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45
17 Home, sweet home (1)
“겨울 전까지는 기지를 완성해야 해.”
한서현과 내가 숙소로 쓰던 텐트도 나달나달해진 지 오래였다. 하긴 저건 원래 집 대신으로 쓰라고 나온 게 아니니까.
지금은 구월 말. 이제는 늦여름이라는 단어도 더는 붙이기 어려워졌다. 당장 저번 주만 해도 낮에는 땀이 나도록 더웠는데, 이제는 겉옷을 제법 두껍게 챙겨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워졌다.
겨울이 오는 건 순식간이다.
그리고 이런 인적 없는 산중은 더 추워지겠지.
그러니 그 전에 기지를 지어야만 했다.
문제는 규모가 너무너무 크다는 거다.
“사람도 셋밖에 없는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레이에게 그렇게 투덜댔다. 그도 그럴게, 레이가 말하는 터의 기본이 말도 안 되게 큰 탓이다.
━이게 다 네놈이 모자라서라고 하지 않았느냐! 마나 회로를 새기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보다 더 어려운 건 그 마나 회로를 간단하게 압축하는 것이고.
레이의 잔소리가 폭격처럼 쏟아졌다.
━그러는 주제에 바라는 건 많지! 흔적을 완전히 은폐하고 기척을 차폐하는 데다가, 시설은 무슨! 고오급 호텔인 양 완벽해야 하다니!
“그야, 오래오래 쓸 기지니까 그렇지요.”
━그래, 이게 다 네놈이 욕심만 많은 탓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행하도록!
레이의 말에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불가능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려나.
어쨌거나 레이의 말대로 하려면 이 동굴 크기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큰 기지를 지어야 했다. 적어도 그 정도 크기는 되어야 마나 회로를 제대로 새길 수 있다나.
나는 한서현과 스켈레톤도 열심히 벽돌을 반죽하고 만들었다.
마나석을 굽는 건 나만 할 수 있었지만, 저거야 아무나 도울 수 있었으니까.
김재호한테도 시키려고 했는데 숲으로 도망가 버리더라.
그 모습을 보며 한서현이 길길이 날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쥐돌이를 안 빌려줄 거야’라든가 ‘이제는 형 취급도 안 해 줄 거야!’라든가. 제 딴에는 악담이랍시고 말을 퍼붓는데, 아무리 들어도 협박보다는 귀여운 투정 수준이었다.
“이상하다, 며칠 전만 해도 우리 옥션 털고 막 멋진 것 같았는데.”
한서현의 한탄에 내가 말했다.
“백조도 겉으로 보면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헤엄치기 위해서 물밑에서 엄청나게 발길질하고 있다고 하잖냐.”
“그게 이거랑 같아요?”
“다를 게 뭐야. 요는 하나의 무대를 위해서는 언제나 밑에서 자기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거지. 아니면, 뭐, 폼 나지 않는 일이라고 마다할 거냐?”
한서현은 금세 조용해졌다.
━능력을 쓴 거냐?
‘저런 어린애 구워삶는 데에는 능력 같은 건 필요도 없어요.’
널브러져 있는 우리를 보며 죄책감이 생겼는지, 김재호도 가끔 일을 돕긴 했지만 그야말로 잠깐이었다. 몇 번 흙을 옮겨 주나 싶으면 어느새 저 멀리로 사라졌으니.
그 꼴을 본 한서현이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으나 김재호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일주일간 우리는 자고 먹고 싸고 벽돌만 만들었다.
그렇게 근 일주일간 우리가 만든 벽돌의 수는 20만 개. 스켈레톤, 나, 한서현 셋이서 자는 시간을 빼놓고 거의 6초당 한 개씩 벽돌을 찍어낸 거다. 뭐, 스켈레톤은 잠을 자지 않으니 더 많이 만들었겠지만.
“더는 못 해…….”
한서현은 그 말을 남기고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하긴, 체력이 약한 한서현으로서는 한계였을 거다.
나는 한서현의 옆에 선 스켈레톤을 바라보았다. 스켈레톤은 마치 정신을 잃은 한서현을 지키겠다는 듯 그의 옆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좋아, 이제 나뿐이군.”
나는 묵묵히 벽돌을 미리 그려 놨던 그림 위에 쌓기 시작했다.
마나석을 섞어 놓은 벽돌들은 마치 자석처럼 철썩철썩 붙었다. 마나를 불어 넣으면 아주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단열재니, 방열재니 하는 것들도 넣을 필요가 없었다. 이 벽돌로 지어진 기지는 그 자체로 거대한 아티팩트가 될 테니까.
나는 완성된 벽돌을 차곡차곡 쌓고 그 위에 마나 회로를 새겼다. 마나 팔찌가 진동하며 마력을 뱉어 냈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감각한 눈으로 내 팔뚝을 바라보았다.
‘음.’
분명히 살갗이 타들어 가고 있는데도 고통은 없었다.
내가 한 번에 활성화할 수 있는 재능, 그러니까 마나 회로의 수는 총 둘.
팔찌에서 마나를 가져오는 데에 하나.
그리고 벽돌에 마나 회로를 새기는 데에 둘.
그 말인즉슨, 내 팔을 보호할 화염 내성을 끌어 올릴 여력이 없단 뜻이었다. 수십만 개의 벽돌을 구워 내며 나는 묵묵히 내 팔을 희생했다.
매번 작업이 끝난 다음에 재생력을 올려 치료는 했지만, 매일 제대로 아물기도 전에 다시 마나를 끌어 올렸더니 이젠 이 모양이 됐다. 나는 이쪽의 감각을 대부분 잃었다. 그래도 아주 나쁜 건 아니다. 어차피 더럽게 고통스럽기만 했으니까.
━초재생을 얻기 전까지는 네놈의 팔은 계속 그 상태일 거다.
“초재생이 마나 회로 몇 획짜리랬죠?”
━3개. 사실 제대로 써먹으려면 4획은 돼야 하는데, 내가 보조해서 간편화시킨 게 그 정도다.
“쩝.”
무식하게 마나 출력을 올려서 되는 게 아니란다.
어쨌거나 시간이 지나 레이의 기능이 더 해금되든, 내 처리 능력이 높아지든가 하면 망가져 버린 이 팔도 되돌릴 수 있을 거라나.
“굳이 살릴 필요 있습니까? 멀쩡히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걸.”
━네놈은 도대체가……. 몇십 년은 전쟁터에서 굴러먹은 노병이 할 법한 말을 하는구나. 전생에서도 네놈의 몸은 멀쩡했을 텐데.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초재생으로 고쳐 봤자 계속 고통은 느낄 거 아닙니까.”
가장 좋은 건 아티팩트를 개량화하는 거겠지만, 난 그럴 실력이 안 된다. 아직은 여유도 없었고. 그러니 당분간은 이대로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거다.
━참으로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지.
게다가 잃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무식하게 마나를 사용해서인지, 내 몸 안에 있는 마나 회로의 통로 자체가 넓어진 것 같았다. 전에는 2차선 도로였던 게 어느 순간 4차선 도로로 뚫린 느낌이랄까. 덕분에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마나의 양도 늘었다.
한 번에 활성화할 수 있는 재능의 수가 두 개인 것은 동일하지만 두 개의 재능을 훨씬 더 쉽게 다룰 수 있게 됐다.
━그야 당연하지. 네 몸 안에 있는 마나 회로의 통로 또한 단련이 가능한 거다. 몸의 일부니까. 물론 기초 토대가 저열한 네놈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 후로는 또 레이의 투덜거림이었다. 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인 다음에도 어지간히 불만이 많은 놈이었다.
어쨌거나 내 재능도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하긴, 몸에 수많은 마나 회로가 깔렸으니, 그만큼의 공부가 더 필요할 것 같긴 하다.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마나 회로는 하나뿐이다. 내가 최초로 각성한 내 ‘거짓말’. 이쪽은 확실히 시각화까지 이뤄 냈을 정도로 몸에 익었다.
하지만 나머지 회로들은 아니다. 마나 회로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 없이도 레이라는 사기적인 보조 수단으로 어떻게든 재능을 펼치는 데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자신의 재능, 그러니까 몸에 깔린 마나 회로를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가 결국 실력이다.
제아무리 잘난 재능이라도 처음에는 미숙한 각성자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지.
그래서일까 이 적응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은 각성자는 생각보다 많다. 그래 봤자 압도적인 재능 앞에서는 모든 게 다 무의미하니, A급 이상의 잠재력을 지닌 각성자가 죽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흠, 유선제하고 빙마리가 죽었던 게 언제더라.’
나는 머릿속으로 시기를 셈했고 아직은 꽤나 여유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다른 급한 일부터 쳐 내고 그쪽도 작업에 들어가야지.
S급 잠재력을 지닌 각성자는 귀하다. 싸가지가 좀 없어서 그렇지, 유선제는 선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 절대로 살려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한서현을 슬쩍 바라보았다.
한서현을 살리는 건 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전생에서도 한서현이라는 이름도, 국내에 네크로맨서가 활약했던 때도 없으니 아마 한서현은……. 글쎄, 과거가 어떻든 지금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다.
딴생각도 이만하면 됐다. 나는 다시 회로를 새기기 시작했다.
* * *
내가 벽돌에 회로를 새기는 동안, 한서현과 김재호는 훈련을 하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한서현이 김재호에게 일방적으로 덤벼들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런 생각 없이 늘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김재호는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이나 몸을 개조당하면서 만들어진 인간 병기였다. 당연히 신체 조직부터 일반적인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했다. 각성자 수준에서도 6성급 육체 강화계나 비벼 볼 정도일걸.
이제야 겨우 스쿼트를 백 개 단위로 하기 시작한 한서현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거지.
“이이잇!”
땀과 흙으로 엉망이 된 한서현에 비해 김재호의 몸은 아직도 뽀송뽀송했다.
스켈레톤까지 추격전에 합세했지만, 여전히 김재호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벽돌에 마나 회로를 새기기 시작했다. 망할 놈의 일은 매일 해도 해도 끝나지 않았다. 이대로 끝나는 날이 오나. 이러다가 세계 멸망하는 그날이 되는 거 아니야?
━괜한 생각 말고 집중해라. 아무리 일은 내가 한다고 하더라도 몸의 집중력이 떨어지면 배는 힘드니까.
“알겠다고요.”
나는 잠조차 줄였다. 어떻게든 쉴 때마다 몸에 피로를 푸는 데에 마나를 돌려 댔더니, 하루에 한 시간만 자도 생활은 되더라. 정신적인 피로가 대단하긴 했지만, 버티고 또 버텼다.
그렇게 해서 다시 일주일.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벽돌에 마나 회로 새기기가 끝이 났다. 밖에서 썼던 수도 시설과 화장실, 그리고 대충 필요한 가구들을 뜯어다 들여놓은 것으로 일단 집의 뼈대는 만들어 놨다.
이제는 이 집에 생명을 불어 넣어야 할 차례.
나는 홍염의 마정석을 들고 섰다.
침을 꿀꺽 삼킨 한서현이 내게 물었다.
“정말 그걸 여기에 쓸 거예요?”
“응.”
수백억을 호가하는 물건이지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마정석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날 건드리지 마. 끼어들지도 말고.”
“예에.”
한서현은 나를 영 못마땅한 눈으로 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영 불손하기는 해도 끼어드는 일은 없을 거다. 내 말은 잘 듣는 녀석이었으니까.
희미한 미소를 지은 나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할 셈이냐?
레이가 나를 말리며 물었다.
━네 역량으로는 빠듯한 일이다. 욕심을 덜 부리지.
‘빠듯한 일이라는 뜻은 되긴 된다는 거 아닙니까.’
━조금만 일이 틀어져도 온몸의 마나 회로가 뒤틀릴 수도 있는 일이다. 겨우 튼튼해진 네놈의 마나 통로가 다 뜯겨 나갈 수도 있다니까.
‘잘하면 됩니다, 잘하면.’
나는 레이의 말을 무시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할 수밖에 없다.
제4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