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97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197화
197
피가 붉었다.
가슴을 관통한 칼날은 차가웠고, 또 서늘했다.
날을 타고 흐르는 피는 붉었고, 또 붉었다.
—너는 누구……!
—아아, 우리의 신이시여……!
—보, 보스으으으……!
귀에 이는 소리들이 희미하다.
마치 멀리서 외치는 것처럼, 꿈결에 스미는 목소리처럼 작고 어렴풋했다.
“………….”
쿨럭.
불가항력으로 새어나온 기침에 피가 섞여 있다.
피가 붉었다.
—털썩.
무릎이 굽어졌다.
피가 붉다.
시야가 하얘졌다.
돌연 명암이라는 개념이 망가진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희게 변했다. 그리고 내 고개는 아래로.
점점 더 아래로.
떨어졌다.
“………….”
이것이 죽음인가.
이것이 죽는다는 걸까.
나름 몇 번 죽을 위기를 겪긴 했었다만,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죽음이 다가온 적이 있던가.
—나는 정말로 죽는 걸까.
옅은 감상에 빠지며,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저주가 당신의 영혼을 옭아맵니다.]내 의식은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었다.
‘설마, 그것인가…….’
꽤나 오래전, 샤프란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내 주전 마법을 찾기 위해 오웰름의 마석에게 도움을 구했던 적이 있다.
그때 녀석은 말했다.
―네 재능은 현존하는 계통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아주 오래된 저주에 근원을 두고 있지.
오래된 저주.
―혈마술(血魔術)이라고도 하는데, 새파란 새내기가 들어는 봤을지 모르겠군.
마력이라는 것이 발견되고, 마법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 피와 제물을 바쳐 부리던 마귀의 술법이라 하여 마술.
그리고 그 안에서도 생명을 깎아 부리는 금기(禁忌)가 바로 혈마술.
‘……이것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군. 파마의 성흔을 지닌 자가, 혈마술에 가장 큰 재능을 갖고 있다니.’
의식은 여전히 흐릿하다.
몸은 당연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수면제를 한 알 삼킨 듯 조금만 방심하면 모든 것을 놔버릴 것 같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 정신력이, 거기서 비롯되는 악과 깡이 어떻게든 나를 붙잡고 있었다.
‘제길. 족히 20년의 수명은 깎아 먹었을 텐데,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해줘야지…….’
만일 내 수명이 50살 정도뿐이 안 된다면 30살 즈음에 돌연사할 수도 있는 패널티다.
그 정도 희생을 치렀다면 최소한 움직이게 해줘야 수지가 맞을 텐데.
‘조금만 더 버티면 어느 정도 회복이 돼서 움직일 수도 있을 거다.’
‘어쨌든 죽지 않고 살았으니 괜찮다. 오히려 이건 호재이기도 하다.’
‘베디비어가 데려온 근위대에 암살자가 있었으니, 이후의 협상에서 더 주도권을 갖고 밀어붙일 수 있을 터.’
작은 헤프닝이었고, 충분히 수습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예정된 파멸이 당신을 응시합니다.]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와 함께,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모두…… 죽어버려…….」
그것은,
「인간 따위…… 모두 죽어버려어어어어……!!」
수습할 수 없는 파멸의 전주처럼.
[종언을 고하는 묵시룡(默示龍)이 잠에서 깨어납니다.]내 앞에 나타났다.
* * *
요루아의 외침 한마디에 일어난 기파가 세계를 뒤틀었다.
근처에 있던 근위대는 눈과 귀에서 피를 흘리며 즉사했고, 전시용으로 구축되었던 저택의 결계가 그에 반응해 작동했다.
그리고 충격 대부분을 받아낸 베디비어도 무사하진 못했다.
“……이런.”
감히 세계의 정점을 논하는 초월자조차 내상을 면할 순 없었는지 입에서 피가 흘렀다.
더 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쿠구구구구구……!
저택을 감싸는 결계 너머 하늘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그곳에 검은 먹구름이 생겨나며 붉은 천둥이 울리기 시작한다.
‘멸망의 징조라며 사이비들이 판을 치겠군.’
원래는 신들의 몰락 에피소드에서 보여야 할 현상이었다.
대신전들의 위세가 줄고, 멸망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미치광이들이 날뛰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어야 하는 일인데.
‘정말로 묵시룡이 깨어났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신들의 몰락은 후반부 에피소드이고, 묵시룡은 거기서도 최종 보스에 해당한다.
아무런 대비가 안 된 지금, 그것이 등장한다면…… 일의 수습이고 자시고 나부터가 살아남을 수 없다.
‘분명 그래야 할 진데…….’
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모두…… 죽어버려어어어어……!!」
용의 본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검은 마력이 가려 요루아의 모습이 보이진 않았다만, 적어도 용이라고 여길 만한 거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묵시룡의 등장한 것치고, 그 여파가 크지 않다.’
본래에는 등장과 함께 제도 일부를 소멸시켜야 정상이거늘, 지금은 아스트레이 저택의 결계도 깨트리지 못했다.
신들의 몰락이 일어날 시점이 아니라서 그런 것인가. 혹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 조건이 덜 충족된 것인가.
미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내 나름 이런저런 가정을 세운다.
그러던 도중,
—턱.
가녀린 손이 나를 들어 올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탈출합니다, 류리크 님.”
리아.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며, 마치 바람이 앉았다가 지나가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동시에 그녀의 손이 우악스럽게 내 입으로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엘릭서의 힘이 당신의 몸을 감쌉니다.] [체력이 최대치로 회복됩니다.] [모든 부상이 치료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엘릭서의 기적으로 빈사에 빠졌던 몸이 단숨에 회복되었다.
나는 혼란과 놀람이 뒤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다만 이 자세가 공주님 안기라서 기분이 참 묘했다.
“리아, 자네…….”
“앞으로 평생, 제 책상에 나브릭스 홍차를 올려두셔야 할 겁니다.”
그거 혹시 평생 함께하자는 고백 아니냐, 농지거리를 던지려는 찰나.
리아의 손이 움직이더니 눈앞에 또 다른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쉬오크의 모래시계가 발동합니다.] [시공의 저편으로 이동합니다.]리아와 내 몸이 희미해지더니, 어딘가 투명한 형태로 허공을 부유한다.
“공간 마법의 정수를 담은 아티팩트입니다. 이 공간에 있되, 이 공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그런 마법이지요.”
나도 알고 있다.
최상급 아티팩트로 유명한 아이템이거든.
“갑작스레 별게 다 튀어나오는군.”
“소인의 장기랄 것은 유능함뿐이므로.”
원래부터 제 정체를 드러내고는 있었다만, 엘릭서에 이어 아쉬오크의 모래시계라니.
리아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움직인 적이 있었던가.
나는 머릿속으로 복잡한 주판을 튕기며 확인 사항들을 정리한다.
“시종들은 괜찮은가.”
“모두 무사히 워프게이트를 통해 탈출했습니다.”
“그거 참 다행…… 잠깐. 그 워프게이트, 일회성이지 않던가?”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그러면 자네와 나는 어찌하고?”
리아가 태연하게 말한다.
“류리크 님께서는 이곳에 남아 일을 해결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농담이지?”
“제가 농담하자고 엘릭서를 부었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지상을 내려다본다.
—콰아앙!
—쾅! 쾅! 콰앙!
거긴 이미 괴수 대전이나 다름없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잠깐 버티나 싶었던 저택의 결계는 종잇장처럼 찢어졌고, 베디비어는 전투의 여파로 도심이 휩쓸릴까 요루아의 공격을 온전히 받아내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근위대가 전멸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책임을 지셔야지요.”
“책임이라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는 억울하게 휘말렸다. 죄가 없었다.
요루아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헌데 갑자기 책임이라는 말이 나오니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리아는 말한다.
“당신은 정말로…… 이 일에 책임이 없으십니까?”
* * *
베디비어가 말한다.
“그 정도로 해라. 요루아 로스월드.”
입가에 흘리던 피는 멎었지만.
호흡은 불규칙하고, 검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묵시룡의 상태가 온전치 않음에도 베디비어는 쉽사리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이 이상 일을 벌인다면 류리크가 뭐라 한들, 네 목숨을 장담할 수 없…… 큭!”
말로서 시간을 벌어보려 했지만, 상대는 이미 이지를 잃어버린 듯 공허한 눈으로 공격할 뿐이었다.
「처음…… 이었다.」
베디비어의 검을 피하며, 번개 같은 검보랏빛 마력이 그의 상체로 쏟아진다.
「나를 나로서 좋아해 준 사람은…… 보스가 처음이었다.」
카직! 카지직!
그을리는 번개에 베디비어의 제복이 점점 찢어지기 시작한다.
제국에서도 마스터피스로 손꼽힐 베디비어의 무장이 소모되는 것이었다.
「엄마는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나를 300리브라에 팔았다.」
요루아의 맹공이 이어진다.
베디비어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친다.
“뭐냐! 설마 네 불행한 삶 따위를 동정해달라는 말이냐! 허면 일단 멈추고 얘기를……!”
하지만 요루아의 말은, 결코 베디비어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로스월드에 입양되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 실험을 당했다.」
그건 그저 독백(獨白)에 불과했다.
「배를 가르고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이상한 약을 먹었다. 실험이라면서 계속 무언가를 내 몸에 집어넣었다.」
「추웠다. 아팠다. 많이 아팠다. 하지만 참았다. 참고 또 참았다.」
자기 스스로에게 말할 뿐인, 그런 독백.
「어제도 참고, 오늘도 참고, 내일도 참았다.」
「참지 않으면 버려질 테니까. 참고 또 참았다.」
「실험이 끝난 뒤에 로스월드는 실망했다. 내가 보잘것없다고 실망했다.」
「그래서 나는 노력했다. 더 마법을 잘 쓰기 위해. 유일하게 날 믿어주는 아버지께 인정받기 위해.」
「마침내 나는 인정 받았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해주었다.」
「하지만 그건 나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건, 인간 요루아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건, 쓸만한 실험체 요루아였다.」
「나는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결코 괜찮은 게 아니었다. 충분한 게 아니었다.」
「결국에 요루아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말이었으니까.」
참으로 간단하게, 고작해야 백 마디도 되지 않는 말로 인간의 일생이 축약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단순히 ‘아프다’로 묶어낸 말에는 얼마나 큰 상처와 기나긴 괴로움이 있었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났다.」
순간 숨이 막힐듯했다.
가슴이 먹먹해졌고,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나를 도와주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나를 도와주었다.」
「곤경에 빠진 나를 도와주었고,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었다.」
「남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내가 농땡이를 피워도 나무라지 않았다.」
「남자는 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었다.」
「남자는 나를 위해 모든 걸 걸었다. 버려버리면 그만일 텐데, 결코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남자는 나를 안아주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
「내가 나로서 사랑받는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실험체가 아닌, 인간으로 사랑받는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걸.」
그건 사랑을 가르치지 않은 대가였다.
요루아라는 인간에게, 그 삶의 모든 순간이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녀석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은 대가.
「그런데.」
「너희가 그 행복을 부쉈어.」
「내 삶에 유일했던 행복을. 내 삶에 처음이었던 그 순간을. 내 삶에 단 하나뿐인 그 사람을.」
「너희가. 감히. 감히! 감히이이이……!!」
폭주하듯 쏟아지는 마력에 베디비어의 몸이 튕겨 나갔다.
참아내던 그의 입에서 처절한 각혈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요루아는 그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다.
그의 눈은 공허하게.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모두 죽어버려.」
리아가 말한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그녀의 눈빛에서 이미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가 느껴졌다.
그건 이미 과거에 내게 했던 경고였다.
—당신은 평범하게 잘살고 있는 이에게 손을 건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가장 절박한 인간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뒤가 없고, 앞으로는 단애뿐이 없는 이에게.
—혹자들은 그것을 사소한 도움이 아니라, 구원(救援)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
이것은 내가 만든 죄(罪)였다.
“당신께선, 정말로 이 일에 책임이 없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