 듯한 말투다.
이제 데일이 입을 열고 승낙만 하면 계약 체결이다.
하지만 데일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탁상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침묵. 하지만 시선은 레베카에게 고정했다.
“…….”
왜 데일이 대답하지 않는지, 어리둥절해 하던 레베카는 이내 데일이 지금 무얼 하는지 깨달았다.
‘똑같이 되돌려주는구나.’
침묵의 힘.
레베카가 가게에 와서 했던 행동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다.
잠시 표정을 굳힌 레베카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뭐 마음에 안 드는 조건이라도 있어요? 혹시나 협상을 원하시는 거라면, 이미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을 드린 거라고 말씀드릴게요.”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조건은 지금도 충분하오. 아니, 오히려 과할 정도지. 그래서 의심이 가는군.”
“의심……. 말인가요?”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 않소?”
언뜻 보면 데일의 호감을 사기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큰돈을 줘, 데일과 연을 맺어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너무 대놓고 드러낸다고 해야 하나.
그 모든 걸 고려하더라도 액수가 크다.
그리고 데일이 아는 상인이라는 인종은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
형편없는 상인이든, 대상인이든 그 사실에 예외는 없다.
하물며 눈앞의 여인은 성공 신화를 이뤄낸 몸.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허.”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그 눈에 이채가 서렸다.
꾸며낸 표정이 아닌, 진심으로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그녀는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런 큰 규모의 보급을 맡아 왔다면, 상시 고용하는 무력이 있을 것 같소. 보급 때마다 용병들에게 의뢰하는 건 변수도 많고, 번거로운 일이니까.”
“맞아요. 상회 소속 사병들이 있어요. 웬만한 동패 용병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전사들이죠. 그래서요?”
데일이 이어 말했다.
“이미 무력이 모두 갖춰져 있다면, 나는 어디까지나 덤일 것이오. 그 덤에게 주기에는 액수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오.”
“말했잖아요. 데일 경과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쪽은 친구를 돈 주고 사시오?”
흑기사의 무기질적인 눈과 상인 특유의 재는 듯한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그러길 잠시. 레베카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후우. 가란드가 또 호들갑을 떠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맞아요. 솔직히 말할게요. 사실 데일 경은 일종의 보험이에요.”
“보험?”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엘름 성 근방에 악마 숭배자들이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교단의 이단 심문관들이 이미 그곳으로 향했지만, 저는 자그마한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외곽구역의 상인 길드장들은 모가지가 날아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문자 그대로 말이다.
그만큼 전선에 대한 보급은 막중한 임무였다.
“데일 경은 이전에 사도 하시나와 싸워 이겼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혹 놈들과 마주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보험이군.”
“시험해보려는 느낌도 있었죠. 데일 경이 활약해주신다면, 다음에는 정말로 거금을 들여 상회로 끌어들일 생각이었거든요.”
어깨를 으쓱한 레베카가 말했다.
“전부 말했어요. 그래서요. 이제 어쩔 거에요?”
“어쩌겠소.”
데일이 말했다.
“덤으로 딸려가는 게 아닌, 악마 숭배자를 상대할 호위로서 다시 협상해야 하지 않겠소.”
* * *
긴 협상 끝에 레베카는 여관을 나섰다.
그녀는 데일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흡사 흙 속에서 반짝이는 돌을 찾아낸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레베카의 오른팔 같은 부하가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
“좋으십니까? 돈만 더 뜯기게 생겼는데.”
레베카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고말고. 모처럼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났는데, 기쁘지 않겠어? 가란드는 저런 사람을 어디서 찾았대.”
슬쩍 눈치를 살핀 부하가 말했다.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레베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아는 기사들은 대부분 꼴통이었어. 사람 잘 죽이는 꼴통. 내가 말이라도 걸려 치면 어딜 천한 년이 말을 붙이냐고 깐깐하게 굴지. 심지어 가진 건 쥐뿔도 없는 거렁뱅이들도 그런다니까?”
“으음.”
“하지만 방금 말하는 거 봤잖아. 생각도 깊고, 신중하고, 예리하고. 이교도면 뭐 어때?”
칭찬 세례에 부하의 얼굴이 더더욱 부루퉁해졌다.
“……정작 그 상대는 상회주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무례하게 입에 문 궐련도 빼버리지 않았습니까.”
“애 때문에 그랬다잖아. 그보다,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
갑작스러운 질문이지만 부하는 즉시 답했다.
“뭐, 예. 준비는 완벽하게 해뒀습니다. 솔직히, 악마 숭배자들이 튀어나와도 전혀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보고를 듣던 레베카가 미간을 좁혔다.
“완벽하다고 말하지 마.”
“……예?”
레베카는 밤하늘에 불길하게 떠오른 그믐달을 보며 말했다.
“완벽하다고 생각하면 꼭 문제가 터지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