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espised Granddaughter of the Powerful Martial Arts Family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 * *
천마지보가 명확히 길을 알려 주기에 헤맬 염려 없는 백리연은 별것 아니라고 한 안개지만, 다른 이들에겐 전혀 다른 얘기였다.
길 하나 없는 깊은 밀림 속은 동서남북 방위조차 알 수 없었다. 어느 방향을 보아도 다 비슷하게 생긴 나무와 수풀들. 진창인 바닥과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늪지대는 그들의 발목을 잡기 일쑤였다.
안개 속에 뛰어 들어온 대다수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빙글빙글 돌거나, 갑자기 푹 꺼지는 늪에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죽곤 했다.
그리고 안개 바깥.
성인 몸뚱어리만 한 넝쿨이 주렁주렁 매달린 깎아지른 듯 선 절벽 위. 흑색 옷과 붉은색 옷의 인형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협곡을 가득 채운 짙은 안개. 푸르른 나무 몇 그루가 우뚝 솟아 안개를 뚫고 서 있었다.
마치 구름으로 만든 바다에 떠 있는 푸른 섬들처럼 보였다.
안에서 벌어질 일을 무시한다면, 마치 신선도가 그림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봐도 될 법한 풍광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기척 없이 다가가는 이가 있었다.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누군가 본다면 보고도 믿기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림자가 움직여 절벽 끝에 선 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궁주님.”
안개 낀 협곡 아래를 내려다보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좌사가 사망했습니다.”
“좌사가 죽었다고?”
대답을 한 자는 여인 옆의 붉은 복장을 한 수하였다.
흑색 의복의 여인과 달리 여인을 둘러싼 이들은 모두 피처럼 붉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모두 여인으로, 궁주라 불린 이의 호위 무사처럼 보였다.
“예. 목을 친 것은 남궁 세가주이나, 그 전에 이미 남궁 소가주와의 격전에 패색이 짙었다고 합니다.”
“그럼 결국 남궁 소가주가 좌사를 쓰러트렸단 말인가?”
호위의 말에는 그게 가능하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남궁 소가주도 또한 부상이 상당해, 후방으로 후송되었다고 합니다. 부상의 정도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궁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곧 천하 강자에 이름이 하나 더 올라가겠군.”
“세상에나, 아무리 그래도 벌써 오를까요?”
붉은 복장의 호위는 궁주와 친근하게 대화했다.
“무인은 고난이 성장시키는 법이니.”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남궁 소가주가 먼저······ 헙, 죄송합니다.”
궁주는 이를 무시한 채, 무릎 꿇은 수하에게 물었다.
“우사와 총군사는?”
“우사는 백리 세가주와 곤륜파 장문인을 견제하고, 총군사는 병력의 3할을 선두로 안개 속에 밀어넣고 곧 3할을 마저 데리고 따라 들어갈 예정입니다. 대략적인 방향을 알아낸 듯 싶습니다.”
“무림맹은?”
“무림맹은 충돌을 최대한 피하며 포위진을 계속 유지 중입니다.”
전쟁 중인 당사자들은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바깥에서 보이는 것이 있었다.
당장 전투를 벌일 것처럼 굴던 무림맹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고 이렇게 밖에서 보면 목적이 보였다. 무림맹은 최대한 마교를 이곳에 끌어모으고 있었다.
태고 진인의 목적은 단 하나, 마교의 절멸.
마교도들이 모이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교도를 한 번에 칠 기회를 위함이었다.
벌레를 하나씩 죽이러 다니는 것보다는 미끼를 보고 모인 벌레를 한 번에 불사르는 것이 쉬운 건 당연했다. 벌레가 이길지, 태고 진인이 이길지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면 제갈 세가주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 몸으로 꾸역꾸역 여기까지 따라와서.
곧 죽을 날을 받아 놓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었다.
“궁주님.”
좀 전에 입을 다문 여인이 아닌 다른 호위였다.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부름에 궁주가 끄덕이며 명했다.
“그래, 때가 됐군. 모두 연락해라. 빠져나올 때가 되었다고.”
“알겠습니다.”
더는 이곳에 있어도 얻을 게 없었다.
궁주의 시선이 안개를 향했다. 미련을 떨치듯 고개를 틀고 몸을 돌릴 때. 누군가 다급하게 절벽 위로 올라왔다.
“궁주님!”
“어느 안전에서 소란이냐!”
호위가 예민하게 소리쳤다.
한쪽 무릎을 꿇은 수하의 보고를 받은 궁주의 표정이 처음으로 찡그려졌다.
수하가 보고를 이었다.
“감시자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일단 추적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이 있었습니다.”
수하가 품속에서 비단에 싼 서신을 넘겼다.
곱게 접혀 있는 서신을 펼치자 탕약향이 확 풍겼다.
연갈빛으로 쓴 서체는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글에서 풍기는 탕약향으로 보아 약탕을 먹 대용으로 쓴 걸 알 수 있었다.
[붓을 들었으나 첫 문장부터 막히는 구려. 자네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궁주. 피차 얼굴을 보기 꺼려지니 이렇게 서신으로 나기오. 아마 궁주가 이걸 읽을 때쯤, 나는 이미 천마대총으로 떠났겠지. 나를 쫓지 마시오.
나도 아오. 이 몸으로는 도움은 커녕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잠시 괜찮아졌을 뿐, 발작 시간은 길어지고 있지. 언제 다시 발작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아무 도움이 안 될지라도, 나는 내 딸에게로 갈 것이오.
나는 그 아이를 혼자 둔 것을 아주 오랫동안 후회했소. 그러니 이젠 절대 혼자 두지 않을 생각이오. 곁에는 아비가 있음을 알게 해 주고 싶소.
그러고 보니 이 말을 하는 것을 빠트렸구려. 딸아이를 내게 보내 주어 고맙소.
딸아이를 마주한 적 있소? 당신의 눈을 정말 닮았다오. 그러나 당신과 달리 진심으로 웃을 줄 아는 아이라오. 내 보물이라오.
당신도 보게 된다면 아끼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오.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하고 연이만 돌아오거든 한 번쯤 얼굴을 마주해 주오.
양친이 모두 죽은 것과 한 명이라도 살아 있다는 건 마음가짐이 다를 테니. 착한 아이라 금방 마음이 풀어질 것이오.
연이는 어릴 적부터 남달라 어미에 대해서 내게 잘 묻지 않았소. 제 조부에게만 한 번 지나가듯 말했다고 하더군. 저를 버린 거라고.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오.
자라며, 한 번 어미에 대해 물어 본 적 있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모두 말해 줄 걸 그랬소. 그러니 만약 내가 전해 줄 수 없게 된다면 그대가 전해 주었으면 좋겠소.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이미 지나온 세월에 의미 없을지라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이야기도 있으니.
몸은 잠들어 있었으면서도, 귀는 열려 있었기에 당신의 사정을 들었소.
오월궁은 독립을 하기로 했다고?
다행이오. 떠날 때 되도록 많은 교도를 데리고 가길 바라오.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의미없는 전쟁에서 살릴 수 있지 않겠소?
당신은 별고 없이 뜻하는 바를 이루길 바라오. 천라지망 안에서 나를 도와주어 고맙소.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잘 지낸 것 같아서 다행이오.
또한 부탁이 하나 있소. 서신 한통을 더 동봉하니,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하거늘 내 아버지께 보내주었으면 좋겠소.
마지막으로. 나는 당신을 전혀 원망하지 않으니, 이제 당신의 삶을 살아가시오.
백리의강이,
원하던 자유를 찾을 아란에게.]
* * *
타닥타닥.
장작 타오르는 소리가 느리게 정신을 깨웠다.
안개 가장자리와 달리 안으로 들어갈수록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밤이 되자 안개가 더 짙어졌다.
어둠 속에 달빛 하나들지 않아 발치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와 남궁류청은 자리를 잡고 쉬기로 했다.
더는 쫓기지도 않는데 다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적당한 자리를 잡고, 사흘 만에 등을 대고 누울 수 있었다. 대충 잠자리를 마련하고, 등을 대자마자 그대로 정신을 잃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온몸이 개운했다.
천마지보, 그리고 천마대총에 가까워질수록 넘쳐 나는 힘이 있었으나, 이렇게 직접 휴식을 취하는 건 또 달랐다.
머리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고 안정적이었다. 편안한 느낌에 응석 부리듯 머리를 뭉개다 천천히 눈을 떴다.
모닥불의 주홍색 빛이 조각 같은 미남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바로 눈이 마주쳤다.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던 듯 싶었다.
부드러운 눈빛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맴돌았다.
안개로 살짝 흐려진 시야에 남궁류청이 놀란듯 살짝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마도 오랜만의 숙면에 마치 붕붕 뜬 것처럼 좋은 기분과 안개로 뿌연 시야가 현실감을 낮춰, 이성의 고삐를 놓게 만든 듯했다.
나는 손을 뻗어서 남궁류청의 뺨에 살짝 손을 댔다. 미지근한 온기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아니 , 그런데 왜 얘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지?’
잠이 덜 깬 몽롱한 머리에그런 의문이 들어 올 때였다. 내 이마와 머리를 간지럽게 쓸어 넘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남궁류청의 얼굴이 나와 가까워졌다.
“······!”
그리고 눈꼬리에 닿는 말캉한 감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기운이 순식간에 휘발했다.
나는 그대로 숨도 못 쉬고 굳었다. 머릿속이 정말 새하얗게 날아갔다.
얼마나 그렇게 굳어 있었을까, 이어서 콧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이 번뜩 돌아왔다.
그대로 팍, 밀치려 휘두른 손이 남궁류청에게 잡혔다.
“······!”
나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내 손을 붙잡은 남궁류청이 살짝 떨어졌다.
눈이 마주치고도 입을 열 생각조차 못 했다. 입술이 닿을 것 같아서.
“······.”
이내 남궁류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옛날부터 생각했는데······ 넌 눈이 정말 토끼 같아.”
“······.”
토끼? 토끼가 뭐야?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남궁류청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후, 숨결이 쓱 멀어졌다.
그러고 나서야 숨을 쉴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