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85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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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를 준비하며 소묘를 제작해야만 했다.
일반적으로는 생각해보자면 도안들은, 전적으로 누드모델에게 의지하여 자세를 따오기만 해도 충분했다. 다들 미켈란젤로 역시 그렇게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필요한 수백 개의 자세를 전부 누드모델로 충당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렇게 하기엔,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많은 것이 들어있었다.
예를 든다면 피렌체와 로마의 골동품 같은 것들···그 중에서도 손 꼽아보자면 로마의 그리스풍 부조들과 피렌체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소중하고 있던 고대 보석 조각품들 같은 것들 말이다.
또는 을 변형해 모사했던 미켈란젤로의 ‘피구라세프렌티나타’라는 스케치라거나?
어찌되었든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까지 그려왔던 수많은 모사와 스케치들이 살아숨쉬고 있었다. 그림에 관한 한계 없는 뛰어난 암기력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그는 그저 머릿속에 이미 집어넣은 것을 꺼내어 인용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 * * *
[지금 손을 조각하는 강석의 동공이 흔들리는 거 보이시죠. 뭔가 잔상을 쫓고 있는 거거든요. 그게 뭐냐고요? 저도 모르죠. 일단 제가 볼 때는 이 손을 조각하는데만 해도 자신이 보았던 수많은 자료들을 기억 속에서 훑으며 만들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게 되냐고요? 지금 그렇게 하잖아요···?]강석이 다시 돌아와 작업을 시작한 지 3일 정도 되었을 때.
강석의 조각을 두고 수많은 분석 영상들이 만들어졌다. 대부분은 대형 너튜버들이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가 있었다.
강석은 작업을 하는 내내 실시간으로 방송을 했고, 방송을 하는 내내 강석은 그 흔한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일이 없었고 조금 구시대적으로 프린트를 보거나 자료집을 보는 일도 없었다.
사진을 슬쩍 보는 행위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즉슨, 강석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강석은 진짜 아무것도 보지 않는데 너무 사실적으로 만들어내.)] [(진짜 강석이 뭘 보고 조각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이게 가능한가?)] [(저 화면 너머에 빔 프로젝트라도 쏘고 있다거나 대형 화면이라도 가져다 놓은 거 아니야? 아무것도 안 볼 리가 없잖아?)] [(장난해? 강석은 온 사방에 카메라를 놓고 랜덤으로 시점을 돌려가며 작업하잖아. 그 어떤 카메라에서도 그런 화면 쥐뿔데기라도 비춰진 적이 없어.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는 세 번 내내 그랬다고.)] [(·········잠깐. 잠깐만. 그렇다면 오히려 미친 거 아니야? 강석은 지금 아무것도 보지 않고 3D 프린터처럼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단 소리잖아.)] [(······맞네?)]시작은 채팅방에서 평화롭게 시작된 감탄이었다.
누군가 강석의 경이로움을 평소와 같이 칭찬했는데 막상 그걸 칭찬하고보니 그게 말도 안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완벽한 창조란 없다면서 강석이 인용해온 자료들을 찾기 위해 구골에 이미지 검색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찾아오려는 시도를 했다.
결과는 실패.
그 어떤 것과도 일치하는 자료가 없었다. 비슷한 자료조차 없었다.
우연히 같은 손 모양을 찾아도 생김새가 굵직한 남자 손이 아니고 여린 여자 손이라느니 너무 근육이 없다느니 내쳐지기 일쑤였다.
강석의 손이 모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주장 또한 한 순간 부상했으나 그것 역시 아직은 고등학생에 불과한 강석의 손과 조각되고 있는 대리석 속 손이 나이대가 워낙 다른데다 생김새 역시 다르다는 게 이미지 대조로 밝혀지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강석이 조각하는 모습을 분석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것을 너튜버들이 콘텐츠로 소비하기 시작한 게 작금의 상황이었다.
[·········근데 진짜 얼마나 인풋을 많이했으면 이게 가능하지? 이게 한두번 데생하고 스케치하고 크로키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저거 봐. 저 굳은 살, 저 주름, 아니···저게 진짜 누가 봐도 운동한 손인데···운동을 열심히 한 약간 진짜 현실 나무꾼 같은 손이잖아요. 근데 열아홉이 무슨 볼일이 있다고 현실 나무꾼 손을 보겠어요. 안 그래요? 저게 다 데이터에 있다는 게···진짜 나 열아홉 때 뭐했지. 수능 볼 시간에 피시방 가서 디아하고···와.]그림 너튜버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단 결론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인정했다.
그런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모르는 강석은 그저 열심히 끌을 대고 망치를 두들겨댈 뿐이었다.
순간순간 강석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은 헬스를 하면서 수개월 동안 보아왔던 수많은 헬스장의 회원들 손이었다.
매일 봉을 잡고, 무언가를 당기고, 잡고, 버티고, 멀리 밀고, 들어 올리고, 난리를 쳐대는 회원들의 손은 매일 도끼를 휘두르는 나무꾼과 다를 바가 없었다.
훌륭한 자료를 얻은 강석은 그걸 머릿속에서 데이터화시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구도를 바꿔가고, 체형에 맞게 선택하며, 습관을 만들어내어 그 습관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근육을 붙이고, 굳은살 역시 마음대로 옮겨댔다.
마치 보정을 하듯 머릿속에서 포토샵을 해댄 강석의 눈동자가 몇 번 깜빡거리는가 싶더니 끌을 다시 망치로 두들겼다.
강석은 그렇게 손을 만들고 있었다.
강석이니까 가능한 방법이었다.
강석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를 엄청난 방법으로 조각에 임할수록 손만으로도 엄청난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잡기 위해 간절히 소망하는 손끝이 강석의 손에서 완성되어가는 동안, 사람들은 아우성을 내질렀다.
완성본을 보고싶다는 애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애원은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ㅡ 일단 여기까지만 방송하고, 다음에 또 할게요. 제가 어디 갈 데가 있어서요. 다음에 뵈요.
짤막한 인사와 함께 강석은 또 미련없이 방송을 꺼버렸다.
12월 9일의 일이었다.
* * * *
12월 11일.
밤색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밤.
강채영은 강석이 고집한 넓다란 호두나무 식탁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키보드를 두들겨댔다. 흐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강채영은 넓다란 식탁 아래에서 발을 휘둘러댔다.
이제는 식탁 모서리에 앉는 일 없이 당당하게 제 자리가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새벽의 대화를 책임지는 넓직한 식탁은 강채영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강석이 이것만큼은 꼭 제 돈으로 사고 싶다고 해서 부모님도 나뒀는데 정작 강석보다 강채영이 이걸 가장 잘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나야 좋지, 뭐.’
“흐흐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노트북을 두들기는 강채영을 바라보며 백명희가 즐거운 얼굴로 과일을 깎았다.
“오빠가 와서 기쁜 모양이네.”
“그러엄.”
대충 대답한 강채영의 시선은 여전히 컴퓨터에 꽂혀있었다.
딸깍.
백명희가 탄산수 제조기 버튼을 눌렀다.
꾹, 꾹, 버튼을 누를 때마다 연결된 탄산 실린더의 가스가 끼워놓은 텀블러에 들어가더니 이윽고 치이익, 소리와 함께 가스가 꽉 찼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잔여 가스를 텀블러에서 빼낸 백명희가 직접 담은 유자청과 청귤청이 섞인 유리컵에 탄산수를 부으며 웃었다.
옆에는 직접 깎은 토끼모양 사과를 가득담은 그릇에 예쁘게 포크가 그릇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릇도, 포크도 모두 이런저런 공방을 다니며 백명희가 하나 두개씩 만들어온 것들이었다.
삶에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진짜 그때 만들었던 강석의 이 행운의 상징이라도 되었던지 강석의 일이 잘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백명희와 강현도의 일도 술술 풀리고 있었다.
강채영이 컴퓨터를 두들겼다.
백명희가 웃으며 물어봤다.
“그래서 알바는 잘 되고?”
“응. 순조로워.”
팬카페 운영을 하면서 늘어난 외국어 실력은 이런저런 일에 쓸모가 많았다.
강채영과 윤유란은 팬카페 운영을 하면서 늘어난 외국어 실력을 팬카페 활동으로만 썩히지 않았다.
프리랜서 마켓을 통해 소소한 번역 알바를 시작한 강채영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공부 삼아 시작한 아르바이트 아닌 아르바이트는 꽤나 만족도 높게 진행되고 있었다.
항상 커뮤니티 활동을 하느라 외국어를 읽는 일이 많았던 윤유란은 외국어를 한국어로, 팬카페에 외국인들을 위한 영작을 하는 일이 많았던 강채영은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구글번역으로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보다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해주는 것이 더 단가가 높았기에, 좀 더 잘 되는 것은 강채영이었다.
강채영이 받는 페이는 한글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일로 공백제외 글자당 16원.
아직 고등학생인 만큼 글의 종류나 기한에 따라 큰 폭으로 상승하는 가격대 또한 없어 찾는 사람 역시 나날이 늘어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빠는 대체 뭘 하는 거야?”
강석은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은 뒤.
성북동 저택에 만들어놓은 작은 작업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백명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과일그릇과 유자청귤에이드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글쎄. 너희 아빠한테 듣기로는 마이애미비치에서 얻을 부수익을 만드는 중이라던데···으음. 모르겠다?”
강채영이 작업실 쪽으로 멀어지는 백명희를 물그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알아서 하겠지.”
환한 빛 속에서 강채영이 노트북을 두들겼다.
단란한 저녁이었다.
* * * *
12월 12일.
겨울의 한복판.
아트바젤 인 마이애미비치를 참석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모인 아침.
진도욱 관장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 캐리어는 뭡니까?”
캐리어를 두개나 끌고오는 강석을 보며 진도욱이 눈을 끔뻑였다.
여태까지 꾸미는 걸 본적이 없는 강석이 해외여행 간다고 캐리어를 바리바리 싸들고 온 모습이 낯설어서였다.
누구보다 단촐한 짐일 줄 알았는데. 그러고보니 첫 해외여행이라고 했던가?
강석이 별거 아니라며 웃으며 말했다.
“아트페어 같은 데서는 굿즈 같은 걸 팔기도 한다면서요. 조사장님이 그러던데···?”
조사장.
조동범의 이름이었다.
아트페어에 대해서 잘 몰라하던 사람이 그런 걸 강석에게 조언했나. 열심히도 조사를 했던 모양이다. 진도욱 관장이 수긍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서 한 번 만들어봤어요.”
진도욱 관장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강석에게 다가갔다.
“그···열, 열어봐도 됩니까?”
“당연하죠.”
진도욱 관장이 강석이 내민 캐리어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캐리어를 열자 상자에는 싸인이 가득한 자그마한 종이상자와 반대쪽에는 뽁뽁이 포장지에 휩싸인 투명하고 형형색깔의 기다란 뭔가가 보였다.
뭐지?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의구심을 입으로 꺼내기도 전. 진도욱 관장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처음으로 한 것은 투박한 사각형태의 종이상자를 열어보는 것이었다.
종이상자 안에는 정사각형 형태의 뚜껑달린 작은 유리병 같은게 들어있었다.
거기까지만 봤는데도 진도욱은 이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다소 빠른 손놀림으로 진도욱이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점점 유리병을 꺼내는 진도욱의 눈동자가 커져갔다.
유리병 안에는 노을이 담겨있었다.
그것도 어디서 많이 본 노을이었다.
.
노을의 연작이었던 그 낙조를 담은 노을을 잉크로 표현해낸 것이 분명했다.
만년필과 잉크에 대해 조금 아는 바가 있는 진도욱 관장이 잉크병을 슬쩍 흔들었다.
“안료(pigment)입니까?”
“염료(dye)요.”
염료.
물에 희석되는 수성잉크라는 말이었다.
···물감으로 써도 될 정도로 점도가 높은데 염료라고?
신기하다.
염료라고 했으나 순간적으로 점도 높은 안료(유성)라고 착각할 정도로 진했다. 아니, 그 이상. 마치 물감으로 써도 될 정도로 잉크 자체가 꾸덕한 느낌이였다. 유리병 너머에서 바라볼 때의 느낌만큼은 그러했다.
진도욱이 이리저리 잉크병을 굴리듯 흔들어보았다.
어쩐지 이렇게 보니까 또 수채화 느낌의 투명함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어찌되었든 염료라는 건, 흐름의 끊김 없이 부드럽게 필기가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이런 꾸덕한 질감으로 그런 필기감을 준다니. 진짜라면 엄청나겠는데···?’
진도욱이 신기해하며 잉크병을 굴리는 사이.
인천공항 창을 뚫고 아침햇살이 비쳐왔다.
햇살이 잉크병에 닿자 각도가 기울어진 잉크병의 색깔이 변화했다.
“···SHEEN(씬, 테)이다.”
양에 따라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하거나, 말랐을 때 잉크 자체의 색이 아닌 다른 색의 테두리가 뜨는 것을 씬, 또는 테 잉크라고 부르는데 그 기법이 가미된 것 같았다.
그리고 어둡게 그늘진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펄이 안쪽에서부터 은하수가 번지듯 밀려왔다.
“이건···”
“SHMMER(쉬머, 펄)요. 작업하면서 돌가루가 날리는데 그게 꼭 밤하늘에 번진 별가루 같길래 잉크에도 그런걸 가미하면 좋겠다 싶었어가지고요. 하늘 너머에는 별들이 있잖아요.”
신난 얼굴로 설명하는 강석의 낯이 어린아이의 것으로 변해갔다.
일부러 펄감을 적게 넣어 쉬머 밑에 잔잔하게 깔리기를 원했다고 말하는 이는 하늘 너머의 풍경까지도 잉크에 담고 싶었다고 신이 나서 덧붙였다.
진도욱 관장이 잉크병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테 잉크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펄 잉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이 두 기법을 한 잉크에 구현해내는 브랜드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브랜드고, 강석은 개인이었다.
진도욱이 잉크병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 같은 색깔이겠죠······?”
“예. 그렇죠?”
이만한 양을···두 가지의 기법을 섞어 정확한 양을 제조했다고.
“······혹시 평소에도 만년필이나 잉크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그럼 이 굿즈는 언제부터···저희 블룸 미술관과 함께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에 가고 싶다고 하셨을 때부터 준비하신 건가요? 아니면 연작을 만들었을 때부터 ···?”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까먹고 진도욱의 입술이 주저리 주저리 움직였다.
항상 긴장과 겁만큼은 놓치는 법이 없는 진도욱 관장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다 놀랄 정도로 평온한 어조였으나, 그들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강석은 항상 질문을 받는 것에 익숙했기에.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3일 전이요.”
“3일······?”
3일 전이면, 양선구 선생님의 한옥채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을 종료한 시점이었다.
그때부터 집에 돌아가기까지 시간이 또 있었을테니 실제 시간은 그것보다 짧다고 봐야했다. 아니, 거기에서 딥펜을 만드느라 조동범 공예가님의 유리 공방을 찾아가야 했을 테니···또 시간을 빼야 했다.
아니지.
거기에 처음 만들어보는 거니까 만년필 잉크를 만드는 방법부터 익혀야 했을 거다.
허.
그랬을 텐데도 이게 이렇게 되었다고?
진도욱은 갑자기 눈앞에 별이 뜬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마치 운동을 한계 가까이 오래했을 때 느끼는 현기증과 비슷한 어지럼증이었다.
인천공항에 빛이 강석의 머리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에서 별이 되어 머무르고 있어야 할 사람을 이 세상에 잘못 내린 게 틀림 없었다. 이게 인간의 영역인가. 신의 손을 훔쳐왔나. 말도 안 된다. 입 안을 맴도는 것은 온통 부정(不正)이었다.
대단하다 못해 무서웠다.
게다가 씬과 쉬머를 넣는 선택은 또 뭔가.
만년필 잉크를 쓰는 사람들은 이런 기법들이 들어가지 않은 스탠다드한 잉크들을 찾는 이들이 좀 더 많지만, 이렇게 100개 한정으로 딥펜과 잉크를 세트로 팔거라면 이런 특이한 기법을 넣은 것을 더 선호할 것이다.
‘그런 것도 감각적으로 깨닫고 알아서 선택한 건가? 아니 그걸 또 감각적으로 알았다고 해서 이렇게 만드는 게 가능한 건가? 쉬머와 씬 기법을 적용하려면 또 익히는데 시간이 걸렸을 텐데···’
이건 단순히 대박이라는 말로 부족했다.
출판에 이어서 이 굿즈까지 성공적인 기록을 거둔다면···이 과정에 걸린 시간을 알게 된다면, 세상은 강석이 가만있고 싶어도 가만있게 두지 않을 터였다.
온 세상의 사업가가 강석의 집 문을 부서져라 두들길 테니까.
강석은 지금, 자신의 예술성뿐만이 아니라 사업성까지 입증해보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진도욱 관장의 시선이 이번에는 뽁뽁이 쪽으로 향했다. 하나가 잉크라면, 이 투명하고 형형색깔인 것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투명한 포장지를 거두자 유리 딥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도 포장지가 꼼꼼히 쌓여있는 것을 보건데 이쪽에 있는 것들이 전부 같은 유리딥펜일 터였다.
진도욱 관장이 유리 딥펜을 들어 올렸다.
“직, 직접 써봐도 될까요?”
유리 딥펜 끝에는 유리인간이 달려있었다. 가만 보던 진도욱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갔다.
유리인간도 어디서 많이 본 것이었다.
“아. 이것들은 일부러 딱 100개를 맞춘 거라 안되고, 테스트용이 있어요.”
100개.
그러고 보니 의 연작이었던 를 구성하는 유리 인간이 딱 100개라고 들었다.
진도욱의 시선이 잘 포장된 유리딥펜의 끝으로 향했다. 가만 보니 달려있는 유리인간들의 체형도 색깔도 다 달랐다.
“설마···”
“아아. 예. 를 구성하는 유리인간들을 본따서 짝별로 만들었어요. 꽤 의미있는 굿즈로 만들어보고 싶었어가지고요. 좀 괜찮죠?”
테스트용 딥펜과 잉크병을 건네며 강석의 옅게 웃었다. 저 웃음이 번지는 입꼬리에는 본인이 생각해도 괜찮은 굿즈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진도욱 관장이 딥펜과 잉크병을 넋을 놓다시피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여기 종이요.”
노트를 하나 꺼내 펼쳐주는 강석의 동작을 응시하며 진도욱 관장이 미치겠다는 듯 푸르르 입술 끝을 떨었다.
···좀 괜찮냐고.
······지금 좀 괜찮냐고 물은 건가?
“허···허허, 하.”
진도욱은 유리병을 열어 딥펜을 잉크병에 푹 찍었다. 잉크병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딥펜을 바라보는데 그 끝에 달린 것이 기존의 100 자루 딥펜과 달리 투명한 유리 인간이 달려있는 게 보였다.
일부러 이건 컬렉션에 없다는 뜻이 분명했다.
한정판 이후에 후속 제품 판매의 가능성도 생각해서 이렇게 한 건가.
“하하.”
·········이건 좀 괜찮은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혁명이었다.
딥펜을 열자 쉬머와 씬 기법이 들어간 잉크가 꾸덕하게 묻어나왔다. 노트를 향해 딥펜을 움직이며 진도욱 관장이 입술을 달싹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잉크들에는 이름이 있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무엇인가.
원초적인 궁금증이 몰려왔다.
“혹시 이 잉크에 이름이 있습니까? 왜 잉크에 보면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심해라거나···산밤이라거나···”
“아. 요.”
“···”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진도욱 관장의 펜 끝이 두껍게 선을 그렸다. 그 순간 진도욱 관장의 시선이 잉크가 세어나오는 곳을 향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이거 일부러 그런지 몰라도···아니, 일부러 그랬겠지. 진도욱이 관장이 순응하듯 45도로 세웠던 펜촉을 눕혔다.
그러자 유리 딥펜임에도 양동이에서 물이 흐르듯 잉크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일반적인 딥펜 펜촉 끝에서나 볼 수 있는 잉크를 순간적으로 담을 수 있게 파여져 있는 홀이, 이 글라스 펜에도 파여져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흘러내린 잉크는 종이에 노을을 제멋대로 펼쳐놓기 시작했다.
꽉 채워지는 풍경은 하늘의 구름과 지는 해와 번져가는 붉은 빛, 낙조落照였다. 노을이 지는 풍경을 종이에 오려넣기라도 한 것처럼 종이는 그저 실패없이 아름답게만 물들어져갔다.
글씨를 써볼 필요도 없었다.
눕힌 펜에 흘러내리는 잉크를 바라보며 진도욱은 생각했다.
‘이라고 했던가···?’
정말 지독히도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86. 신의 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