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espised Granddaughter of the Powerful Martial Arts Family RAW novel - Chapter (43)
43화
* * *
백리 세가 연무장.
넓은 연무장을 독차지한 한 사람이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백리명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수련하던 백리명은 동작을 멈추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검을 놓고 주먹을 쥐었다 펴는 그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얼마나 호되게 맞았는지 백리명은 한동안 검을 쥘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 겉으로 보기엔 부기가 모두 가라앉았어도 검을 쥐면 지끈거리기 일쑤였다. 의원을 찾아가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괜찮다고 말하기만 했다.
백리명은 이대로 낫지 않으면 어쩌나, 다시는 검을 쥘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덜컥 겁에 질렸다.
가문 의원이 돌팔이라는 생각에 석 태의까지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답은 같았다.
그리고 두 달이 다 되어서야 드디어 아무런 문제 없이 검을 쥘 수 있게 됐다.
그때였다.
“명이 형!”
고요한 연무장에 어린아이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던 백리명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가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을때는 언제 찡그렸냐는 듯 웃는 낯이었다.
“표구나. 악이는?”
늘 붙어 다니던 쌍둥이들이 오늘은 혼자였다.
“어쩐 일이야?”
“다 알면서 무슨 일이긴! 형, 할아버지가 뭐라셔?”
“할아버지?”
“어제 할아버지께 문안 올렸다며?”
백리 세가의 가주인 백리패혁이 가내에 머물 땐 모두 아침마다 짧은 문안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저번 남궁완과 얽힌 사건 이후 백리패혁은 백리명과 백리표, 소우악에게는 문안을 올 필요 없다 하며 거절했다.
백리명에게는 자숙하라는 뜻이었으며, 백리표와 소우악에게는 어떻게 떠날 것인지 결정한 후에 오라는 뜻이었다.
백리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어제 할아버님 뵀어. 그게 왜?”
“그게 왜냐니! 어떻게 할아버지 뵀다고 우리한테 말도 안 해?”
그럼 할아버지를 뵙지도 못하는 애들한테 뵙고 왔다고 자랑이라도 하란 말인가?
백리명은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리표는 그런 백리명의 심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다급히 말을 이었다.
“형, 할아버지가 우리 얘기 안하셔?”
“너희 얘기라니?”
“아니, 형한테 난 화 푸셨으니까, 우리한테도 화 푸신 거 아냐?”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기가 막혔으나, 백리명은 인내하며 말했다.
“나한테 화내신 거랑 너희한테 화내신 건 다른 얘기지.”
“왜 달라?”
“······.”
백리명은 최근 들어 쌍둥이들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불쑥 치솟곤 했다.
백리표가 기분 나쁜 기색으로 물었다.
“뭐야, 왜 그런 표정으로 봐?”
백리명이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 말했다.
“······어쨌든 할아버지께선 너희에 대해 아무 말씀 없으셨어.”
“그럼 내일 형이 할아버지한테 우리 고계암 보내지 말라고 좀 해 줘. 어?내일도 뵐 거 아냐.”
“······.”
정말 제정신인가?
그렇지 않아도 할아버지께선 고모 때문에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 계셨다. 고모가 쌍둥이들을 고계암에 보내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며 미적거리고 있어서였다.
고모는 뻔뻔하게 버티고 계시고, 되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매일 할아버지를 뵐 때마다 가시방석이었다.
그런데 오늘 겨우 문안을 허락받은 자신이 할아버지 앞에서 쌍둥이 얘기를 꺼내면 어찌 되겠는가? 자신보고 다시 쫓겨나란 소리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다시 문안 가능해진 것은 근신령을 받았으나 낙담하지 않고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며 수련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 겨우 가능해진 것이었다.
아직 근신령 자체는 그대로였다. 모두 용서한 게 아니란 뜻이었다.
“표야, 그런 얘기는 네가 직접 해야지.”
“하지만 할아버지 얼굴도 못 보는데 어떻게 해!”
“그러니까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표 너도 꼬박꼬박 문안 올리러 오라고. 근데 왜 안오는 거야?”
“할아버지가 오지 말라고 하셨잖아!”
“그때는 너희들이······.”
고모랑 소우악이랑 같이 몰려와 수백당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 치니까 그랬던 거잖아,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으나 억눌렀다.
백리명이 다소 냉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넌 악이를 위해서라도 왔어야지. 네 형제잖아. 그리고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네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고모랑 악이를 위해서도 네가 할아버지께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됐어! 그러는 형은! 할아버지 무서워서 말도 못 꺼낸 거면서! 겁쟁이 주제에 잘난 척하지 마!”
버럭 소리친 백리표가 연무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쿠당탕!
백리명의 목검이 연무장 바닥을 나뒹굴었다.
백리명이 어디론가 손짓하자 백리명의 몸종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내가 분명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도련님의 형제분이어서······.”
짜악! 뱜을 맞은 몸종이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백리명이 슬쩍 웃었다.
“확실히 이제 다 나았네.”
그러곤 몸종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내가 아무도라고 말하면 백리표, 소우악도 포함이야. 알겠어?”
* * *
기분 나쁜 일이 있었으나, 끝까지 시간을 지켜 수련한 백리명은 피로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그의 처소로 가는 길에 아버지 처소를 지나쳐야 했다.
그리고 백리명은 아버지 처소앞의 방씨 어멈을 보곤 표정을 굳혔다.
방씨 어멈은 할머니의 곁을 오랫동안 지킨 몸종으로 늘 할머니와 함께였다. 할머니가 또 고모일로 찾아오신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로하던 백리명은 두통까지 이는 듯해 이를 못본 척하며 지나쳤다. 그러다 다시 아버지 처소 방향으로 틀었다.
백리명을 발견한 방씨 어멈이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수련하고 오신 겁니까?”
“네. 처소로 가는 길이었는데, 방씨 어멈이 여기 계신걸 보면 할머니가 오셨나 보네요. 인사드려야겠어요.”
그때 안에서 아버지의 살짝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아버님이 작정하셨는데 제가 무슨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의란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
방씨 어멈이 서둘러 안에 고했다.
“도련님 오셨습니다!”
“······명이가? 들어오너라.”
백리명이 안으로 들어가자 할머니와 약간 불편해 보이는 낯의 아버지가 그를 맞이했다.
백리명은 밖에서 대화를 듣지 못한 것처럼 밝은 낯으로 인사 올렸다.
“소손이 지나가는 길에 인사드리려 들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수련하러 갔다는 소리는 의묵에게 들었다. 괜히 이 할미 때문에 피곤한데 씻지도 못하고 이리 왔구나.”
“괜찮습니다. 매일 하는 수련인데요. 피곤하더라도 할 도리는 해야죠.”
“역시 믿음직스러워, 네가 우리 가문의 기둥이다.”
미소 지은 백리명이 탁자에 찻잔이 두 개뿐인 걸 보고 물었다.
“어머니는요? 어머니께도 인사 올리고 가려 했는데, 안 계시나요?”
헛기침한 할머니가 조용히 찻물을 들이켰다.
아버지가 대신하듯 답했다.
“네 어미는······ 앓아누운 의란 간호하러 갔다!”
“의묵, 시누이를 돌보는 건 그 아이의 당연한 도리다.”
“하루는 머리가 아팠다가 하루는 가슴이 아팠다가. 하 의원이 몇 번이나 진찰했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다지 않습니까!”
“의묵.”
“석 태의를 부르자니 꾀병이 들킬까 봐 그건 또 싫다지요! 그러면서 무슨 간호입니까!”
“그만하지 못해? 아픈 동생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할머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찻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아버지가 불편한 낯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순식간에 방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백리명이 눈치를 보고 입을 뗐다.
“고모님께서 마음의 병이 깊어서 그런 거겠지요.”
“하!”
아버지의 기가 찬다는 듯한 탄식에 할머니가 아버지를 흘겨보았다.
“의란을 생각해 주는 건 명이 너 밖에 없구나.”
“제가 뭘요, 하하.”
민망하다는 듯이 웃은 백리명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할머니, 소손이 오늘 할아버지를 뵙고 왔잖아요.”
“그래. 들었다. 잘되었구나. 상공도 이제 마음을 푸신 게지.”
“할아버지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았어요. 고모님이 아직 결정하지 않으신 걸로요.”
“그렇더냐?”
할머니는 담담하게 답하였으나 눈빛이 흔들렸다.
“할머니, 차라리 쌍둥이들을 고계암으로 보내는 게 어떨까요?”
할머니와 아버지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거기가 어디라고 보내!”
“할머니, 진정하시고 제 말을 조금만 들어 주세요.”
“······.”
“고모님이 이렇게 버티시다 할아버지가 더 노하시면, 다 같이 나가라고 하실지도 몰라요.”
“흥! 누구 마음대로!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그럴 일 없다!”
“하지만 일이 그리 커지면 사람들이 백리 세가를 향해 뭐라고 수군거리겠어요?”
백리의묵이 능력이 없어 가문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러면 다시 백리의강에게 기대감이 쏠릴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리명은 말을 이어 갔다.
“고계암이 무척 엄한 곳이긴 하지만 표와 악이를 같이 보낸다면 서로 의지도 될 테고, 할아버지께서도 애들을 모두 보내면 마음이 편치 않으실 거예요.”
“······.”
“하지만 악이가 고모님과 소가장에 머문다면 원래 가야 할 곳에 가는 것뿐이기에 할아버지께서 신경 쓰지 않으실 테고요.”
할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은 악이와 표를 더 엄하게 다뤄 할아버지의 동정을 사자 이것이냐?”
“그렇게 되겠네요.”
고개를 끄덕인 백리명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표랑 악이가 직접 고계암에 가 반성하고 오겠다고 한다면 할아버지께서 오히려 더 기특하게 여기실 거예요. 모든 건 할아버지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