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62
062화
“지난 촬영을 통해서 계약 논의 중인 작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중복되는 일정에 지친 이정과 우재는 혹여 회사가 겹치는 스케줄을 가져올까 싶어 주석과의 영화에 대해 말해 두었다.
“네. 어제 만나 뵙고 계약서 가지고 왔어요.”
이정이 챙겨온 계약서와 시나리오를 건넸다.
“크랭크인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요. 감독님이랑 주연 배우들은 조만간 자리 한번 잡아 알려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계약서는 한번 더 훑어보고 이상 없으면 말씀드리죠.”
대표는 시나리오는 펼쳐보지도 않은 채 계약서만 챙겼다.
“어차피 하기로 한 작품이니 시나리오는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작품 논의는 제가 아닌 관련 팀을 통해서만 진행될 겁니다. 저는 누구처럼 잘하지도 못하는 분야를 굳이 건드리는 멍청이는 아니라서요.”
주어는 없지만, 그 ‘누구’가 루티온의 현 회사인 루 플러스의 사장을 뜻하는 것임은 알 수 있었다.
“그럼 우선 이사하고, 바로 프로필 촬영할 수 있게 스튜디오 잡아두겠습니다.”
촬영 컨셉은 우재를 통해 전달하겠다는 말과 함께 첫 미팅이 마무리되었다.
* * *
“뭔가 예상했던 거랑 되게 다른 분이다.”
루티온 멤버들과 비슷한 성격이지 않을까 예상했던 것과 달리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도 본인이 할 수 있는 분야와 아닌 분야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신 분이라 의미 없는 기 싸움은 안 해도 되겠더라.”
루 플러스에서 워낙 월권행위에 휘둘린 멤버들이다 보니 자연히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대표직을 주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고 이거 받아 이정아.”
우재가 주머니에서 명함 여러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앞으로 활동 관련으로 너한테 뭐 물어보는 사람 있으면 명함 주고 그쪽으로 연락하라고 해.”
깔끔한 하얀색의 명함에는 회사명과 주소, 그리고 우재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명함이 되게 빨리나왔네요.”
“주로 거래하는 업체가 있어서 그렇다나 봐. 같이 있을 땐 내가 주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을 테니까 여유분으로 몇 장 가지고 있으라고.”
“알았어요.”
하얀 바탕에 까맣게 박힌 우재의 이름. 그리고 하단의 매니저라는 세 글자. 같은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이정 역시 비슷한 명함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제 진짜 매니저네요 형.”
“언제는 가짜 매니저였니. 아, 대표님이 너 회사 구경하고 싶으면 시켜 주래. 아직 사람이 다 들어오진 않아서 좀 휑하긴 하겠지만 구경할래?”
이정은 우재의 안내를 따라 RW엔터테인먼트를 구경했다.
처음 오는 회사였지만 민혁이 RW의 시스템을 많이 참고했기 때문인지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럼 집에 가서 버릴 거랑 이사 갈 때 들고 갈 거 분리 좀 해 놔. 내일이나 내일모레 포장이사 할 거니까.”
“분리할 것도 없어요. 짐도 없고, 침대나 냉장고 같은 것도 다 옵션이라.”
그나마 짐이 될만한 것은 책들이었는데 이마저도 한 박스 정도면 충분할 양이었다.
“아, 최근에 박민혁이 준 옷 있어서 그 캐리어 하나 더?”
지난번 촬영 이후 아직 돌려주지 않은 옷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저번에 가져가라니까 귀찮다고 그냥 두고 갔거든요.”
“그래도 사람 쓰는 게 편하니까 포장이사 하는 걸로 하자.”
“그냥 차에 싣고 가도 되는 수준인데.”
뻔한 제 짐 양에 이정이 포장이사는 필요 없다 말했지만, 우재는 아무리 짐이 없어도 골병든다며 이정을 만류했다.
“돈 몇만 원 아끼려고 셀프 이사하다가 골병들어. 하다못해 네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뭐.”
“뭐… 그렇긴 하죠.”
짐이 없어도 포장이사가 편한 것은 맞으니 이정도 더 말리지 않고 수긍했다.
* * *
“진짜 이게 끝이야?”
“제가 짐 없다고 했잖아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대학생인데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지.”
이사 당일. 이정의 짐을 본 우재가 한탄했다.
“저희도 원룸 이사 많이 해 봤는데 이렇게까지 짐 없는 집은 처음이네요. 굳이 안 부르셔도 됐었을 거 같은데요?”
“저도 이 친구가 이렇게 짐이 없는지는 몰랐어서….”
“저희야 일 편하고 좋죠 뭐. 옮기지 말고 밑에 내려가 계세요. 이 정도면 한 번에 다 가지고 내려갈 수 있겠어요.”
짐을 옮기러 이정의 집에 온 센터 기사 역시 이럴 거면 굳이 포장이사를 부를 필요 없었다며 웃었다.
“아무리 공부만 하고 살았다지만 책 제외하면 개인 짐이 한 상자밖에 안 된다는 게 말이 되니?”
“에이, 그럴수도 있죠 뭐.”
밥 사 먹을 돈도 아끼던 이정에게 사치품을 사들일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3년 살았다고 하지 않았어?”
“얼추 그 정도 됐죠. 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여기 살았으니까.”
전공 책과 공부 관련된 책이 두 박스, 그릇이나 개인 생활품, 민혁과 지원이 두고 간 것들이 한 박스, 그리고 옷을 포함한 이정의 진짜 개인 짐이 한 박스.
19살 때부터 3년간 살아온 짐이 겨우 네 박스라는 의미였다.
“내가 웬만하면 사람한테 돈 쓰고 살란 소리 안 하는데 이정아 넌 사치 좀 하고 살아라.”
“딱히 사고 싶은 것도 없어서….”
“그러니까 스물두 살에 그게 정상이냐고. 그 나이엔 보고 싶은 것마다 다 사고 싶어도 이상할 게 없어.”
우재는 이정의 무소유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를 타박했다.
“그건 좀.”
이정이 소비를 독촉하는 우재의 모습을 웃어넘기자 우재는 재차 진심임을 표출했다.
“너 이사 가서도 이렇게 살 건 아니지? 지금 집이야 원룸이라 그렇다 쳐. 이사 가는 집까지 이렇게 짐 없으면 휑해 보여. 나중에 예능 같은 거 나가면 네 팬들 다 뭐라 하겠다.”
회귀 전 민혁에게 꽤 많은 돈을 월급으로 받던 때에도 살림살이가 그다지 늘어나지 않았던 걸 생각해 보면 이사 가서도 그다지 변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미니멀라이프 실천 중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미니멀이 없어 보이는 인생을 뜻하는 건 아니잖아. 지금은 살기 위한 최소한도 안돼.”
우재는 이정의 반박에도 이건 미니멀라이프가 아니라며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표했다.
“짐 좀 있으면 집에다 가져다 두고 정리하고 출발하려고 했는데 이건 뭐 건드릴 것도 없어서 그냥 가도 되겠다.”
“어딜요?”
“프로필 사진 찍으러.”
이사도, 프로필 사진도 말 나온 지 겨우 이틀. 심지어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대표가 바로 잡아두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잘해야 다음 주쯤으로 생각했던 이정은 황당한 표정으로 우재에게 되물었다.
“그것도 오늘 찍어요?”
“대표님 아는 업체에다가 부탁하셨대.”
“명함도 아는 업체, 프로필 사진도 아는 업체. 이삿짐센터도 아는 업체에요 설마?”
“그럴걸?”
칼 같으면서도 독설을 주저하지 않는 모습에 두경과는 다른 의미로 독특한 사람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RW엔터테인먼트를 맡기 전에는 뭘 하던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기사님, 오피스텔 측엔 저희가 전달해 놓을 테니까 그냥 집 안에다가 두고 가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럼요.”
짐을 내리는 모습을 지켜볼 필요조차 없다고 판단한 우재가 이정을 재촉했다.
“시간 빠듯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잘 됐다. 가자. 너 머리도 새로 하고, 메이크업도 받아야 해.”
“ 컨셉에 맞추려면 머리 너무 건드리면 안 되는데요?”
“길이만 안 건드리면 되잖아. 명색에 첫 프로필 사진인데 제대로 때 빼고 광내서 찍으라고 하셨어.”
“그럼 급하게 하지 말고 천천히 준비하시지….”
이정은 굳이 이삿날과 겹치게 잡아 바쁘게 움직일 필요 있나 싶었지만, 프로필 촬영이 이미 늦은 감이 있다는 말에는 동감했기에 별수 없이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는데요? 샵도 다 예약된거죠?”
“당연하지.”
그렇게 이사를 맡겨 둔 이정이 도착한 곳은 한 메이크업 샵. 소규모 샵으로 그의 기억에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3시에 RW엔터테인먼트 이름으로 예약했는데요.”
“아, 희경 씨네 회사 식구들이시구나? 이쪽으로 오세요.”
깔끔하게 꾸며진 내부에는 소규모 샵들이 그렇듯 원장으로 보이는 한 사람과 직원 한 명뿐이었는데, 우재가 회사 이름을 말하자 원장이 대표의 이름을 말하며 그를 안내했다.
“샵도 아는 곳인가 봐요.”
“그러게.”
이전까지 루티온이 회사를 차린 것은 루티온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쯤 되면 그들은 그저 회사를 차리기만 했을 뿐 대표의 힘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회귀 전에도 루티온이 차린 회사로 유명했지 딱히 대표가 유명하진 않았는데.’
이정에게 있어 루티온은 역린에 가까웠기에 깊게 알려고 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대표의 수완이 뛰어났다.
‘일반 업체들은 그렇다 치고, 대본도 기대해 봐도 되려나.’
신생 기획사는 이미 자리를 잡은 기획사에 비해 얻을 수 있는 대본이 많지 않았다.
회사 선택과는 별개로 그 사실이 조금 아쉬웠는데 단 며칠 만에 이런 추진력이라면 좀 더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이쪽으로 앉아요. 희경 씨, 아니 그쪽 대표님은 그냥 나한테 맡긴다고 했는데. 배우 본인은 하고 싶은 스타일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