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ve too many Talents RAW novel - chapter (44)
제44화
44화
“오랜만이네요, 한정현 헌터님?”
어쩐지 오늘따라 더욱 능글맞고 음산한 예린의 표정.
저런 얼굴로 저런 느낌을 줄 수 있다니.
그것도 어쩌면 재능의 영역이겠다 싶었다.
정현이 땀을 삐질 흘리면서 대답했다.
어떻게든 빠르게 대화를 끝내기 위한 대답이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제가 테스트를 좀 해야 해서······ 이 문 좀······.”
정현은 어떻게든 문을 닫으려 했으나 이미 낀 발은 요지부동.
“테스트를 해야 하시는구나. 저도 좀 구경하죠. 우리 사이에.”
“우리가 무슨 사인데요!”
“어머,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그렇게 문과 발을 사이에 두고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둘.
먼저 포기한 것은 당연히 정현이었다.
어느 순간 정현은 문을 밀던 힘을 풀고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테스트해야 한다셨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집으로 갈 거예요.”
“엉큼하긴.”
“아니,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컨셉이에요!”
예전에는 귀찮긴 했어도 곤란하게 하진 않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도대체 무슨 비람이 불었단 말인가.
그러나 예린은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고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없습니다. 그런 거.”
“혹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산할 곳을 찾고 있다거나.”
“아니, 그걸 꼭 그렇게 말해야 해요? 오해하잖아요!”
“맞네요, 뭘.”
끙.
정현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한번 말해 봐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면 도와드릴 테니까.”
‘어라?’
생각해 보니 그렇다.
예린이라면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너무나도 꺼림칙해서, 꼭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상황이라면 극구 사양하겠다만 정현은 어디까지나 외통수에 몰린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확실히 할 것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했다.
“먼저, 저는 협회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아직’이라고 하죠.”
“없어요.”
“그러니까, 아직.’
깊은 한숨.
“실은 제가 이제 슬슬 4레벨 게이트에 들어가고 싶은데요. 아시다시피 미등록자라. 받아 주는 데가 없네요.”
“어머~”
이건 잘못 말했다.
정말 잘못 말했다.
저 듣는 것만으로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는 반응은 뭐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예린의 눈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더 노오력 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바쁘신 분을 붙잡았네요. 그럼 이만-”
황급히 몸을 피하려는 정현.
꽉-
그러나 이미 그의 팔목은 단단히 예린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 머리 하나는 작은 여성에게 살포시 손목을 잡힌 설레는 장면이었다.
실상은 전혀 달랐지만.
예린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헌터 협회에 도움을 구하셔야죠.”
“그······ 차 과장님은 5레벨 맞으시죠?”
“네, 안타깝게도 저는 5레벨이죠. 혹시 같이 들어가고 싶어서?”
“절대 사양입니다.”
“‘아직’은 좀 이르긴 하죠.”
내 결코 5레벨 게이트에는 들어가지 않으리라.
적어도 예린의 눈에 띄는 곳에서는 말이다.
정현이 마음속에 굳은 다짐을 남기고 있을 때.
잠시 눈을 위로 굴리며 고민하던 예린이 말했다.
“마침 협회에서 조만간 4레벨 게이트에 들어갈 파티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한번 끼워 달라고 해 볼까요?”
의외로 정상적이고 고마운 제안이었다.
거기다 말하는 걸로 봐선 예린의 직속 직원들도 아닌 것 같았고.
정현은 예린과의 대화치고는 극히 이례적으로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시면 저야 정말 감사하죠!”
“흐응-”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는 예린.
어쩐지 수상했지만 지금 정현은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협회 사람들과 함께한다니 그리 극악한 속내가 숨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대신 저랑 별로 친한 분이 아니라서. 어떻게든 끼워는 드릴 것 같은데 그 뒤는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그럼요! 제가 또 친화력 하면 한친화 아니겠습니까?”
“찐따 모솔인 것 같은데.”
“······.”
“어머, 이건 실수.”
정말 실수였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웃는 예린.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청순하기 그지없는 미소일 수 있겠으나, 정현은 이를 부득부득 갈 수밖에 없었다.
‘저건 노린 거다······ 저건 노린 거야!’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산 건 맞지만 워낙 인생에 치여 살았기 때문 아닌가.
여유만 생긴다면 연애 따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라고 생각하는 정현이었다.
“여하튼 말씀은 전해 둘게요. 지원과 단종우라는 사람힌테서 연락 오면 꼭 받으세요. 끝 번호는 0000.”
“넵! 감사합니다, 차 과장님!”
“별말씀을.”
이제 정말 볼일을 보러 가는지 원래 들어가려던 방으로 향하는 예린.
그런 그녀에게 정현은 깊게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농락까지 당한 꼴이긴 했지만 정현에게 을의 위치란 숨을 쉬듯 익숙했다.
‘내가 A급만 달아 봐라. 아주 그냥, 응?’
물론 표면적인 을과 내면의 복수심은 다른 문제긴 했지만 말이다.
***
생각보다 단종우 과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의 연락은 늦어졌다.
– 010-0000-0000
예린과 만나고 며칠 뒤.
저녁 느지막이 그녀가 알려 주었던 번호로 정현에게 전화가 왔다.
다행히도 여느 때처럼 저녁에는 헌터넷과 헌터 위키를 뒤지며 특성 공부를 하고 있었던 정현이었기에 곧바로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단종우 과장님 맞으시죠?”
– ······어, 네가 한정현이야?
‘뭐지?’
그리고 첫마디 만에 느낌이 왔다.
이 녀석은 박상준을 뛰어넘을 그 이상의 진상이라고.
그러나 정현은 이런 면에선 프로 중의 프로였다.
“네, 과장님! 제가 한정현입니다.”
– 쯧······ 미등록자 주제에 무슨 4레벨 게이트에 들어가겠다고.
“미등록자긴 한데, 제가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 그건 당연한 거고, 인마. 차 과장 그······ 아무튼 하도 부탁을 해서 끼워 주는 거긴 한데 수틀리면 바로 버리고 갈 줄 알아.
‘진짜 미친놈인가?’
게이트에서 동료 헌터를 버리고 가겠다는 말은 당연하게도 금기나 다름없었다.
단순히 도의적인 차원을 떠나 믿을 건 함께 들어간 헌터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런 사람을 믿고 누가 사냥을 하겠나.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이렇게나 가볍게 하다니.
거기다 단종우가 얼마나 힘 있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차예린까지 덩달아 무시하는 뉘앙스 아닌가?
‘차 과장은 까도 내가 까야지.’
줄기차게 예린에게 괴롭힘만 당해 왔던 정현이었으나 이런 진상에게까지 무시당하는 꼴은 참아 주기 힘들었다.
순간 정현의 이마에는 한 줄기 힘줄이 돋아났지만 애써 화를 누르는 데 성공한 그였다.
“아······ 물론 그렇습니다. 누 안 끼치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 그래. 뭐 아무튼 위치랑 파티원 정보는 내 부하 직원이 보낼 거야. 싹 다 외워 와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대답 잘하는 건 하나는 맘에 드네, 새X. 게이트 말고 직장에서 봤으면 좋을 텐데. 나만 한 상사가 또 없거든?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닌 게 아니고서야 밑에 직원도 그렇게 생각 하기는 힘들 텐데.
종우가 말한 ‘부하 직원’이라는 사람이 순간 불쌍해진 정현이었으나, 사회생활이 그렇다면 뭐 같아도 참아야지 어쩌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전화를 끊은 후.
협회 지원과 이메일로 받은 게이트 예약 정보가 모레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제아무리 정현이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거 진짜 미친 새X 아니야?”
예린이 조만간 사냥을 갈 예정이라곤 했지만 며칠 동안 연락이 없기에 일정이 넉넉한 줄 알았는데 모레, 그것도 저녁이 다 되어서야 연락을 하다니.
그나마 아예 그가 모르는 게이트가 아니라는 점이 위안거리라면 위안거리였다.
‘타단 오크의 파괴된 야영지’.
4레벨 게이트로는 아주 정석적이고 평이한 난이도로 꼽히는 곳이다.
가끔 대규모로 몰려다니는 무리만 건드리지 않으면 제대로 된 스펙을 갖춘 파티에게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정현에게 다가오는 감회가 조금 색다른 곳이기도 했다.
‘드디어 타단 오크까지 왔구나.’
우선 그가 입고 있는 장비부터가 타단 오크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지 않은가.
사실 이 정도 수준 아래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아주 단순한 재료나 공산품 용도로 소모될 뿐, 장비로 제작되지는 않는다.
거기다 오크들은 일반적인 작업장에서 만져 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몬스터라고 할 수 있었다.
전체 레벨로 보면 ‘고작’ 4레벨일 뿐인데도 외부의 시선으로는 그렇지 않다.
달리 말하자면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정현이 드디어 그 정도의 레벨까지 올라왔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래, 일단 발이라도 넣을 수 있다는 게 어디냐.’
4레벨 게이트에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다.
아마 그 기록을 제시하면 이전처럼 무지막지하게 차단을 박지는 않을 테니 다시 사냥을 가기도 수월해질 터.
정현의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생각보다 단종우의 파티는 꽤 호화로웠다.
D등급 4레벨 탱커와 근접 딜러 한 명씩.
C등급 3레벨 힐러가 한 명.
단종우는 마찬가지로 C등급 3레벨의 마법사였다.
특정 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고, 마나 감응 특성올 가지고 있는 마법사.
그리고 정현의 시선이 나머지 한 명에게 향했다.
아직 앳된 얼굴의 남자 한 명이 영 어색한 느낌으로 쭈뼛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B급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그의 이름은 김영훈.
1레벨이긴 하지만 B급의 창술 특성을 보유한 헌터였다.
중거리 전투를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는 데 비해 그 수가 부족한 편이라 꽤나 환영받는 특성이다.
협회 대응팀에 입사했으나 경력이 부족해 여러 부서에서 데리고 다니고 있다고.
등급이 높긴 해도 성격이 유약해 보여 전투를 잘할 수는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만 그래도 B급의 위용이 어디 가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사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거기, 한정현?”
씨도 아니고 님도 아니고 헌터도 아닌, 그냥 한정현.
운동량이 많은 헌터치곤 살도 꽤나 붙어 보기 싫은 단종우가 고깝게 불러 대기까지 하니 달가울 턱이 없었다.
“네?”
“상사가 부를 때는 ‘네?’가 아니라 ‘부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해야지. 내가 이런 거까지 가르쳐 줘야 하나?”
거기다 심각한 꼰대였다.
첫 통화에서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요즘 세상에 저렇게까지 전형적인 꼰대가 남아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지.’
거기다 정현이 그의 부하 직원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상사 대우를 바라는 종우였다.
“여하튼······ 쯧, 어찌어찌 같이 들어가는 건 들어가는 건데 말야. 설마 진짜 같이 사냥할 생각으로 온 건 아니겠지?”
“그게 무슨······.”
“아, 그냥 짐꾼 노릇이나 하면서 뒤에서 놀고 있으라고! 눈치가 없어, 새X가.”
왜 순순히 예린이 자신을 다른 파티에 소개시켜 준다고 했겠는가.
어쩌면 정현은 그녀가 이상하리만치 좋은 제안을 할 때부터 의심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럼 배분은-”
“배분 같은 소리 하네. 짐꾼이 배분받게 돼 있나? 일당으로 100만 원 쳐줄게. 미등록자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건 진짜 심의 불가의 X새끼가 따로 없었다.
정현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아도 다른 직원들은 전부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싫다는 듯 황급히 시선을 피할 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정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더럽고 치사해도 최소한 4레벨 게이트 입장 기록은 챙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결코 순순히 넘어가 주지는 않으리라.
“알겠습니다······.”
“자, 그럼 얘기 끝났고. 담배 한 데 피우고 올 테니까 할 얘기들 있으면 하고 있으라고.”
헌터가 담배까지?
이 정도면 정말 범죄만 안 저질렀다 뿐이지 다른 의미로 빌런 그 자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종우가 떠나가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인 파티의 분위기.
그때, 이수아라는 이름의 근접 딜러가 정현에게 말을 붙였다.
“고생 많으셨어요. 과장님 진짜 장난 아닌데.”
“아뇨······ 뭐. 미등록자니까요. 그럴 수도 있죠.”
“뭘 그럴 수도 있어요? 누가 봐도 종우 새X- 아 죄송합니다. 이제 습관이 돼서.”
정현이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속이 시원하기도 했고.
그런 호칭 정도로는 해소될 수 없는 직장인의 애환이 절로 느껴졌달까.
원래 직장생활의 꽃은 상사 뒷담화라고 하지 않던가.
거기다 그 상사가 종우 같은 사람이었으니 두말하면 입 아프겠지.
처음에는 종우가 나갔던 문 쪽의 눈치를 살피던 수아였으나 이제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린 듯 이야기가 줄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아무리 종우 새X라도 저 정도까지는 아닌데, 차예린 과장님 소개로 들어오셨다면서요? 그래서 더 그런 거예요.”
“그게 무슨 얘기예요?”
그리고 그 화두가 정현으로서도 꽤 흥미로웠다.
얘기를 받은 것은 이야기를 가만 듣고만 있던 C등급 힐러 정대윤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기존 종우와 함께 사냥을 다니던 이들은 물론, 외부인인 영훈과 정현까지 순식간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종우의 뒷담화로 비로소 하나 된 파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