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54
@54. 그들의 과거(1)
“놔.”
땅을 울릴 듯한 이아페의 낮은 음성이 르디엘을 향했다. 날이 선 채 초점을 잃은 눈빛은 누구라도 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르디엘은 땅을 바라보았다. 이아페의 발밑에서 작게 모래바람이 일고 있었다.
르디엘이 하, 하고 기가 막힌다는 듯 그를 응시했다.
“바람 마법이라도 쓰려고? 지금 네 상태로도 폭주하지 않을 거라 자신해? 게다가….”
르디엘이 불 켜진 커다란 저택을 가리켰다.
“너 마법사인 거 소문내려고 작정한 건 아니지?”
서늘한 목소리에 이아페의 눈빛이 흔들렸다. 르디엘이 그의 품에 안긴 시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 위에서 멈췄다. 하얀 빛이 부서지듯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치유력이었다.
살짝 찌푸려져 있던 시샤의 인상이 점점 풀어졌다. 그 모습에 이아페의 떨림도 조금씩 멎어 갔다.
“일단 응급조치는 했지만 편안한 자세에서 더 봐 드려야 해. 내가 데려갈게.”
르디엘이 이아페의 품에서 시샤를 데려가려 했다. 이아페가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갈 수 있어.”
“네가 마법사인 게 밝혀지고도 저 저택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을까?”
“…….”
“네가 뛰는 것보다, 내가 나는 게 더 빨라. 이성적으로 생각해. 네 주특기잖아.”
르디엘의 목소리에는 뼈가 있었다.
다시 한번 그가 시샤를 안아 들려 하자, 이아페가 이번에는 순순히 그녀를 르디엘의 품으로 넘겼다.
르디엘은 시샤를 안아 들자마자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로 저택을 향해 날아갔다.
이아페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인 채, 가만히, 그리고 또 가만히 그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시샤와 르디엘이 저택 안으로 사라지고도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다.
이아페는 얼굴을 제 손안에 묻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자책이 차올랐다.
한심하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도 경멸스럽다.
그녀가 솔직했으면 하고 바라 놓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 놓고선 정작 그녀의 상태를 직시할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제 오만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제가 그 자리에서 그녀를 앞질러 가지 않았더라면. 같잖은 내기 따위를 신경 쓰느라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면.
그럼 그녀가 비틀거리는 모습을 알아차렸을 거다.
그녀가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저택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가 정신을 놓지 않도록 끊임없이 말을 건넬 수도 있었다.
그것은 그의 눈앞에 놓여 있던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고르지 못했다. 아니, 고르지 않았다.
제 욕심이 더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녀가 괜찮다 하는 말에 안심한 것이 화근이었나.
그녀가 쉬는 게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번 그렇게 하라 제안했으니 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대한 알량한 설렘에 취해, 모든 것이 괜찮다고 합리화한 것이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이아페는 불 켜진 시샤의 방을 바라보았다.
저택의 날개부에 위치한 그녀의 방. 커튼이 쳐져 있어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괜찮을까. 아마 괜찮을 것이다. 괜찮아야만 한다.
그곳으로 옮기는 이아페의 발걸음이 조급했다.
‘만약 르디엘이 오지 않았다면….’
이아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 상황에 나타나서 다행이었다는 것을.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이었다는 것을.
만약 그가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그녀를 안고 날아갔을 것이다.
폭주할 염려는 없다. 폭주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그녀가 제게 준 선물이니.
하지만 마법사라는 것을 들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은밀히 움직인다 해도 저택이 가까워져 오면 누군가의 눈에는 띄었겠지.’
그렇게 마법사라는 게 밝혀지면, 그녀가 꿈꾸던 계획이 망가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르디엘의 치유력은 꽤나 뛰어났다. 웬만한 의원보다도 아는 것이 많았고, 빠르게 저 저택으로 시샤를 데려갈 수 있는 힘도 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맞았다.
자신이 아니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했다.
그녀가 르디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이는 비단 제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선 그녀를 보는 것이 화가 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샤 아르비나. 그녀가 저와 같은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르디엘은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팔아넘기려 했던 자니까.’
이아페는 잊으려 했던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르디엘을 처음 본 것은, 이아페의 9살 생일이었다.
* * *
“안녕, 네가 이아페 도련님이구나!”
휘릭. 테이블보가 걷히며 나타난 것은 금빛 머리의 소년이었다. 어두웠던 테이블 아래에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곳에 웅크리고 앉은 이아페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낯선 적을 바라보는 고양이처럼 한껏 털을 세운 채였다.
“와, 여기가 네 아지트야?”
하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왔다. 상반신은 테이블 안에, 하반신은 밖에 반쯤 몸을 걸친 채 그가 시선을 움직였다. 영롱한 눈동자가 텅 빈 테이블 아래를 구석구석 훑었다.
“근데 침대도 없고, 베개도 없어서 잠자기엔 좀 그렇겠다, 맞지? 아, 내 동생은 이런 때에 내 재킷이라도 좀 내놔 보라고 하더라. 도적처럼 말야. 헉, 혹시 너도 이거 뺏을 거야?”
혼자서 묻지도 않은 정보를 술술 뱉어 내던 르디엘이 약간 몸을 뒤로 빼며 한 손으로 제 재킷을 꼬옥 잡았다.
이아페는 그 텐션에 혼이 빠져서 그가 처음 보는 이라는 것도 잊고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니…. 내가 그걸 왜 뺏어….”
그러자 소년은 후, 하고 눈에 띄게 안심하며 재킷을 잡은 손을 풀어 다시 바닥을 짚었다. 소년이 도도도도, 테이블 아래로 쏘옥 들어왔다.
옆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니, 제 옆에 앉은 모양이었다.
“너 좋은 애구나?”
“뭐? 어딜 보고….”
“여기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내 걸 안 뺏었잖아.”
이아페는 소년의 말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그냥 으응, 하고 대충 대답해 주었다.
“너는 여기가 편해? 밖에 먹을 거 쌓였던데.”
“필요 없어.”
“그래? 그럼 나 이거 혼자 먹는다?”
부스럭,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이아페는 저도 모르게 그곳을 빤히 바라봤다.
“뭔지 궁금하지?”
“…아니.”
부스럭, 사락. 종이를 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에 이어진 것은 입에 무언가를 넣고 오물조물 씹는 소리였다.
“이거 진짜 맛있는 건데. 진짜 안 궁금해?”
“…….”
궁금했다. 대체 무엇이길래 저렇게 맛있는 소리가 난단 말인가.
“보여 줄까?”
“…으응.”
결국 이아페의 자존심은 호기심에 지고 말았다.
소년이 탁, 손을 튀기는 소리를 내자 자그마한 빛 하나가 허공에 나타났다.
“이거야.”
소년이 제 손에 들린 것을 이아페에게로 내밀었다. 구겨진 종이 위, 설탕을 묻힌 동그란 도넛들이 있었다. 한입에 넣을 수 있는 크기였다.
이아페는 평소에 그 간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소년이 너무 맛있게 먹고 있자 괜히 군침이 돌았다.
“먹을래?”
이아페가 도넛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소년이 손을 더 가까이 내밀어 주었다. 이아페가 그것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역시 제 취향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 더 먹고 싶었다.
이아페가 소년을 흘끗, 바라보자 소년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하나 더 가져가라는 의미였다.
“이렇게 계속 줘도 돼? 너 먹을 건데….”
“괜찮아. 이거 사실 네 거거든.”
“내 거…?”
“너 오늘 생일이잖아. 그래서 맛있는 걸 되게 많이 준비했더라고. 그중 몇 개를 슬쩍했지. 아 참! 태어난 거 축하해! 이 말부터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소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하하, 하고 웃었다.
“너… 초대받아서 온 거야?”
“아니? 나 여기 사는데?”
“여기 우리 집인데….”
“아, 나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거든. 신성능력자라서.”
이아페는 눈을 깜빡, 깜빡했다.
카일라인 공작저에는 축성을 위한 신성능력자들이 항상 거주했다. 하지만 이만큼 어린 소년을 들인 적은 없었는데.
하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이아페는 그 소년이 왜 여기에 와서 제게 말을 건 것인지를 깨달았다.
이아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공작의 명으로 자신을 데려가려고 온 것이다.
그럼 그렇지. 이유 없이 자신을 찾는 이가 있을 리 없다.
“나 데려가려고 온 거야?”
이아페에게서 볼멘소리가 새어 나왔다.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바닥만 빤히 응시했다. 분명 그렇다, 이만 돌아가자, 그런 말을 하겠지.
“아뉘?”
도넛을 우물거리며 나온 말소리에 이아페가 고개를 확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명을 어기는 거 아냐?”
이아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소년이 도넛을 간신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아, 아냐, 아냐. 널 찾으라고 명을 받긴 했는데.”
“그런데…?”
“지금 찾았잖아! 그러니까 명을 어긴 건 아니지. 데려오라는 말은 없었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말했어. ‘당장 이아페를 찾아.’”
소년이 목소리를 한껏 깔고, 심각한 표정으로 카일라인 공작을 따라 했다.
그 모습에 이아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찾으라는 말을 정말 찾는 것으로만 해석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 말이, 찾아서 데려오라는 거 아냐?”
“에이, 그럼 찾아서 데려오라고 말을 했어야지. 나는 명을 제대로 수행했어. 말을 제대로 안 한 사람이 문제지. 안 그래?”
“…맞아.”
당연하다는 듯한 소년의 말에 이아페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무섭고 싸늘한 눈빛을 떠올리자 약간 몸이 움츠러들긴 했지만.
“근데 나는 먹을 거 더 먹고 싶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긴 해. 생일이니까 너도 맛있는 걸 많이 먹으면 좋을 것 같긴 한데… 뭐, 네 생일인데 네 맘대로 해.”
소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아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기 있을래….”
“그래, 먹을 것 좀 가져다줄까?”
아니, 하고 말하려던 이아페가 나지막이 응, 하고 대답했다. 방금 먹은 도넛의 달콤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아까 먹은 그거.”
“좋아, 조금만 기다려.”
소년이 바로 테이블을 빠져나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소년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