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91
1891 (2)
클레이오가 녹초가 된 채 아세르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이 이슥해 하늘빛이 밝아지려는 시간이었다.
‘와, 진짜. 노인네들도 많던데 다들 체력 미쳤어. 갓 스무 살 된 대학 신입생도 아니고, 서울이었음 첫차 다닐 시간까지 술 마시고, 춤추고 놀다니… 그게 상류계급 스웩이냐. 난 조상이 노빈가 봐. 시켜 줘도 못 한다.’
디너 재킷과 웨이스트 코트, 타이와 브레이시스 전부를 뱀 허물 벗듯 바닥에 던져버린 클레이오는 마지막으로 신발과 양말까지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채 침대에 푹 파묻혔다.
털푸덕!
“으윽.”
그런 클레이오 위로 베헤못이 다이빙 해 뛰어들었다.
흰 시트 위로 가무잡잡한 털이 마구 묻어났다. 밤새 제공된 펀치와 샴페인을 몇 잔이나 더 마시더니, 역시 취한 모양이었다.
배를 드러내고 골골거리는 베헤못에게 깔린 클레이오가, 고양이 턱 아래를 살살 긁어주며 말을 걸었다.
“못아, 못님. 못 선생님.”
“뭐냐.”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었지. 응?”
“그러하다. 왕실 만찬회의 위명은 허명이 아니었다. 본묘 매우 만족스럽도다.”
말이 많아진 베헤못은, 술에 꼬인 발음으로도 랍스터 다음으로 나온 버터에 소테한 혀가자미 뫼니에르가 끝내줬다느니, 접시에 사붓이 고인 레몬과 버터 향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느니 조잘거리며 꼬리를 파닥거렸다.
“다행이네, 영묘 선생님. 그렇다면 도의를 생각해서라도 대답 좀 해줘. 멜키오르 그 작자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
기묘한 자세로 뭉쳐있던 베헤못이 하품을 거듭하다 성의 없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정체가 뭐냐니, 인간 아니냐. 에테르 레벨은 보통이지만 감응력이 괴이할 정도로 폭발적이고, 괴상한 성흔이 두 종류나 있긴 하더군.”
“그래, 우리 못 님께선 원래 성흔의 종류를 알아볼 수 있지. 그렇담 성흔의 제약 역시 알 수 있어?”
“엣헴, 본묘는 위대한 영묘이니라. 당연하지. 야옹냥냥의 매혹이야 패시브 스킬이지만, 간파의 구조시는 흐름이 묶여 있었다.”
“…야, 야옹냥냥…의 매혹이 뭐냐? 스킬이 정말 그런 이름이야?”
‘□□□에는 또 다른 뮤즈의 이름이 감추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야옹냥냥이라니…? 피곤해서 귀가 맛이 간 건가?’
고뇌에 빠진 클레이오를 베헤못이 꼬리로 팡팡 내리쳤다.
“야옹냥냥!”
“못 선생님, 고양이의 고등 언어가 아니라, 하찮은 인간의 말로 해주면 안 될까?”
“애 진즉에 인간의 말로 하고 있다! 왜 못 알아듣느냐!”
클레이오가 자신의 말을 속 시원히 알아듣지 못하자, 베헤못은 점점 더 크게 냥냣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몇 번을 거듭해도 ‘매혹’을 수식하는 뮤즈의 이름은 클레이오에게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글로 써줄 수 없을까 부탁해 봤지만, 베헤못이 앞발로 그려내는 문자는 클레이오에게 해독되지 않았다. 그냥 고양이 앞발질로만 보였다.
성질 급한 고양이와 기력 없는 한 사람이 야밤의 사투를 벌이던 와중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클레이오의 손에 끼인 약속이 급작스럽게 빛났다. 그것은 일종의 경보처럼 보였다.
[귀속 아이템: 클리오의 약속―서사 개입도의 불충분함으로 인해, 「이해」의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누락된 말은 서사 개입도의 필요 충분치를 획득할 경우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오! 하필, 시발! 그놈의 서사 개입도!’
긴 한숨을 내쉰 클레이오는 그냥 침대 위에 완전히 퍼져버렸다.
제 성질을 못 이겨 애먼 베갯잇을 쭉쭉 긁어놓은 베헤못도 할딱이며 클레이오 위로 엎어졌다.
‘…그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지. 그나마 서사개입도가 30%를 넘어도 이 정돈데, 더 이전에 못에게 뭘 물어봤으면 아무것도 못 건졌겠어.’
너무 피곤하니 화를 내기도 귀찮아진 클레이오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곤 베헤못의 미간을 살살 긁어주었다.
“어차피 못 듣는 건 못 듣는 거니 넘어가자. 그럼 간파의 구조시가 묶여 있단 건 무슨 뜻이야?”
“대부분의 고유 스킬은 발동 횟수가 무한하지 않다. 이미 그것은 전부 쓰여 버려, 특정 조건 충족이 필요한 상태였다. 조건은 본묘조차도 알 수 없다.”
역시 클레이오 자신의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다.
왕세자는 그런 무시무시한 스킬을 가지고도 어쩐지 너무 열심히 산다 싶었더니, 스킬의 한계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못 선생님은 위대하십니다. 그 위대한 통찰로 알 수 있는 특이사항이 더 없을까?”
“특이사항이라니?”
“멜키오르는 사실 인간이 아니라거나, 다른 차원의 존재라거나, 하다못해 마수라든지.”
“너는 술도 안 먹고 왜 개소리를 하냐. 왕세자는 인간이다. 오로지 인간들 중에서 왕과 왕세자가 나오는 것이잖느냐.”
“인간이라. 나 같은? 아서 같은? 아니면 첼이나 이시엘 같은?”
빙의자, 세계의 안위와 깊게 연루된 존재, 일반적인 등장인물.
세 종류 다 사람이라면 사람이겠지만, 클레이오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네 물음의 요점이 무어냐? 인간이 인간이지.”
“이도저도 아니면 므네모시네 여신의 딸들에게서 가호를 받았다든가….”
“신은 그런 방식으로 힘을 행사하지 않으신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행사하시는데?”
“웨오오오오오오웅! 웅냐아아아앜! 뭬우웈! 먉!”
늘상 또렷하게 들리던 베헤못의 심술궂은 목소리가 짐승소리로만 들리니, 클레이오의 마음도 좋지가 않았다.
게다가 고양이의 설교가 계속될수록, 약속의 메시지가 중첩되어 떠올랐다.
빛 때문에 눈만 부신 게 아니라, 마치 정전기가 오르듯 약속이 끼인 손가락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금빛 스파크가 튀었다. 클레이오는 반사적으로 베헤못의 몸에서 손을 떼어냈다.
[귀속 아이템: 클리오의 약속―서사 개입도의 미달로 기능사용이 제한됩니다.]
반지는 흐느껴 울듯이 떨렸다.
이것을 가지게 된 후, 처음 보는 이상 반응이었다.
오히려 그 때문에, 클레이오는 이 지점을 더 파고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이야기는 그만두자. 그럼 왕세자에게선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없었어? 내가 물에 빠졌다 살아난 뒤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이 그런 건?”
“없다. 그는 그 육체와 그 영혼으로 태어나 지금에 이른 자다. 왜 싸워 못 이길 것 같으니 사람 아닌 것으로라도 취급하고 싶으냐? 헹, 소심하긴.”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근데 뭐, 베헤못 너도 별거 없잖아. 진실의 눈은 세계가 아홉으로 나뉘기 전의 권능이라고 자랑하더니속 시원히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없고.”
“요놈이! 말해도 못 알아 처먹는 건 네가 모자란 탓이지 어찌 이 영묘를 탓한단 말이냐!”
파아앙!
두툼한 앞발로 얻어맞은 클레이오는 베개 속으로 고개를 푹 파묻고 말았다.
“으윽!”
“흰소리 말고 이제 자라!”
클레이오의 옆구리로 굴러 내려와 거대한 몸을 둥그렇게 만 베헤못은 곧 도르릉도르릉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클레이오 역시 눈을 감았지만, 피곤이 지나치니 각성 상태가 이어져 잠이 확 들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판타지 세계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이질성이, 클레이오의 눈꺼풀 아래에서 새롭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만찬장.
첼이 샴페인 쿠페를 집어 들고 베헤못과 함께 새로 딴 리오그네스 블랑 드 블랑의 향을 맡는다.
글리씨니 포도로만 만든, 단맛이 적고 아로마가 강한 특별 제조품이라고 첼은 잘난 척하며 알려주었다.
블렌딩 없이 샤르도네 품종의 포도로만 만드는 샴페인인 블랑 드 블랑은, 포도 작황을 안정시킬 수 있게 된 20세기의 산물이었다.
알비온 왕국에선 글리씨니 품종의 포도로만 만든 와인을 블랑 드 블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글리씨니 포도는 샤르도네와 맛이 거의 같았지. 뮈카텔은 피노 뫼니에고… 이곳의 샴페인은 19세기 취향으로 달지 않아. 내가 알던 20세기의 맛이지. 지금은 고작 1891년인데.’
뭐든 그런 식이었다.
본래의 세계와 한없이 비슷하다가도 한없이 다르다.
‘여긴 이상한 세계야.’
눈을 감으면 왕실의 중앙홀을 울리는 노랫소리, 이국의 말들, 사람들의 수군거림, 쌍둥이들의 웃음소리, 아서의 실없는 농담, 멜키오르의 목소리, 아슬란의 팽팽히 당겨진 기색 같은 것이 떠오른다.
생각은 곧 왕성을 벗어나고, 강물을 건너고, 학교를 넘어서, 동안과 서안, 기차의 차창 뒤로 멀어져 가는 평원과 산맥으로 확장된다.
데르니에 대륙의 알비온 왕국.
이곳에서는 감자를 검게 죽이는 전염병이 대륙을 휩쓸지 않았다. 산업화된 농지에선 풍부한 양의 산물이 났고, 기록이 남아 있는 동안 대륙 전체의 식량 작황은 늘 아주 좋았다.
대기근을 겪은 세대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도 길에서 굶어죽거나 구빈원에서 얼어 죽지 않았다.
‘페니실린과 수혈이 없이도 사람들은 꽤 오래 살고, 손쉽게 죽거나 불구가 되지 않지. 치유 마법이 있으니까….’
카롤링거의 독재자 빅투아르 모로의 공포정치조차도 ‘정진’이 알던 대혁명과 같은 규모로 죽음의 물결을 일으키지 않았다.
‘내가 너무 쩔은 현대인이라… 멜키오르나 아슬란 더러 히틀러나 스탈린 운운한 게 약간 어색해질 정도야. 그 두 왕자조차도 몇백만 명을 학살하거나 숙청하지는 못하니까.’
‘정진’이 태어났던 세계와, ‘클레이오’로 거듭난 두 세계의 근본적 차이는 마법의 존재로부터 기인한다.
석탄 대신 에테르로 산업화의 기틀을 다진 문명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공업이 발전해 있지만, 강은 깨끗하고 공기가 여전히 투명한 세계.
이곳의 무역은 칼과 성경을 앞세워 시작되지 않았고, 이 세상의 사람들은 피부색이 다른 인간을 상품으로 거래하지 않았다.
신대륙은 발견된 적 없고, 데르니에 대륙보다 남쪽에 위치한 메레디에스 대륙의 국가들 역시 동등한 무역 상대일 따름이었다.
‘쓰는 무기나 마법의 발동 방식이 상이하다 하더라도 에테르 감응자 자체는 전 세계에서 비슷한 비율로 태어나는 것 같아. 그게 국가 간의 기술 격차를 메꾸어 주고.’
이곳은 인류가 저질러온 죄악을 보완한 것 같은 세상이었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더 우월한 능력을 가졌으니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으련만, 철저하게 인간의 법과 규약, 혹은 명예와 의무의 영광으로 묶여 있는 세계.
‘실제의 세계에서 인간은, 에테르처럼 대단한 힘을 빌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동족을 살해해가며 근대를 이룩한 종족이었는데.’
이상한 핍진성을 가지는가 하면, 어떤 부분에선 동화 속 세상처럼 다정하기만 한 이곳은 인류 전체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총량이 적은 세계였다.
‘정진’은 그 구조 아래에서 저자의 그림자를 본다.
대전쟁을 겪은 작가들은 판타지를 써도 그들 생의 잔영이 작품에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이 세계는 폭력의 세기를 살아낸 저자가 어떤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창조한 질서 아래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쓰이지 않은 부분이 쓰인 부분보다 강력하게 저자의 의도를 웅변하는 법이고.’
이런 유토피아적 기획을 한 사람이 ‘정진’ 자신의 또래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동기가 아니라면 교수인가? 근데 교수 중에서도 2차 대전이나 한국전쟁 참전했을 만큼 나이 든 사람은 없었는데.’
저자에 대한 추측은 점점 깊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새로운 가설을 돌이켜보기도 전에 눈사태 같은 수마가 클레이오를 덮쳐 왔다.
마침내 긴 밤이 끝나고 있었다.
1891년의 1월 1일이었다.
***
만찬회 뒤로는 신년회가 이어졌다.
수도상인조합의 연회와 수도방위대 주최의 자선연회에 디오네와 함께 참석한 클레이오는, 또 예의 청년실업가 흉내를 내느라 진을 뺐다.
디오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클레이오의 춤 솜씨는 조금밖에 나아지지 않아, 줄곧 그녀의 호통과 야단에 시달렸음은 물론이다.
클레이오는 무도회 따위 다시는 가지 않겠노라 속으로 결심한 참이었다.
물론 고생에 성과는 있었다.
아니, 그 정도로 애를 썼는데 성과가 없었으면 허탈했을 것이다.
‘크뤼엘 공작은 사실 아슬란 본인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왕비인 쥴레이카를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걸 알았지. 의외로 둘 사이는 서먹하고 말야.’
수도상인조합의 신년회에 참석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곳은 말이 상인조합이지 일종의 경제인 연합으로서,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단체였다.
‘가장 최신의 정보는 돈이 도는 곳에 있는 게 만고불변의 법칙이고.’
원래 세상에 여의도 증권가 찌라시가 있다면, 이쪽에는 증권거래소가 자리한 서안의 베아투스 자치구에서 업계인 사이에 도는 짧은 소식지가 있었다.
클레이오는 「지각」을 쏠쏠히 이용하며 무도회장 안의 정보를 모조리 긁어모았다.
‘작년 말 오페라 시즌에, 아슬란이 군사훈련인지 뭔지로 자릴 비울 때, 공교롭게도 딱 맞추어 쥴레이카 역시 호수 궁전으로 요양을 갔었다고?’
왕비가 받게 되는 니네베 호수의 여공작이란 직위는 본래 레오니드 1세의 왕비 이솔트의 것으로서, 이름뿐인 명예직이 아니었다.
니네베 호수의 여공작은 니네베 호수를 비롯하여 호수에 뜬 아홉 섬과 본섬에 세워진 궁전을 영지로 다스리게 된다.
신년회에 다녀온 다음 날, 클레이오는 데르니에 대륙 전도를 사서 침실의 책상 위에 펼쳐두었다.
니네베 호수는 클로토 강 상류에 위치하여, 핀토스 산맥으로부터 녹아내린 빙하가 고인 깊고 거대한 호수였다.
게하임이 납치당했던 페셀른 시와 니네베 호수는 직선거리로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거, 정말로 수상하잖아.’
눈앞의 데르니에 대륙 전도에 심정적 빨간 줄을 긋게 되는 클레이오였다.
‘조만간 프란에게 이런 정보를 다 정리해서 보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