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dicate the world to my Russia RAW novel - Chapter (86)
034. 파리에서 운명을 극복함(2)
4.
감히 프랑스 제국의 황제를 대놓고 모욕하다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어려운 발언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화를 낼 겨를도 없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으니까.
‘정말 이곳엔 니콜라이 너밖에 없다는 것이냐?’
심지어 외무대신 탈레랑도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유럽의 미래를 결정짓는 자리에 달랑 황태자 하나만 내세우다니! 이건 가당치 않소!”
“받아들이지 못해도 좋다. 어차피 나는 동맹국의 요구를 전달하고자 온 것뿐이니. 결정을 내리고 말고는 그대의 황제에게 달려있겠지.”
사실 알렉산드르 1세를 제외한 나머지는 유사시에 대신 나설 수 있다고 통보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뭐 어떤가.
거짓으로 지껄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반응 하나는 확실하잖아.
“맙소사! 온 유럽이 네놈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구나!”
나폴레옹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의자를 움켜쥐었다.
‘이러니 몇 번이고 편지를 보내도 반응이 없을 수밖에. 설마 군을 그토록 신속하게 움직인 것도 위에서 내려온 명령에 얽매이지 않아서였나?’
러시아 원정 당시 평화협상을 명목으로 시간만 질질 끌어댔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니콜라이의 재촉이 이어지자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협상을 계속하실 겁니까? 얼른 결정해주십시오.”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나폴레옹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견뎌냈다.
어쨌거나 이번 전쟁의 주도권은 대프랑스 동맹, 개중에서도 러시아가 쥐고 있었으므로.
“…… 알겠다. 한번 들어는 보지.”
조금 진정된 듯 보이자 나는 차분하게 요구 조건을 읊었다.
“동맹국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는 대강 짐작하고 계시겠지요.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그동안 확보한 영토는 토해내셔야겠습니다.”
“영토를 내놓으라니. 대체 얼마나 말이냐?”
“1792년 국경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한다면 지금이라도 전쟁을 멈출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황위를 내려놓고 파리를 떠나야겠지만요.”
퇴위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1792년 국경으로 회귀하라니!
그 말은 프랑스 혁명부터 지금까지 그가 세운 업적을 전부 지워버리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폴레옹은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나약해 빠진 동맹국의 군주들과는 달리 나는 뼛속부터 군인 출신이다. 싸워보지도 않고 영토를 넘겨주는 건 불가능하다!”
“기어이 전투를 택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저는 폐하께서 현명한 결정을 내리리라 생각합니다. 나중을 기약하려면 프랑스 신민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려선 곤란할 테니까요.”
“……”
그렇게 니콜라이가 의미 모를 소리를 남기며 떠나버린 뒤.
나폴레옹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일이 이렇게 틀어져 버리다니.’
만약 그의 예상대로 이 자리에 각국의 군주, 혹은 전권을 위임받은 외교관이라도 나타났더라면.
세부적인 조건을 늘어놓으며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협상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일방적인 통보만으로 끝나버렸으니.
이제 나폴레옹이 할 수 있는 건 니콜라이의 의도가 무엇인지 추측하는 것뿐이었다.
‘그 녀석은 내 속셈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전혀 틈을 보여주지 않았지. 게다가 자연국경 대신 1792년 국경을 들먹인 건 일부러 나를 도발하기 위함인가?’
나폴레옹이 머리를 움켜쥐며 고민하고 있을 즈음.
탈레랑이 진지하게 조언을 올렸다.
“사실 표현이 거칠어서 그렇지, 니콜라이 황태자의 제안은 제법 현실성이 있습니다. 국경선을 어떻게 그을지는 나중에 가서 상의하면 될 문제고요.”
“그래서 녀석의 말대로 국토를 내어주고 후일을 기약하자는 것이냐?”
“그건 폐하께서 판단하실 문제지요. 하지만 제안을 받아들이려면 훼방꾼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적기입니다.”
탈레랑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만약 각국의 군주들이 파리에 도착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기 시작한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질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무력하게 성문의 열쇠를 넘겨준다면 다시는 이 땅을 밟을 수 없으리라.’
한참을 궁리하던 나폴레옹은 결국 자존심과 실리 모두 놓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백성들과 함께 파리를 끝까지 수호하겠다. 혁명의 불씨와 애국의 마음을 품은 프랑스인이라면 외적의 침입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리니! 이번 전투는 역사의 위대한 장면으로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파리 외곽을 에워싼 동맹군과 프랑스군 사이의 교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5.
나폴레옹이 협상의 결렬을 알리며 전투를 개시했을 때.
동맹군 수뇌부들이 자리한 막사에서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겁니까! 게다가 추가적인 협상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니. 혹여나 나폴레옹과 작당 모의를 한 건 아니겠지요?”
일부러 과격한 발언을 쏟아낸 슈바르첸베르크에 이어 전투를 희망하던 블뤼허마저 얼굴을 찌푸렸다.
“이럴 거면 진즉에 저들을 쳤어야지. 괜히 시간만 벌어준 셈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대신 저들의 마음을 달래줄 마법의 말을 꺼냈다.
“우리 러시아군은 이번 전투에서 후방을 담당할 예정이니. 빈자리는 다른 곳에서 채워도 좋다.”
“…..!”
파리 공성전은 이번 전쟁의 끝을 알리는 굉장히 상징적인 전투였다.
어쩌면 나폴레옹에게 직접 항복을 받아내는 영광의 자리가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걸 그냥 양보한다고? 대체 무슨 속셈이지?’
‘허어. 전하께서는 대체……’
어찌나 갑작스러운 발언이었는지 쿠투조프마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러시아는 처음부터 유럽의 평화와 자국의 안녕만을 바라왔네. 전공과 명성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나눠 가지도록.”
처소로 돌아간 뒤.
주변에 누가 있나 두리번거리던 쿠투조프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전하. 나폴레옹과 무슨 얘기를 나누셨길래 군을 후방에 두고자 하십니까?”
“파리 공성전은 프랑스군이 열세긴 하나 격렬한 소모전으로 치러질 것이다. 어차피 이길 전투에 끼어들어 불필요한 희생을 낳는 것보다 좀 더 생산적인 일에 신경 쓰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 말에 쿠투조프는 곧바로 한 가지를 떠올렸다.
“파리의 민심 말입니까?”
“이제 나에 대해서 좀 아는군.”
짧은 시간이었지만 밀도 높게 교류해온 덕분인지 이제는 얼추 손발이 맞아떨어졌다.
내 입가에는 어느새 은은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향하는 비난을 줄이고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끌어내기 위해 마지막까지 싸움을 이어 나갈 테지. 그러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를 메울 수 있는 건 확실히 그들뿐입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먼저 선수를 쳐서 프랑스군을 돕지 못하게 만들어야겠군요.”
“맞다. 그리고 우리는 본토에서부터 나폴레옹을 꺾으면서 이미 수많은 명성을 쌓아왔지. 이제 선진 문명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주민들을 구원하며 야만인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차례다.”
‘한 가지 수로 두 가지 이상의 결과를 노리시다니. 역시 전하는 생각이 참 깊으시구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느낀 쿠투조프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곧 프랑스에 도착하신다고 하니 저는 먼저 마중을 나가보겠습니다. 민병대 3만을 남겨놓을 터이니 파리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사용하십시오.”
“고맙군.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콰아앙! 콰앙!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스웨덴이 구축한 포대에서 끊임없이 폭음이 울리는 동안.
나는 세르게이와 쿠즈민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각자 1만씩 데리고 다니면서 주민들을 보호해라. 만약 분쟁이 발생한다면 되도록 평화적으로 해결하되 불가피한 경우에는 내 이름을 팔도록.”
쿠투조프로부터 내 의도를 전해 들은 두 사람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동맹군이 민간인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겠습니다!”
“붙여주신 장교들을 활용해 민심도 다독여보겠습니다!”
처음 그들이 파리 외곽을 돌며 순찰에 나섰을 때.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저기 저거 러시아 제국군의 깃발이 아닌가.”
“북방의 야만인들이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설마 남은 식량마저 빼앗으려는 건가?”
가뜩이나 징집이니 징발이니 해서 인력 부족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주민들이었다.
그런데 이 근방에 수십만 대군이 쫙 깔려버리니 어디 도망가지도 못하고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한데 러시아군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마을 전체를 감싸듯 움직이던 그들은 다른 복색의 병사들이 접근해올 때마다 단호하게 밀쳐냈다.
“프로이센군? 여기는 무슨 일로 왔지?”
“아이,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래. 너희들만 재미 보지 말고 좀 비켜봐.”
“이곳은 약탈이 금지되어있다. 속히 물러가라.”
“아, 거참 빡빡하게 구네! 여기 지휘관 누구야? 나랑 한판 붙어볼…… 어어!”
본래 농노 출신인 민병대 병사들은 어떠한 타협도 없이 곧바로 총을 들이밀었다.
허둥지둥 도망가는 약탈미수범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들은 가슴이 절로 벅차올랐다.
‘역시 전하께서는 질적으로 다른 분이셔. 그러니 우리처럼 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거겠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더없는 영광이로다. 전하께 평생토록 충성을 바치겠노라!’
주민들의 모습에 자신과 친족의 모습을 투영시켰기 때문일까.
분명 피곤하고 귀찮은 일일 텐데도 그들은 서로 교대까지 해가며 착실하게 마을을 수호했다.
여기에 프랑스어에 능숙한 장교 몇몇은 주민들과 접촉을 시도하여 친분을 쌓기도 했다.
“여기 남는 식량을 좀 가져왔네. 뭐 따로 필요한 건 없나?”
“아이고. 감사합니다. 덕분에 너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마을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얘기하게. 우리에게 남는 건 힘밖에 없으니.”
“저기, 그렇다면 혹시 포탄에 무너진 다리도 복구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바로 공병대를 호출하겠네.”
이런 일이 하나둘씩 쌓이다 보니 러시아에 대한 여론과 인식이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파리 주변 지역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무렵.
성에서 뛰쳐나온 장교들은 제각기 사명을 품고 주민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파리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한가롭게 뭣들 하는 게야?”
“돌만 나를 수 있다면 상관없다. 어서 성으로 들어와라!”
하지만 놀랍게도 주민들은 아무런 호응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노인들은 역정을 내기까지 했다.
“이놈! 내 아들에 손주까지 몽땅 다 데려가지 않았더냐! 그런데 기어이 내 손에도 무기를 들려주려는 것이냐?”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은밀히 잠입한 그들을 러시아군에 신고하기까지 했다.
포로로 잡힌 젊은 장교 하나는 비통한 심정에 눈물을 흘렸다.
‘아. 모든 게 끝났구나.’
지금껏 프랑스에 수많은 위기가 닥쳤으나 번번이 이겨냈던 건 모두 나폴레옹이라는 영웅 덕분이었다.
그의 이름 아래 프랑스 신민들은 똘똘 뭉치며 가혹한 세금과 끝없는 징집 명령조차 꿋꿋하게 견뎌왔다.
‘하지만 이미 주민들의 마음은 폐하를 떠나버렸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눈에 콩깍지가 벗겨지면 서로의 단점이 도드라지기 마련이다.
이건 성 안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청년 장교의 눈에는 어느새 불타오르는 성의 모습이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미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6.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막사 안.
세르게이로부터 보고받던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 며칠 새에 성과가 상당하군.”
“그렇습니다. 이제 성 내부를 제외한 모든 마을의 주민들은 러시아군만 보이면 환호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동시에 나폴레옹은 어떠한 지원 병력도 얻지 못했고요.”
“사고가 터지진 않았고?”
“도중에 몇 번 위기가 닥쳤으나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습니다. 윗선까지 부른다고 하면 알아서 물러가더군요.”
영국으로부터 많고 다양한 지원을 받아놓은 덕분인지 약탈을 시도하는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설령 굶주렸더라도 이번 전쟁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친 러시아군을 대놓고 무시할 순 없었겠지만.
보고를 마친 세르게이는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보아하니 곧 전투가 끝날 것 같던데 슬슬 행사를 준비해야겠지요?”
백년전쟁 이후 수백 년간 함락되지 않은 도시, 파리.
그곳에 점령군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경험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모두가 성대한 행사를 바라고 있으리라.
‘황태자 전하는 물론이고 아마 폐하께서도 굉장히 좋아하시겠지. 모스크바를 빼앗길 뻔한 수모를 이번에 제대로 갚아준 셈이니.’
그런데 뒤이어 들려온 말에 세르게이는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그 전에 나폴레옹부터 만나봐야지. 방해꾼들이 나타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둘 말이 있으니까.”
파리가 점령되고 나면 나폴레옹은 처참하게 몰락하고 만다.
하지만 원 역사에서는 기어이 부활에 성공하여 백일 간의 천하를 누리게 된다.
이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추종자, 잔당을 싹싹 긁어모아 영국 등 러시아에 반감을 지닌 세력을 꺾어놓을 수 있다면.
내게는 오히려 이득이지 않은가?
‘기다려라, 나폴레옹. 네가 활약할 무대는 아직 남아 있으니.’
한때 유럽 전역을 제집처럼 여기던 거인이여.
이제는 좁은 무대에 갇혀 나를 위해 춤을 출 때가 오고야 말았나니.
어느덧 내 눈에는 유럽의 정세를 입맛대로 재편할 기회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