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espised Granddaughter of the Powerful Martial Arts Family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그때는······ 미안했어. 내가 할 말이 없어.”
남궁류청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래.”
나는 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손에 힘이 빠지는 듯하던 남궁류청이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명한 눈빛은 포기를 몰랐다.
“그래서 네가 천마대총에 가면 다 해결이 돼?”
“······.”
“천마대총에서 원하는 걸 얻었다고 쳐.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서하령이 그러더군. 네가 이상했다고.”
“······”
남궁류청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도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
“······.”
“너 죽을 생각을 한 거지?”
나는 약점을 찔린 짐승처럼 발작적으로 남궁류청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나는 버럭 소리쳤다.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래서 가는 거야! 그럼 이제 무슨 방법이 있는데!”
미래를 알던 잘난 능력도 이제는 소용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런 상황은 벌어진 적 없었으니까.
“대적자는 무슨!”
처음 내가 소설 속의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전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결말 따위 처음부터 본 적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게 두려움을 줬다.
만약 천마가 또 회귀한다면?
그럼 나는 이 모든 기억을 잊고 다른 놈들의 손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다 허망하게 죽는 건가?
내 아버지는?
해독법은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살아 계셨다. 외통수였다.
“네가 뭘 알······!”
마구 소리치던 나는 갑자기 나를 뒤덮은 온기에 말을 잃었다. 성큼 다가온 남궁류청이 나를 끌어안은 것이다.
“그래. 미안해, 울지 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해야 했다.
내 눈가에는 눈물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운다니 누가?
그렇게 생각하고 힘주어 뿌리치려고 했는데, 팔이 마음먹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멍하니 그 품 안에 있었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단단하면서도 안온한 품.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분명 한 번도 안긴 적 없는 낯선 품일 텐데······ 쌉싸름한 체취를 맡자, 쓸모없다고 생각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이뤄지던 백리세가에 조문을 온 남궁류청.
나는 아버지의 관이 안치된 사당 앞에서 남궁류청을 마주쳤다. 옥을 깎아 만든 듯한 수려한 얼굴의 청년이 반쯤 넋이 나간 채 있었다.
나를 본 청년이 눈물 젖은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자 하얗게 질린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리연 소저······ 맞습니까?-
사실은 그게 나와 남궁류청의 첫 만남이었다.
눈가에 뜨끈한 열기가 치솟는 게 느껴졌다. 내뱉지 못한 말이 혀끝에 맴돌았다.
‘미안해, 못 되게 말해서. 사실 너는 나를 처음에 그렇게 보지 않았어······.’
아버지의 죽음에 울고 있는 나를 유일하게 안아 줬던 사람. 그는 울다 지쳐서 쓰러진 나를 옮기고 살펴 주었다.
그래, 그랬다. 그때가 내가 남궁류청과 사랑에 빠졌던 순간이었다.
남궁류청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가자.”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 넓은 세상에 숨을 곳 하나 없겠어?”
“······.”
나는 남궁류청을 아연하게 보았다.
도망가자?
지금 남궁류청이 내게 한 말이 맞나?
“설마 지금 같이 도망가자는 거야?”
“그래.”
단단한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숨기지 않는 애정이 넘쳐 났다.
내가 천마의 혈육이라는 건 괜찮아? 라는 질문은 삼켰다. 그가 여기 온 것 자체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니까.
“너도 나랑 같이 가겠다고?”
“그래.”
“······.”
내가 아는 남궁류청은 단 한 번도 등을 돌려 도망친 적 없었다.
성격은 조금 삐딱했을지 몰라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말아야 할 일은 명확히 구분했다.
그는 정의와 신의를 내던지고 떠난다는 걸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도망치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 남궁류청이.
“남궁완 아저씨가 너 이런 생각인 거 아시니?”
“네가 가장 중요해.”
“······”
평소라면 불효자라고 놀려 먹었을 텐데 숨이 턱 막혀 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표정한 낯의 남궁류청이 부드러운 손길로 내 이마를 쓸어 넘겼다. 남궁류청의 품속에서 엉망이 되었던 머리칼이 정리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움찔 떨고 한 발 멀어졌다.
남궁류청은 태연히 손을 내리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백리 대협은 무사하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남궁류청의 팔을 와락 부여잡고 말했다.
“무사하시다고? 아버지를 만난 거야? 아버지는 어때, 괜찮으셔?”
“······”
곧바로 나오지 않는 답에 나는 순간 두려움에 가득 차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남궁류청은 굳은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사하셔. 무사하신데······.”
“무사하신데, 뭐!”
“백리 대협 옆에 네 친모가 있었어.”
나는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뭐라고?”
“네 친모를 만났어.”
“네가······ 내 어머니를······ 만났다고?”
순간 무슨 말인지 혼란스러워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 아버지가 무사하신데, 내 아버지 옆에 친모가 있다는 건가?
제대로 이해하자 이제는 걱정스러워졌다.
내 친모는 천마의 딸이었다. 남궁류청과 만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칼부림 날 일 빼고서야.
어쩌다 만났냐고 묻고 싶었지만, 무슨 대답이 나올지 두려워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거기다 아버지는 왜 친모와 함께 있었단 말인가?
남궁류청이 설명을 이었다.
“백리 대협이 천라지망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네 어머니가 도우셨어.”
“뭐라고?”
이건 또 생각도 못 한 대답이었다.
“내 어머니가······ 아버지가 천라지망을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왔다고? 내 어머니가?”
“그래.”
“그런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도 천라지망 안에 있었으니까.”
천라지망 밖에 있던 남궁류청이 천라지망 안에 뛰어들 이유. 하나밖에 없었다. 내 아버지.
하지만 남궁류청은 자신이 왜 천라지망에 들어갔는지 한마디 부연설명도 없었다. 공치사를 바라지 않는 태도였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리라.
“······고마워.”
남궁류청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움을 표하자마자의문이 몰아닥쳤다.
‘내 어머니인데 다들 나보다 먼저 만나네.’
야율도 만나고 남궁류청도 만나고. 그것참 신기한 노릇이지 않나?
게다가 어머니는 아버지를 어떻게 도왔을까?
‘왜 도왔을까? 이제 더는 숨길 필요 없다는 건가?’
남궁류청이 나를 붙잡은 채 뭐라뭐라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가 한꺼풀 막에 씐 것처럼 멀리서 들리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아니, 하하. 정말 웃긴다. 도와줄 수 있었으면서 왜······ 왜······.”
왜, 하필, 내가 빠져나간 후에야 아버지를 도우셨을까?
나는 도울 가치가 없어서?
야율도 남궁류청도 만났으면서 왜 나는 만나러 오지 않지?
아버지를 만날 정도면, 남궁류청도 만날 정도면, 나를 만날 기회는 충분히 있었을 텐데?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부글부글 끓는 화가 치솟다가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백리연, 왜 그래? 기대한 적도 없잖아.’
20년에 가깝게, 아니 회귀 전까지 따지면 훨씬 더 많은 세월동안 어머니란 존재를 들은 적도 없었는데.
이제와서 뭘 기대한단 말인가?
새삼. 새삼······.
“백리연!”
“어?”
“듣고 있어?”
“아, 뭐라고?”
남궁류청이 조금은 조급한 어조로 말했다.
“천마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지 오래라더군. 게다가 마교도 세개의 세력으로 쪼개졌어. 마교는 지금 내분으로 엉망이라더군. 세파로 나누어져 있고, 그 중의 한 축이 네 어머니의 세력이야. 당분간은 천마대총때문에 널쫓을 여력이 없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도 내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건가?”
“맞아.”
나는 픽 웃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필요 없어.”
남궁류청은 그런 내 반응에 살짝 놀란 낯을 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웃기지 말라고 해. 날 돕고 싶었다면, 내가 천마지보에 손대는 것부터 막지 그랬어? 인제 와서 새삼?”
나도 모르게 빈정거리듯이 말을 내뱉었다.
거추장스러우니 버리고, 거추장스러우니 다른 데 치워 버리겠다고? 꿈 깨시지!
“연아.”
당황한 듯한 남궁류청의 눈빛을 보며 다시 정신을 잡았다.
어머니의 일은 남궁류청의 잘못이 아니었다.
남궁류청이 했던 떠나자는 말, 그래. 조금은 유혹적이었다. 잠시나마 흔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정말로 위로가 되었다.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류청, 고마워. 그리고 난 정말 괜찮아.”
“연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거야.”
“백리연!”
“돌아가.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이를 악문 남궁류청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라잖아.”
야율이었다.
이미 기척으로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여간 저 녀석은 말을 잘 듣는 것 같으면서도 안 들었다.
한숨을 쉬며 야율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내게,
스릉-.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남궁류청의 검이 야율을 향했다.
“꺼져라, 야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