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하.”
이정이 꽉 막힌 듯 답답해져 가는 제 가슴에 짧게 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보현은 뒤를 돌아보며 대사를 치느라 그의 한숨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어지러워….’
익숙한 장소. 이정이 지금 서 있는 곳은 회귀 전, 그가 사고를 당했던 바로 그 목조 폐가였다.
“응. 희도야.”
평소 이정을 도와주는 ‘환상’은 항상 대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켜고 끄는 정도는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 배경까지는 그가 선택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환상이 왜 뜬금없이 이 폐가를 보여준 거지?’
만약 대본에 ‘더러운 골목길’이라는 설명이 있다면 이정이 언제, 어디서 환상을 불러오던 항상 최적화된 ‘더러운 골목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왜일 거 같아?”
“모르니까 물어보지….”
그렇게 준비된 현장은 환상과 같을 때도 있었고, 다를 때도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환상 속의 배경이 훨씬 현장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카메라가 있는 것보단 덜하지만…. 그래도 숨 막힌다.’
이정이 메마른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사실, 그렇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이 목조 폐가는 평소의 환상이 그렇듯 최적화된 배경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까 넌 어떻게 온 거야? 내비 찍고 와도 찾기 힘들던데 여기까지 택시 타고 왔을 리도 없고.”
“내 차로 왔어.”
당시에는 대본에 없었던 씬을 쪽대본으로 추가하는 바람에 곧 철거될 목조 폐가를 급하게 섭외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정이 본 것처럼 이 장면은 처음부터 의 대본에 있었다.
“차? 언제 샀…. 아니, 너 면허 없잖아. 딸 생각 없다며?”
최 작가가 대본을 차지하게 되면서 멋대로 난도질 되었다가 또 멋대로 이어 붙어진 탓에 모두가 착각한 것뿐이었다.
“면허는 없지만 차는 몰 줄 알거든.”
“뭐야. 설마 무면허로 여기까지 왔단 뜻은 아니지?”
완벽하게 외워진 대사는 그의 심란한 속마음과 달리 매끄럽게 이어졌다.
이정의 얼굴에는 그의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떠올랐지만, 하필 희도의 대사 역시 그런 탓에 그냥 자연히 연기하는 것만 같았다.
‘더워.’
아무리 눈을 굴려도 바로 그 목조 폐가라는 사실이 이정을 숨통을 조여왔다.
“맞는데? 나 운전 잘해. 면허만 없는 거야 면허만.”
율하의 행동에 맞춰 고개를 숙인 채 이리저리 움직이던 보현이 이정의 다음 대사를 기다리다 고개를 들었다.
“…….”
“음?”
늘상 따라오라는 듯 무게감 있게 길을 안내하던 이정의 대사가 들리지 않은 탓이었다. 현장에서도 NG 없이 촬영하기로 소문난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뭐야. 웬일이야?”
촬영을 시작하고 처음 보는 모습에 보현이 이정을 툭 쳤다.
“대사 까먹었어?”
나이를 떠나 서로 반말을 하기도 하고, 율하와 희도 역시 곧잘 투닥거리는 사이라 서로를 툭툭 치는 일은 자주 있었다.
그만큼 이정을 진심으로 치기 위한 타격이 아니었기에 손에 실린 힘도 굉장히 약했다.
“너 왜 그래. 괜찮아?”
“잠깐만….”
그러나 가벼운 타격에 이정이 풀썩 주저앉자 놀란 보현이 그를 불렀다.
“몸이 안 좋으면 그냥 쉬자고 하지. 어차피 나 때문에 연습하는 거 다 아는데.”
“그런 거 아니야.”
“오늘 모처럼 쉬는 날인데 연습하자고 한 내가 잘못이다. 미안. 나 진짜 에 폐 안 끼치게 열심히 할게.”
보현은 이정의 컨디션이 좋지 않음에도 그녀의 연기실력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무리해서 연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기다려봐. 따듯한 물이라도 떠올게.”
“아냐. 됐어. 괜찮아.”
“안 괜찮은 거 같은데. 현장에서도 실수 한번 없던 사람이 갑자기 대사를 까먹은 것도 모자라서 툭 쳤다고 주저앉아?”
그녀는 본 적 없는 이정의 행동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면 뭐, 숨겨진 지병 같은 거 있어?”
“진짜… 아니야.”
그러나 이정은 어째서인지 연기가 끝났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환상에 점점 더 숨이 가빠졌다.
‘느낌이 안 좋은데.’
마치 회귀 초반, 환상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카메라를 보는 바람에 쓰러질 뻔했던 그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아닌데 이렇게 안색이….”
지원에게 붙들려 일일 매니저 역할을 했을 때도, 촬영 당시 쓰러질 뻔했다가 기립 저혈압이라며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했을 때도, 결국 실제로 쓰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순간 아찔했을 뿐, 금세 정신을 차릴 수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건만.
“야, 야! 유희도 너 내 말 들리는 거 맞아?”
삐― 하고 귀를 울리는 이명에 이정이 보현의 부름에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그런 이정의 모습에 당황한 듯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맨날 희도 희도 거리다 보니까 순간 본명이 생각이 안 났네. 이정아. 이정아!”
― 똑똑
보현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누군가 연습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습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 보현이 화색을 띠며 소리쳤다.
“들어와!”
“아직 연습 중이었…. 뭐야! 얘 상태가 왜 이래!”
바로 촬영이 일찍 끝나 그들을 보러 온 지원이었다.
“몰라. 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였는데…. 연습하다가 대사를 안 하길래…. 평소에 먹는 약 같은 거 있어?”
“아니? 얘 건강 빼면 시첸데?”
지원과 보현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멀어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나, 물 좀.”
지원의 등장 때문일까, 사라지지 않던 환상이 갑자기 사라졌다.
“물? 잠깐만. 밖에 정수기 있어. 따듯한 물 떠올게.”
그의 상태가 워낙 안 좋아 보였으니 진정하란 의미에서 따듯한 물을 떠 오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따듯한 것이라곤 라면 국물도 안 먹는 지금의 그에게 따듯한 물은 오히려 독이었다.
“아니….”
“언니 차가운 물!”
이정이 정정하기 위해 입을 열자 지원이 눈치 빠르게 대신 소리쳤다. 이미 연습실 밖을 나간 보현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야, 이 미친. 너 뭐야. 과로야? 수면 부족이야? 피곤하면 집에서 쉬어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보현이 나가자마자 지원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시끄러워…. 머리 울려.”
“머리 울리라고 하는 소리다!! 아주 머리가 깨져버려서 다신 무리한단 생각 자체를 못 하게 해야지 너 진짜, 보현 언니만 있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우재 오빠는? 밥만 잘 먹고 다니면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이러는데! 너 설마 다이어트하냐? 빡민네 회사 대표가 살 빼라고 굶겨?”
“유언비어 퍼뜨리지 마라. 그냥 잠깐 어지러워서 그래.”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이 지원이 이정의 멱살을 잡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어지러우면 이상이 있는 거지. 넌 명색에 한의대생이라는 놈이 자가 진단이 안 돼? 이번엔 골방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되냐?”
“일학년 겨우 다녔는데 자가 진단은 무슨.”
연습실 바닥에 누워 태평하게 대답하는 이정의 모습에 지원이 결국 손을 올려 그의 이마를 때렸다.
“아프다.”
“입 안 다물면 한 대 더 때린다. 내가 진짜 옛날 생각 하면….”
“그때 얘기가 왜 나와 지금.”
스무 살. 민혁은 한참 해외 투어 중이고 지원은 재수학원에 다니느라 바빠 한동안 이정에게 신경 쓰지 못했을 때, 생활비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밤새워 공부한단 사실을 숨긴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정말 영양 부족으로 쓰러진 탓에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하루를 꼬박 기절했다가 이튿날 운 좋게 집에 들른 지원에게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 갔었다.
“빡민이 지 다이어트한다고 너한테까지 지랄하는 거 아니지? 진짜로?”
“걔가 퍽이나 그럴 성격이다. 나 삼시 세끼에 간식 챙겨 먹고 운동까지 다녀서 대학 다닐 때보다 살쪘어.”
“근육이 생긴 거겠지. 하여간 나 그때 진짜 시체 치우는 줄 알고 기절할 뻔했잖아.”
지원은 그때 일이 생각난 듯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정수기가, 생각보다, 후우, 멀리 있네. 자. 찬물.”
“고마워.”
보현이 건네준 찬물을 마시자 식도를 타도 물이 넘어가는 느낌이 났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은 아니었지만 우선 뜨거운 속을 진정시키기엔 충분했다.
“미안한데, 나 오늘은 가봐야겠다.”
“우재 오빠 어디 있어.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해.”
“택시 타는 게 빨라.”
한번 열이 식고 나자 당황스러워 머리가 굳었던 아까와 달리 오히려 더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연기를 멈췄는데도 환상이 사라지지 않은 건 처음이야.’
그리고, ‘최적화된 배경을 가진 환상’이 아닌 이정의 기억속의 목조 폐가가 나왔다는 것 역시 이상했다.
마치 환상이 이정이 을 이용해 트라우마에 직면하려고 하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진작에 알았으면 집에서 먼저 해봤을 텐데.’
사고 장면이기에 긴장은 했을지언정, 내심 언제나 최적화된 환상이 나오기 때문에 목조 폐가는 나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내일 촬영장에서 보자.”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지원과 보현의 말을 겨우 거절한 이정이 택시를 잡아탔다.
‘이대로라면….’
이제 진짜로, 환상, 아니 트라우마를 해결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