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어디 보자….”
기분 좋은 소식을 듣고 집에 도착한 이정이 희경이 준 기획서와 대본들을 전부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무엇을 먼저 볼까 고민했다.
“뭐부터 봐야 하지?”
잠시 고민하던 이정은 아무래도 고정 확정인 예능과 연습을 병행할 생각인 대본보다는 촬영 여부 결정만 하면 되는 광고부터 해치우는 게 낫겠다 판단했다.
“초콜릿 CF랑 정장 지면 광고네.”
예능 기획안과 대본들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널브려 둔 채 광고 제안서 두 개만 달랑 들고 소파에 누운 이정이 가장 먼저 살핀 것은 제안서의 제목이었다.
“정장 광고는 그렇다 치고 때문에 초콜릿 광고가 들어온 거면 조금 늦지 않았나?”
드라마 이 종영한 지도 벌써 반년.
그 이후로도 벌써 몇 개의 드라마가 더 종영했으니 드라마 속의 이정, 즉 재민은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을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봐도 이건 때 찍었어야 하는 광고 같은데.”
부드럽고 따뜻한 컨셉의 광고는 아무리 봐도 곧 개봉예정인 과는 썩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정의 의문은 커져갔다.
“내가 아직 배우로서 이미지가 강한 편은 아니라서….”
회사는 연예인이 평소, 혹은 작품을 통해 쌓은 이미지가 곧 자신들의 이미지가 되기를 원하며 모델을 고르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의 몰입도를 해칠 수도 있으니까 이건 이 광고를 고른 이유를 물어보고 결정해야겠… 아.”
그리고 희경은 이정이 그런 고민을 할 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광고 제안서 맨 마지막 장에 그의 의견이 적혀있었다.
― 10월 부산 국제 영화제 상영 예정. (상영 부문: ?)
― ‘수한’ 역 평이 굉장히 좋음. 이미지 고착화 가능성 있음.
― 광고를 통해 역으로 다른 이미지를 심어놓는 것을 추천.
“일리는 있는데….”
그는 강렬한 ‘수한’ 역 탓에 이정의 배역이 비슷한 쪽으로만 반복되는 것을 우려하는 듯했다.
“일단 보류. 근데 대표님은 이런 걸 다 어떻게 아신 거지.”
수한 역에 대한 평가야 촬영장에 함께 있던 우재가 전달해 주었을 수도 있지만 이 영화제 상영 예정이란 사실은 주연배우인 이정도 조금 전 알게 된 사실이었다.
“모르겠다. 정보 빠르면 좋은 거지 뭐.”
분명 송 감독이 바로 전해주었을 법한 사실을 한발 먼저 알고 있는 희경의 정보력에 이정은 꽤 놀랐지만 그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다음은….”
두 번째 추천 광고는 시기가 애매하다 생각되던 초콜릿 CF와 달리 무난한 지면 정장 화보였기에 이정도 별 고민 없이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케이. 광고 고민 끝.”
비록 하나는 보류 상태지만 가장 금방 끝낼 수 있는 광고를 후다닥 끝낸 이정이 본래 목표였던 대본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조만간 그가 출연하게 될 예능프로그램의 기획서는 그 사이에서 쓸쓸하게 잊혔지만, 이미 대본을 볼 생각에 신난 이정에게는 철저히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별거 없긴 하다.”
그러나 딱히 마땅한 것이 없다는 희경의 말대로 꽤 많았던 대본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없었다.
대부분은 아예 제작조차 되지 못한 듯 이름조차 생소한 것들이었고, 개중 이정이 제목을 알고 있는 몇몇 작품들조차 크게 흥행하지 못한 것들뿐이었다.
“그래도 연습하는 건 전혀 지장 없지.”
다만, 이정 역시 작품성을 기대했다기보단 그저 연습용 대본을 찾은 것에 불과했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자, 그럼 어디 오랜만에.”
후읍―
숨을 들이켠 이정이 방금 읽은 대본의 대사를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너무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
대본 흐름상 절절해야 하는 부분이었지만 이정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이후로 처음 맛보는 새 대본, 새 환상이기 때문이었다.
이정의 오피스텔은 어느새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기 딱 좋은 노을빛 호숫가로 변해있었다.
상대 역은 사람이 아닌 희끄무리한 무언가에 불과했지만, 이정에게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앞으론 내 옆에 있어 줘.”
― 응.
“절대 떨어지는 일 없이.”
― 알았어.
오히려 옆에서 대사를 받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사의 타이밍과 감정을 더 적절하게 판단할 수 있을 뿐이었다.
“김 과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자유분방한 스타일이시구나? 그런데 어쩌나? 저는 이래 봬도 원리원칙주의라 오늘 꼭! 돈을 받아가야겠는데.”
게다가 대체로 동선이 정해져 있는 실제 촬영과 달리 이정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 이, 이보게 최 팀장. 내가 언제 안 갚는다고 했나. 딱 사흘만. 응? 딱 사흘만 기다려주게! 통장이고 집이고 다 압류당해서 나 정말 한 푼도 없어!
“뭐, 아예 없으신 건 아니잖아요? 여기부터 여기까지 싹 훑으면 한 오억은 나올걸?”
― 무, 무슨
“에헤이, 뭘 또 그렇게 질린 얼굴을 하고 그래요. 나 그렇게 양심 없는 사람 아니야. 어디 보자… 콩팥 한 개에 간이랑 피 조금 정도? 내가 우리 김 과장님 사정 봐서 이걸로 3개월 치 이자 퉁 쳐줄게. 어때요?”
그렇게 한참 동안 쉬지 않고 받아온 대본 전부를 한 번씩 읽어본 이정은 희경이 주연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연기를 잠시 쉬자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캐스팅 제의가 온 것들은 대부분 드라마의 서브 커플, 서브 남주 혹은 영화의 조연, 그리고 간간이 웹 드라마의 주인공 역할이었다.
‘계속 주연만 맡은 것 치곤 역할들이 약해.’
이제 겨우 데뷔 1년 차.
아직 연말 시상식 한 번 겪어보지 못한 신인에게 이런 제의들이 온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인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문이 빠른 연예계치고는 비중이 적은 역할이 대다수였다.
“유난히 깡패나 또라이 역할이 많은 걸 보면 소문이 안 돈 것도 아닌데.”
이정이 에서 맡은 역할이 얼추 소문난 듯 이번에 들어온 대본에는 유독 깡패, 싸이코, 살인마, 소시오패스 등 강렬한 배역들이 많았다.
‘여기고 저기고 전부 간 보느라 바쁘네.’
주석이 택하고 훈진이 아낀다는 신인 배우가 어지간히도 궁금한가 보다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띠띠디띡.
‘박민혁이네.’
네 자릿수를 똑같은 속도로 누르는 지원과 달리 민혁은 매번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기세로 급하게 누르는 습관이 있었다.
― 덜컹.
“어?”
그리고 들려오는 문이 걸리는 소리와 당황한 목소리.
여러 번 집을 침범당한 경험이 있는 이정이 이사 후 아예 날을 잡아 도어락을 설치한 탓이었다.
“너 오늘 무슨 촬영 있다고 하지 않았어?”
한창 연기 연습 중이었던지라 내심 그냥 쫓아버리고 싶었던 이정이 문틈 사이로 보이는 민혁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거 취소됐어. 문 열어줘 이―정!”
“싫어.”
“왜!”
“지금 네 발밑을 보고 다시 생각해봐.”
이정의 말에 민혁의 시선이 발아래로 향했다.
“아.”
민혁의 발아래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스태프들의 그림자가 즐비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알겠지? 문 닫는다.”
“잠깐!!!!”
“왜. 뭐. 싫어. 안 열어줘.”
분명 지금 이 상황도 찍고 있을 게 뻔하고, 결국엔 잠깐이라도 열어줘야 하겠지만 이정은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민혁을 내쫓아버리고 싶었다.
“이이잉 이―정!”
“…….”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민혁의 애교에 이정이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자 위기감을 느낀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알았어! 미안해! 안 할게! 문 열어줘 제발!”
무슨 벌칙이라도 걸려 있는 건지 정말 절박해 보이는 민혁의 목소리에 이정의 마음은 한층 더 단단해졌다.
‘와, 열어주기 싫다.’
물론, 열어주지 않는 쪽으로.
하지만 이정은 결국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지 몰라도 이정에게 친구가 민혁과 지원뿐인 만큼 민혁 역시 친구라곤 이정과 지원뿐이었으니까.
“기다려. 대충 치우고 나올 테니까.”
“너 치울 것도 없잖아.”
“대본 들어온 거 보고 있었어.”
문 앞에 민혁을 세워둔 채로 널브러뜨렸던 대본과 제안서들을 대충 정리한 이정이 겨우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하나, 둘, 셋… 와 박민혁까지 여섯 명이네.’
생각보다 많은 스태프들의 수. 혼자 살기에 딱 적당한 수준의 집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축하합니다! 박민혁 씨! ‘상황설명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기.’ 미션 성공! 극한직업체험 1차 탈출에 성공하셨습니다! 이로써 원양어선은 탈출하셨네요!”
“아싸!”
그들 중 한 명이 민혁에게 미션 성공과 더불어 추가로 지켜야 할 수칙에 대해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정 씨, 여기 마이크 착용 부탁드려요.”
“아 감사합니다.”
심지어 이런 게 컨셉인지 이정의 허리에 여분 마이크를 둘러주는 모습이 퍽 익숙했다.
“단 앞으로 12시간 내에 이 집에서 나오신다면 동해 신선 물류센터행 아시죠?”
“12시간이요?”
기껏해야 3, 4시간이면 될 줄 알았던 이정이 민혁을 노려보자 그가 이정에게 매달렸다.
“이정아 살려줘….”
“자! 이정 씨 마지막 기회입니다. OUT or PASS?”
극한직업체험 OUT or PASS. 익숙한 멘트에 민혁이 지금 찍고 있는 프로그램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출연진들에게 매주 다른 미션을 제한시간 안에 성공하면 패스, 실패하면 아웃인 예능으로 실패할 경우 제목처럼 각기 다른 극한직업체험을 하는 독특한 포맷의 프로그램이었다.
“하아….”
‘오늘 미션은 남의 집 가서 12시간 버티기 뭐 그런 건가.’
어쩌겠냐는 듯 눈을 빛내는 스태프들과 살려달라는 듯 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민혁 사이에서 이정이 뱉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PASS.”
“축하드립니다! 최종 패스에 성공하셨습니다!”
예정에도 없던 예능 출연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