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한편, 태양 연합 측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적 길드가 갑작스레 우왕좌왕하더니 우르르 도망친 것까지는 좋았다. 세인트들 MP라도 다 떨어졌나, 해서 이때다 싶어 총공격했고 마침내 입구를 점령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어째 분위기가 묘했다. 도망치는 ONE과 레기온을 향한 공격을 멈출 것을 지시한 핑크푸크는 동맹 간부들을 바라봤다. 무너스키와 아퀴나스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곤 갸웃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몇 명은 누굴 죽였느니, 어쩌니. 신이 나서 떠들기 바빴고 신세계 길드 쪽에서는 수상하고 고약한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난히 텐션 높은 그들의 반응에 핑크푸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의심스러운 시선을 의식한 베누스가 다가와 어깨를 들썩거렸다.
“님들 입구 장악 쩔었죠? 이거, 우리가 완전 캐리했는데!”
베누스의 거들먹거리는 태도에 바라보는 시선들이 언짢아졌다. 그럼에도 신세계는 하나같이 키득거리며 웃기 바빴다. 뭐, 평소에도 또라이 짓을 일삼던 플레이어라 그러려니 넘어가려던 찰나. 핑크푸크의 눈앞으로 메시지 창이 떴다.
[레온 : 지금 장난하세요?]뜬금없는 소리에 핑크푸크가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답장하기가 무섭게, 이번엔 마제스티에게서까지 메시지가 날아왔다.
[마제스티 : 그냥 진흙탕 싸움하자는 거죠? 더럽게 버그 쓰면서 할 거면 그냥 일대일 합시다.] [레온 : 똑같이 버그 쓰자면 못 할 거 없고, 막 나가자고 하면 님들보다 더 더럽게 피케이할 자신도 있습니다.]핑크푸크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버그? 무슨 소리지? 누가 뭐 했어요?”
무의식적으로 고개 돌린 순간이었다. 핑크푸크는 저희끼리 짓궂게 웃고 있던 신세계를 응시했다. 버그, 라는 단어에 반응한 플레이어들도 웅성거리다 신세계를 쳐다봤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면 뻔했기 때문이다.
단숨에 주목받게 된 베누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 그거 우리가 그랬는데? 쟤네한테 무한 친추 넣어서 방해함.”
“쩔죠? 일단 세인트들부터 조지고 다음엔 개깝치는 딜러들 공략했죠~ 덕분에 님들 개꿀 빨은 거 인정하죠? 진짜 우리한테 절해야 함.”
베누스, 쿠렉이 차례대로 떠들었다. 정말 한 점의 부끄러움 없는 당당한 자백이었다. 그 뻔뻔함에 모두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고 핑크푸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언제 사고 한 번 칠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버그’를 악용할 줄이야. 신기하고 자시고 간에 버그 악용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꽤 민감한 문제였다. 맵 사용 규칙 비준수 따위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아, 시X…….”
주저앉은 핑크푸크가 조용히 탄식했다. 사태를 파악한 플레이어들도 찌푸린 얼굴로 수군댔다.
“뭐? 버그? 버그를 썼다고? 친구 신청 버그? 그건 또 뭐야?”
“버그가 되나? 여기서도?”
“미친. 저 또라이 새X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PK 중에 버그를 써?”
“이겨서 좋긴 한데. 솔직히 찝찝하긴 하네. 저것들이랑 동맹한 것도 수준 같아진 거 같아서 별로였는데. 이젠 완전히 똑같이 취급될 거 아냐? 아니면 그냥 이대로 이미지 버리고 가야 하나?”
노르드 월드도 어쩔 수 없는 게임이라, 종종 버그가 발견되곤 했다. 그러나 플레이어 수준이 클린한 게임답게, 버그를 악용하는 이들은 전무했다.
또 버그 악용에 대해서는 운영자에 의해 이유 불문 강력한 제재가 가해지는 탓에 어지간해서는 버그를 악용하는 이들이 없었다.
물론, 신세계는 예외였다.
노르드 월드 서버 내 유일한 문제아 집단을 자처한 터라, 신세계는 비매너와 버그에 거리낌 없었다. 물론, 버그가 잦은 편이 아니라 악용하는 경우가 많진 않았지만, 신세계는 틈만 나면 버그를 찾기 위해 열을 올리곤 했다.
온갖 비매너와 버그 탐구. 그 화려한 업적답게, 신세계는 단연코 튀는 집단이었다. 신세계 길드는 자타공인 ‘쓰레기’ 이미지를 꿰찼고, 자연스레 최하위, 밑바닥을 대표하는 길드가 될 수 있었다.
비슷한 등급으로 취급되는 던전데이트조차 신세계와 비교당하면 불쾌하게 여길 정도라, 태양 연합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기분 나쁜 기색을 보였다.
“버그? 미친 거 아니야? 오빠! 그냥 나가요. 내가 다른 거 다 참아도, PK 더럽게 하는 건 진짜 싫단 말이에요.”
보리알은 질색하며 무너스키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무너스키는 이 PK에 재미가 들린 참이었다. 특히 막판에 도망치는 ONE 길드원 두 명을 잡아 기분 좋아하고 있었다.
버그 때문에 생긴 기회이긴 해도 솔직히 자기편이 유리한 상황이니 재미나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보리알을 회유했지만, 이미 경험치 손실로도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보리알은 그대로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아, 나도 나가고 싶은데…….”
휙 떠난 보리알의 모습에 에밀리아도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유독 혼자만 고생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드원이자 친구인 네오, 하얀소라, 돌핀이 PK에 너무 적극적이었다. 친구들을 두고 빠질 수 없어 에밀리아는 뚱한 표정으로 자리에 남아야 했다.
반면, ‘스카디’를 들고 활약한 이트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불과 한 시간 전만해도 PK가 다소 귀찮았던 이트는 ‘스카디’의 성능에 반해 있었다. 세인트의 회복력이 100%로 고정된 만큼, 스카디 힐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으니 약간의 우쭐함을 느낀 것이다.
그간 은근하게 힐을 주도하던 잘난 보리알이 자신의 힐에 맞춰 따라오는 걸 본 순간, 솔직히 이트는 작은 통쾌함과 우월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제 이름을 부르며 힐을 요청하는 아군의 다급한 요청도 재미있었고, 우선순위로 정해 자신을 죽이려는 적군의 모습 또한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세인트들의 모습은 덤이었다.
“형님. 스카디, 이거 괜찮은데요? 깡통인 게 좀 별로이긴 해도…….”
이트의 긍정적인 반응에 아퀴나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그럼 우리가 매입할까?”
“네. 어차피 보리알이나 에밀리아, 저 사람들은 생각 없어 보이던데. 그냥 우리가 매입해서 6강 만들어서 쓰죠.”
“잘 생각했다, 현석아.”
아퀴나스가 쾌재를 부르는 사이에도 입구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성난 보리알이 빠져나가자, 머뭇거리던 먹구름이 마저 나가버렸고 쭈뼛대며 눈치를 보던 슈퍼문의 세인트들도 우르르 따라 나갔다.
가장 중요한 힐러들이 훅 빠져버리자 불안함을 느낀 이들도 하나둘씩 돌아섰다. 괜히 남아 있다가 개죽음당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남은 이들은 갑작스레 붕 뜬 분위기를 우려하며 수군거렸다.
“어, 뭐야. 이대로 끝나는 건가?”
“우리가 이긴 거 맞지?”
“버그 써서 이긴 거잖아요. 난 좀 찜찜한데.”
“그래도 어쨌든 이긴 건 이긴 거죠.”
“솔직히 버그충 극혐이긴 한데. 막상 우리 편이 써서 이기니까 좀 재미있지 않아요?”
“그치. 버그라는 게 당하면 X같은데, 막상 써보면 재밌거든.”
대다수가 신세계를 욕했지만, 일부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상한 흐름에 점점 물들어 가는 듯한 상황에 대장군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분위기가 더 묘해질 것을 우려한 대장군은 황급히 핑크푸크에게 다가가 말했다.
“형. 이건 우리가 먼저 사과하고 깔끔히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아요.”
사과. 달갑지 않은 단어를 중얼거린 핑크푸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또 자기가 사과를 해야 하는 거냐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일전에 있었던 요정의 미로 사건 때, 당시 길드 마스터였던 자신 대신 핑크푸크가 대신해 머리 숙였던 것을 떠올린 대장군은 미안함에 고개 들지 못했다.
“됐어요, 핑푸 님. 사과하지 마요.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서 입 닫고 끝내요. 어차피 세인트들도 다 나가서 더 해봤자 의미도 없고.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사과한다고 쟤네 표정이 풀어지겠어요? 더 트집만 잡히지.”
사이가 불쑥 다가와 그리 말했다. 옆에 있던 갤럭시도 그 말에 동의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다는 사이의 덧붙임에 핑크푸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말에 크게 힘을 얻은 핑크푸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애써 합리화했다.
“하긴, 그렇겠죠? 솔직히 얘기해 봐야 서로 얼굴만 붉힐 텐데.”
“잠깐만요. 형, 그래도 신세계 독단이라고, 우리도 고의로 그런 건 아니라고 얘기는 해야…….”
“아뇨. 오히려 변명한다고 더 기분 나빠할 수도 있어요.”
톡 쏘며 끼어든 이는 사이였다. 이번에도 역시 갤럭시가 맞장구쳤고 핑크푸크의 결심은 더 확고해졌다.
알량하게 남아 있던 양심을 버리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핑크푸크는 후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윽고 셋이서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에 대장군은 씁쓸히 침묵했다.
* * *
“쟤들 다 빤스런 하고 있는데?”
수시로 입구 염탐을 하던 삼촌이 돌아와 내뱉은 말이었다. 태양 연합이 철수한다는 말에 간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 사과는커녕 해명도 안 하고 그냥 간다고요?”
“베누스랑 어울리더니 쓰레기 병이 옮았나. 우리 핑푸, 그래도 양심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어차피 버그야 베누스네가 썼을 게 뻔하지만, 그래도 핑푸가 변명 한마디 않는 건 의외네요. 직접 옆에서 버그 쓰는 거 보니까 끌렸나?”
풍월주, 백검, 신사가 차례대로 투덜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에 동의하는 눈치인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어, 그럼 PK는 이대로 끝? 신전은요?”
리디안이 간신히 신청 메시지를 다 지웠을 무렵, 테세우스가 손을 들어 물었다. 각 길드의 길드 마스터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후 한동안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더니, 마제스티가 손뼉을 쳐 집중시켰다.
“오늘 신전 PK는 여기서 끝입니다. 신전 클리어도 당분간 보류할게요. 일단 저쪽 길마랑 다시 얘기해 보고 오늘 중으로 공지드릴게요.”
“그전까지는 될 수 있는 대로 필드 활동 자제해 주시고요, 혹시라도 또 불미스러운 상황 생기면 섣불리 대응하지 말고 바로 간부들한테 연락 주세요.”
뒤이은 레온의 발언에 몇 명이 불퉁하게 인상 썼다. 오늘 일로 가장 감정적으로 싸운 스타일리쉬와 샤봉은 특히 더 그랬다.
노르드연합의 길드 마스터인 탓에 샤봉이 별말 하지 못하는 한편, 스타일리쉬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스타일리쉬는 초반에 신세계 길드에게 당해 먼 곳에 한참이나 누워 있다가 강제 귀환당했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 아무도 자신을 살리러 오지 않은 것도 내심 서운했고, 초반에 나선 것만큼 활약하지 못해 자존심도 많이 상한 상태였다. 그래서 스타일리쉬는 이 싸움이 좀 더 길게 이어지길 원했다.
“저것들, 다시 기어들어 와서 신전 차지하면 어쩌려고요? 이대로 입구 지키면서 계속 싸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짐짓 살벌한 기세에 리디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말인즉슨, 작정하고 통제를 하자는 소리였다. 한참 전, 새벽까지 싸울 수도 있다는 페페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무리하게 장기전 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보 아니에요. 계속 정찰 다닐 거고, 쟤네 들어와서 보스한테 껄떡거리는 순간 뒤통수칠 거예요. 맵 통제라면 우리가 제일 잘할 거고, 마음먹고 더럽게 할 거면 저도 제일 자신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정색한 레온의 사무적인 대꾸에 스타일리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마치 옛 시절의 레온을 보는 듯하다며 풍월주가 넌지시 중얼거리기도 했다.
잠시 싸해진 분위기에 스타일리쉬와 샤봉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 조용히 물러났다. 얼른 해산하라는 신사의 독촉에 굳었던 분위기가 겨우 풀렸다.
“핑푸, 답장 왔어요?”
“아뇨, 아직…….”
박회장의 물음에 레온과 마제스티가 불편한 얼굴로 부정했다. 두 사람은 조금 전 핑크푸크에게 신전 레이드, PK와 관련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대화하기를, 점잖게 요청한 상태였다.
사람들에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무턱대고 그들과 똑같이 행동할 정도로 마제스티와 레온은 철없지 않았다. 이런 사태일수록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게 바로 길드 마스터였기 때문이다.
특히 레온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길드 마스터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뼈저리게 깨달은 사람이라 더 진지했다. 그래서 타협하길 요청했으나, 핑크푸크의 마음은 완전히 틀어진 듯했다.
오랜 시간 아무런 반응 없는 핑크푸크의 태도에 레온은 씁쓸함을 삼켰다.
“제대로 논의하기 전까진 서로 신전 가지 말자고 제안했는데. 말이 없네요. 그냥 계속 싸우자는 의미인가…….”
“그런 거면 그냥 대놓고 싸우자고 하는 게 낫죠. 어중간하게 서로 눈치 볼 바에야.”
레온과 마제스티의 찝찝함을 끝으로, 금일 신전 PK가 일단락됐다.
장장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PK였지만, 싸움이 익숙한 일부는 너무 빨리 끝났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누굴 못 죽여 아쉽다는 둥, 몇 명밖에 못 죽여 아깝다는 둥. 잔인한 이야기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리디안은 사망 한 번 없이 무사히 살아남아 대기실 땅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