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Obtained a Mythic Item RAW novel - Chapter 347
347화 알프헤임(6)
훙! 훙!
어스름이 내려앉은 밤.
하늘을 수놓은 별 사이로 언뜻 비치는 엘프의 검무(劍舞)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앞의 인간을 잡아먹을 듯 몰아세우며 휘둘러지는 검.
그것은 조각된 예술품을 보는 것처럼 정제돼 있고, 또 아름다웠다. 아마 검에 조예가 없는 이가 봤다면 틀림없이 엘프 쪽이 이기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하나 보이는 모습과 달리, 연무장에는 오직 바람을 베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현이 라스의 모든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엘프들을 총괄하는 근위대장이라고는 해도, 라스는 해방 2단계에 그치는 수준이다. 재현에게 닿기엔 미약하다.
재현도 라스도 이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입에 담지는 않았다.
둘은 그저 서로 검을 나눌 뿐이었다.
이들은 마치 서로의 사이에 불필요한 대화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검을 부딪쳤고, 비틀어 흘려냈다.
“허억… 허억….”
라스는 독기가 잔뜩 어린 얼굴로 재현을 보았다. 흐릿해진 동공 사이로 그의 눈이 언뜻 스쳐 보였다.
사실 재현은 자신의 검을 거의 쳐내지 않고 흘려내거나 피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공격은 하나도 적중하지 않은 것이고.
‘허억… 허억….’
눈앞이 온통 붉어진다.
압도적인 패배.
그것은 라스에게 생경한 경험이었다.
물론, 알프헤임의 상황이 지금과 같이 최악이 되기 전에는 자신보다 강한 이들이 꽤 있긴 했다. 허나 그렇다고는 해도 소수였다.
2단계는커녕, 격을 얻은 엘프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아홉 세계 어디에도. 심지어 드래곤이라고 해도, 격을 얻은 존재가 넘쳐나는 곳은 없었다. 라스는 그런 의미에서는 충분한 포식자였다.
패배라는 단어가 익숙지 않은 강자였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왜….”
라스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어떻게 너는 그렇게나 강한 거냐! 저열하고 더러운… 인간 주제에!”
채애앵!
라스의 그저 분노와 살의만이 담겨 있는 검. 재현은 이번만큼은 이를 흘리거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받아쳤다.
크읍, 라스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며 그의 발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지익.
‘지지 않겠다. 인간에게만큼은… 절대로!’
라스는 밀려나던 검을 억지로 수직으로 세워 재현을 밀어붙이려 했다.
허나 재현은 그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라스는 두 손으로 전력을 다해 검을 밀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의미는 없었다.
그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재현의 한 쪽 손이 주머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였다.
‘한 손으로… 이 정도의 힘을 냈다는 말인가… 제길!’
그 순간, 지독한 열패감 속에서 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을 미워한다고 들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아마 에인헤랴르 때문이겠지.”
재현의 말에 라스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의 몸에서 격이 한계까지 해방되었다. 재현은 전혀 겁먹지 않으며 검에 힘을 주었다.
채앵!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인간 따위가 그 사건을 입에 담지 마라!”
“네 아버지가 에인헤랴르에게 살해당했다고?”
허나 재현은 멋대로 그렇게 지껄였다. 라스의 표정이 싸늘히 굳었다.
재현의 말. 아버지.
그것은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끊어놓을 만한 것이었다.
츠츠츠츠츠!
라스가 몸에 잔존하는 모든 마력을 폭발시키며 재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 간의 싸움은 금세 결판이 났다.
라스의 시야가 한 차례 공중을 맴돈 뒤 바닥에 처박혀 하늘 위를 향했다. 찰나의 순간, 재현은 그야말로 격이 다른 전투를 보여주었다.
상대의 공격을 쳐내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이마를 짓눌러 넘어뜨린 것이다.
재현은 검을 역소환 하며 태연히 말했다.
“별이라도 좀 보고 머리 식혀라.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무심한 말투로 말하며, 재현은 조금 전 자신을 찾아왔던 루이나가 했던 말.
그리고 알프헤임의 선대 왕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것은 이전 계층과 마찬가지로 흔한 어느 비극에 관한 이야기였다.
* * *
아아,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듣고 비웃지 말아 주세요.
제가 마음이 좀 여리거든요.
아버지는 선한 군주였어요.
알프헤임의 역대 군주 중에서도 성군으로 꼽히며 많은 엘프는 물론, 다른 종족의 사랑을 받았죠.
그래요. 인간들에게도 사랑받았어요.
당시, 인간들은 먹을 것이 없고 가난해서 많은 고생을 했어요.
오딘은 인간들에게 많은 곡물과 황금을 요구했고. 황금왕이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모두 수포가 되고 말았죠.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인간과 긴밀한 교류를 해왔어요. 인간들 역시 그런 아버지를 잘 따랐죠.
그런데 어느 날이었어요. 비극이 일어난 것은….
라그나로크.
전쟁이 시작된 거죠.
오딘은 아홉 세계 모두를 손에 넣을 것이라 말하며, 세계에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음을 천명했어요. 당연하게도 엘프를 비롯한 갖은 종족들은 그에 대항했고요.
하지만 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이가 있었어요.
가장 나약한 종족… 인간이었죠.
그들은 오딘의 손아귀에 놀아나 아스가르드의 아래 영혼을 빼앗기고, 에인헤랴르. 오딘의 군대가 되어 전장을 휩쓸었어요.
새로운 힘을 얻은 인간들. 그러니까 에인헤랴르들은 아홉 세계 각지를 공격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복속시켰죠.
그리고 이때 저희 아버지이자 당시 왕이셨던 글람은… 인간들을 설득하기 위해 맨몸으로 전장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고 마셨어요.
알프헤임은 왕의 죽음에 비통해했고, 매일같이 슬픔에 잠긴 노래가 곳곳에서 들려왔어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오빠는 폐인이 되었어요.
몇 날 며칠을 계속 방안에 틀어박혔고, 인간을 저주하는 데 시간을 보냈죠.
실은 그들이 오딘의 손아귀에 놀아나 그렇게 되었다는 걸 알았음에도, 오빠는 그게 그들의 나약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죠.
그게 오빠의 혐오감을 만들었어요.
오빠는 원래 나쁜 엘프가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께는 무례를 저질렀지만, 절대 그런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보증할게요. 그저… 오빠는.
그저 외로운 거예요.
아버지를 잃고, 믿었던 인간을 잃어버렸으니까요.
그렇게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그저… 그것뿐이에요.
흔한 이야기죠.
전장에서는 하물며 더더욱.
하지만 이 흔한 이야기가, 저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어요.
* * *
별을 보던 두 사람.
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식상하지만 이해가 가는 이유긴 하다. 네가 인간을 미워하는 것. 그리고 나한테 개같이 굴었던 것도 말이야.”
“그것참 고맙네.”
라스가 빈정거렸지만, 재현은 익숙하다는 듯 픽 웃었다.
“야.”
“왜.”
“새끼가 너는 그 말투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더럽게 띠겁네.”
“하… 그래서 뭔데.”
라스가 한숨을 쉬자 재현이 이었다.
“하나만 묻자.”
재현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너 만약… 전쟁에서 네 사람 하나만 살릴 수 있다고 하면 누굴 살릴래?”
재현의 물음은 선뜻 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애초에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하나뿐인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몇이나 소중한 존재가 있고, 그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오딘을 비롯한 에시르 신좌들이 적으로서 이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견디거나 싸우는 것뿐.
이런 상황에서 소중한 것을 하나만 선택하고 나머지를 버려라?
그것은 비겁하게 도망치는 행위였다.
때문에 라스는 재현의 말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모든 엘프를 구할 거다.”
“모두를 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너도 알고 있잖아.”
재현의 불시에 떨어진 말은 라스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라스도 내심 알고 있었다. 자신의 꿈은 그저 이상이다.
결국 누군가는 죽는다.
그게 전쟁이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죽어야 할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런 일을 자신이 견딜 수 있나?
자신이 선택할 수 있나?
그런 생각에 입술을 무는데, 별안간 재현이 비웃으며 말했다.
“하긴, 너 정도 실력이면 한 사람도 못 구하겠지만.”
“뭐야? 이게 말 다 했냐? 그러는 너는…!”
“하나 정도는 구할 수 있어. 나는.”
재현은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라스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을 확실히 구할 수 있다는 말.
그것은 라스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멋지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지킬 힘.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때문에 라스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보다 강하다. 확실히.”
“네가 너무 약한 거겠지.”
“아버지 이야기는 루이나에게 들었나?”
“그래. 오빠를 더럽게 아끼더라. 나도 그런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네.”
재현의 말에 라스가 잠시 웃었다. 평범하고도 드문 미소였다.
“야. 말도 마라. 걔가 요조숙녀처럼 보여도 얼마나 사고를 많이 치는데? 전에는 어머니 몰래 술을 마시다 걸려서 딸꾹질하다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재현은 그렇게 여동생의 이야기를 하는 라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라스는 한참이나 여동생과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가 무릎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네가 물었지. 한 사람을 구한다면 누구를 구할 거냐고.”
“그래.”
“내가 아니면 누구여도 좋아. 그게 어머니든, 여동생이든.”
“희생적이네. 보기와 다르게.”
“그래. 비웃어라. 그래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아버지를 잃고, 여동생도 어머니도 상심이 크셨으니까.
나라도 도움이 돼야 했었는데… 뭐 보다시피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고.”
“너는 몰랐겠지만, 네 가장 약한 점이 그거 같은데.”
“뭐?”
재현이 등을 바닥에 기대 누웠다.
“패배 의식에 찌들어 있는 거 말이야. 아인델, 그리고 루이나의 반만 닮아봐라. 미래를 보고 가야지. 지금 닥친 뭣 같은 현실이 아니라.”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약하니까.”
그래. 그렇지.
라스는 그렇게 되뇐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좀 더 상대해 줘야겠어.”
“언제까지?”
“적어도 동이 틀 때까지.”
“얼마든지. 근데 졌다고 징징 짜진 말고.”
재현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이 다시 연무장에 일어나 대치했다.
재현이 발뭉을 제작해 손에 쥐었다. 달빛이 어스름히 빛을 뿜고, 검 끝에 잠시 매달렸다가, 다시 빛을 뿜었다.
서로의 검이 카앙 하는 소리와 함께 빗겨 쳐진다.
바닥에 닿는 육중한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나 재현은 그 순간에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되뇌고 있었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재현과 서이나를 제외한 모두는 원래 이곳에서 죽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