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uck at the gate alone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수목원.
과한 충성심은 의심받는다.
감언이설을 내놓는 간신들은 권력자의 호감을 얻기 쉽지만, 그래도 나라가 유지될 수 있는 건 백성과 황제에게 진심을 다하는 충신들의 바른 눈이 간신들의 사탕발림을 노려보고 있어서다.
황제는 수확한 감자를 몽땅 바칠 테니 나누는 건 폐하가 하시라는 내 퍼포먼스에 감격했지만, 난 이 이벤트를 간신의 교언에 불과하다 치부할 충신이 분명히 나올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반발이 없었다.
좀 의외였다.
누구라도 튀어나와야 했다.
대신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난 대신들 중 누구도 나와 안토니 왕자를 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많은 대신들과 군인들은 나라의 운영과 아무 상관도 없는, 미식과 촌구석 속국 왕자의 사탕발림에 빠진 황제를 한심함과 분노를 담아 노려보고 있었다.
이해가 간다.
연이어 일어났던 반란에 대한 강력한 진압과 대규모로 축성 중인 새 황성 때문일 것이다.
제국의 불만이 팽배하다 듣긴 했는데, 내 생각 이상으로 골이 깊어진 모양이었다.
황제와 귀족들의 반목이 유리한지 불리한지가 헷갈렸다.
다만, 확실한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제국 귀족들의 입장에서 레몽드는 가치 없고, 관심없는 땅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일개 소국의 왕자외 귀족이 눈앞에서 황제를 현혹하고 있는데도 오로지 황제만을 노려보는 것에서 확신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레몽드는 제후국이었지만, 국력이 형편없었다.
반숙란이나 닭튀김 같이 대단한 요리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제국의 생산력에 도움이 될 만큼 많은 소출이 나지도 못한다.
황제의 입맛이나 맞춰주는 쓸데없는 작은 나라가 레몽드였다.
하지만 그런 작은 나라였기에, 황제를 온전히 믿고 황제를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는 우리의 아부가 오히려 잘 먹혀들었다.
의심조차 살 위험 없이 알아서 조아리는 레몽드는 요 근래 깐깐한 제국 귀족들과 비교되어 더욱 황제의 기분을 기껍게 했다.
“안토니, 사이먼. 기왕 온 김에 점심을 먹고 가거라.”
“네. 폐하. 폐하, 혹시 제가 주방장을 좀 부려도 되올런지요.”
“주방장을? 혹시 이번에도 오늘 가져온 이 감자라는 작물로 반숙란이나 닭튀김 같이 뛰어난 요리를 개발해 온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드워프들은 이 감자를 그냥 삶아서 소금에 찍어 먹으면 맛있다고 했습니다만, 그냥 가져올 수는 없어서요.”
“그냥 가져올 수는 없다니?”
“정성과 노력을 쏟고 싶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이젠 저희 레몽드 왕실과 가족이 되셨으니까요.”
감히 황제를 소국과 같은 자리에 놓는 무엄한 소리다.
하지만, 황제는 내 말에 껄껄하고 크게 웃었다.
“그렇지. 안토니는 내 사위가 될 것이고, 사이먼 넌 안토니의 제부가 될 테니 나완 사돈지간이 될 것이 아니냐. 네 말이 맞다. 우린 이제 가족이지.”
난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너무나 쉽게 아부에 넘어가는 황제가 한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러면서 이 정도로 황제를 컨트롤 할 수만 있으면 제국을 복속해서 귀찮은 제국 백성 전체를 떠안기보다 제국을 식민지처럼 조종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난 그걸 이번 7명의 천벌 사건으로 여실히 깨달았다.
판게모니아의 미국 대륙에 새 나라를 건설할 수만 있다면. 수많은 자원과 풍요로운 대지를 레몽드가 단독으로 개발할 수 있게 된다.
그럼 황제가 어떻게 살든 황제의 마음대로 살라고 하면서, 제국에서 금이나 보석, 마법책 같은 거나 야금야금 빼먹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레몽드의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훨씬 이익이었다.
뭐,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긴 했다.
탄압과 압제에 대한 응징 없는 화해와 용서는 언제가 또 다른 분란을 만든다.
단죄가 바른 역사를 만드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난 황실의 주방으로 가서 두 가지 요리를 만들었다. 하나는 그냥 감자를 삶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매시드 포테이토를 만드는 것이었다.
감자조림이나 웨지감자를 만들어볼까도 했지만, 역시 크리미하고 부드러운 식감에 만들기도 엄청나게 간단한 매시드 포테이토가 좋아보였다.
적당히 슴슴한 만큼 향신료를 넣는 대로 맛이 달라지는 것 또한 황제의 입맛을 맞추기에 딱이었다.
그리고, 난 닭튀김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매시드 포테이토의 레시피를 황실의 주방장에게 전수할 생각이었다.
비교적 간단하게 삶은 감자와 매시드 포테이토를 만든 난 식당으로 돌아왔고, 황제와 안토니 왕자, 나란 황녀가 같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초대됐다.
“요리는 완성되었느냐?”
“네. 비교적 간단한 요리인데다, 황실 숙수의 실력이 놀라워서 금방 원하는 맛을 재현할 수 있었사옵니다.”
“기대되는구나.”
곧 성찬이 차려졌지만, 황제와 나란 황녀는 감자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보아하니 내가 오기 전까지도 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이것이 그 드워프들이 먹는 방식인 게고, 이쪽이 레몽드에서 만든 감자요리인 게로구나.”
“그렇사옵니다.”
“시작하자.”
“폐하, 그냥 삶은 것부터 드시옵소서.”
황제는 소금을 살짝 찍어 삶은 감자를 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작물 자체에 달큰한 맛이 있구나. 소금과 잘 어울리기도 하고. 이 감자를 두어개 정도만 먹어도 배가 차겠어. 나란, 네 입맛에는 어떠하냐?”
“확실히 배고픔을 덜기에 더없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작물의 생육기간이 짧고, 키우기 쉽다니 제국에서도 키워볼 만한 작물 같사옵니다.”
확실히 나란 황녀는 덩치와는 다르게 매우 현명했다. 감자의 맛이나 포만감보다 생육기간과 생산량을 고려하는 인식이 농사일을 한 번도 해봤을 리 없는 황녀의 현명함을 돋보이게 했다.
“폐하.”
“그래 말하거라.”
안토니 왕자가 끼어들었다.
“황녀님의 말이 옳습니다만, 2년 정도만 기다려주실 순 없으십니까?”
“2년이라. 무엇을 짐이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냐?”
“감자는 많은 백성들을 구원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감자는 씨앗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오라 수확한 감자를 잘라 씨앗으로 사용해야 하옵니다. 닭처럼 황실에서 소용될 감자만을 올리고, 나머지는 레몽드에서 전량 씨앗으로 쓸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황제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였다.
한 달에 80마리로 시작한 닭의 공출은 2달이 지난 지금 150마리를 보내고 있었다. 만약 시작부터 더 많은 양을 요구했다면, 지금처럼 2배에 가까운 소출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레몽드는 농사를 매우 잘 지었다.
레몽드에서 빼앗아 제국 농장에서 기르는 콩과 닭의 품질은 레몽드의 그것에 비해 형편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몽드산 농작물의 인기는 황실과 제국 고위귀족가를 휩쓸고 있었다.
이는 레몽드가 중세와 비교할 수 없는 현대적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지만, 제국과 황제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레몽드의 실력이 좋겠거니 여길 뿐이었다.
“안토니. 짐이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느냐?”
“무슨 청이든 하시옵소서.”
“레몽드의 농작물을 키우는 방법을 제국에 가르쳐줄 수 있겠느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우리 같은 소국에 가르침을 청하다니, 황제가 이런 식으로 치고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안토니 왕자는 무슨 생각에선지 황제의 청을 매우 선선하게 받아들였다.
“폐하. 레몽드의 농법을 제국의 농부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문제는 레몽드의 농법이 학문에 대한 지식이 없는 무지렁이들에겐 너무 어렵다는 것이옵니다. 학식이 있는 농군들을 보내주시옵소서.”
“그래야지. 내 실은 이 일로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느니라.”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레몽드에선 왕자와 부마가 직접 농사에 나서고 있는 것이 아니냐? 백성과 국왕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있다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난 제국에도 너희와 같은 충성심이 가득한 인재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구나.”
황제의 눈이 안토니 왕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황제는 매시드 포테이토를 맛보고는 우리가 바친 감자 전부를 다시 돌려줬다.
“감자를 내어줄 테니 대신 감자요리를 보내거라. 안토니, 네가 얼마나 농사에 진심이라는 것을 안다. 네 그을린 얼굴과 거친 손만 봐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지. 그래도 사흘에 한 번씩은 궁을 찾거라. 난 널 자주 보고 싶구나.”
사람이 보는 눈은 모두 비슷하다.
내 눈에도 다음 대의 동량으로 보이는 안토니 왕자다.
백성에 대한 진심이 가득한 왕자가 황제의 눈에 들었다.
사랑해마지 않는 자기 딸을 내 준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 * *
“상민아. 다녀올게.”
“네. 오늘도 안젤리나 공주랑 하누아나를 다 데려가시는 거예요?”
“꼬맹이들에게 라면 파티를 해주기로 했어. 가져갈 것도 준비할 것도 많잖냐? 큰일났어. 도곤족 꼬맹이들이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따라다니는데, 하루만 보지 않아도 아이들이 눈에 삼삼하다니까.”
아버지는 식당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마법사 할아버지에게 통역 반지를 대신할 통역 목걸이를 받아낸 아버지는 가장 왕성한 활동량을 자랑하셨다.
사륜 전기 오토바이를 다섯 대나 사서 레몽드와 하와이, 말리의 도곤족 마을에 배치한 뒤,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다니셨다.
마나석 충전 마법진을 달아 연료가 필요 없어진 사륜 오토바이는 레몽드를 바꿨다.
속도와 안정성, 거기다 말과 달리 지치지 않는 지속성까지 갖춘 전기 오토바이의 성능에 홀딱 반한 기사단은 곧 운송수단이 아니라 무기체계로서의 대량도입해야한다며 요구했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최근 하루 걸러 한 번씩 하와이의 농장과 도곤족 마을을 번갈아 찾고 있었는데, 양쪽에서 모두 인기가 엄청났다.
하지만 그 방향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하와이 농장에서 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없는 전설적인 농사 마스터로의 위엄이 있었다.
그에 비해 도곤족 마을에선 그냥 친절한 아저씨로 명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딱 봐도 다른 외양의 동양인이 나타나 부족어를 술술 내뱉는 것은 물론 식량을 나눠주는 데도 도곤족은 전혀 이를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이틀에 한 번씩 도곤족 마을을 하누아나와 안젤리나를 데리고 찾고 있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한국에서 유학하는 하누아나가 이틀에 한 번씩 마을을 찾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도곤족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족장은 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놈모의 대리자인 나의 아버지였고, 안젤리나 공주는 족장의 양녀가 됐다.
이미 나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인 것을 아니, 부족원들은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가슴 따뜻하게 와닿았다.
아버지는 갖가지 간식을 나눠주는 것으로 인망이 높았지만, 공주는 다른 면으로 인기가 굉장했다.
안젤리나 공주의 사진과 말리 정부의 직인이 찍힌 말리 여권이 안젤리나 공주를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었는데.
물론 자신들과는 전혀 외모가 다르지만, 통역반지로 말이 통하는 안젤리나 공주는 부족원들을 친근히 대했고, 무엇보다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
3서클의 마법사인 만큼, 땅을 파거나 무거운 것을 들어주니 도곤족의 호감이 커져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공주는 자신만의 수목원을 말리에 만들기 시작했다.
마생목은 척박한 도곤족의 땅에 금방 자리 잡았다.
마법사 할아버지가 장담했던 대로 늪지가 생기거나 하진 않았지만, 물이 부족한 말리 땅에도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나는 게 눈에 보였다.
기사단은 마수의 숲을 개발하며 마생목이 발견될 때마다 마생목을 캐뒀다가 말리로 보내주었는데, 차곡차곡 심은 벌써 마생목은 80주 이상 자리잡아서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의 효과는 놀라웠다.
그늘이 생기자마자 곤충과 곤충을 먹고 사는 작은 동물들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처럼 찾아들었다.
아버지와 공주는 레몽드에서 했던 것처럼 결계를 만들어 닭을 방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닭은 100마리가 넘었고, 아침마다 도곤족 아이들은 마생목 숲을 돌며 달걀을 줍는 것이 하나의 일상이 됐다.
옅은 풀밭 아래로 여전히 모래가 느껴지는 데도, 풍성하게 자란 숲은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숲이 늘어갈수록 닭을 늘렸다. 닭이 늘어갈수록 달걀은 더 많아졌고, 늘어나는 달걀을 보는 도곤족 사람들의 얼굴에도 희망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모토바 대통령의 방한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박 작가님과 드라마 회의를 하고 난 뒤, 잠시 침대에 누워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말리 건 이후로 내 전화번호가 알게 모르게 알려져서 희택이가 상당부분을 감당하는데도 내게 직접 전화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개중에는 중요한 인사의 전화도 많아서, 최근 난 걸려 오는 전화를 예외 없이 받고 있었다.
“여보세요.”
“김상민 작가님이십니까?”
“네.”
“란저오위입니다.”
목소리가 익숙하다 했더니, 번호를 이미 지운 란 교수의 전화였다.
“네. 어쩐 일이십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요?”
“보생환이 문제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보생환이라니?
보생환이 문제가 생기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