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89
“어?”
익히 알고 있는 얼굴.
“에텔라 선생님?”
아름다운 관계라면 에텔라가 울고 있을 리가 없기에 리안은 사태를 파악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곧바로 대직도를 꺼내 든 그가 땅을 박차고 나가자 샤갈이 고개를 돌렸다.
야수처럼 몸을 빼낸 그가 본능대로 두 팔을 들자 속사검이 후두두 쏟아졌다.
손유정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우와, 무슨 살기가…….’
수십 개의 단도가 동시다발적으로 날아들었으나 리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흐으으읍!”
한 번의 휘두름으로 단도를 튕겨 낸 그가 대직도의 넓적한 면을 방패 삼아 밀고 들어갔다.
“어?”
그 순간 시로네는 에텔라와 샤갈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사슬을 발견했다.
“리안! 잠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안이 신적초월의 힘으로 샤갈을 벽에 짓눌렀고.
“쿨럭!”
압력을 이기지 못한 샤갈의 입에서 핏물이 한 바가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가리고 있던 에텔라가 울컥하더니 똑같이 피를 쏟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리안이 맹수처럼 노려보는 샤갈에게서 물러섰다.
“뭐야? 어째서 저분이…….”
시로네가 침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태극의 사슬.”
최악으로 얽혀 버린 것이다.
연쇄 작용 (1)
샤갈은 이를 악물었다.
“크으으으!”
수십 자루의 속사검이 실체화되고 그것을 전부 휘두르며 리안에게 돌진하는 그때.
에텔라가 소리쳤다.
“멈춰요!”
그녀의 진심이 샤갈의 육체를 지배하면서 사슬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크윽!”
쿵 하고 뒤로 넘어진 샤갈을 시로네 일행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선생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에텔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보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이미 정신이 꺾인 모습을 보여 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넝마처럼 너덜너덜한 옷을 다시 걸쳐 입은 에텔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벽을 붙잡아야 했으나 점차 체력이 되돌아왔다.
“보는 것 그대로예요. 저는 샤갈을 끌어안고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 대가로 이런 벌을 받고 있죠.”
“정화 시간은?”
시로네가 묻자 인포메이터의 목소리가 동굴 바깥에서 뚫고 들어왔다.
“87해 2,875경 3,241조…….”
에텔라의 체념이 이해가 되었다.
샤갈에게도 의미심장한 숫자인지 살기를 지우고 동굴의 벽에 등을 기댔다.
“쳇! 귀찮게 방해하고 있어.”
에텔라가 말했다.
“시로네, 통곡의 골짜기에 진성음이 있습니다. 그녀 또한 모든 업을 받아들이고 묶여 있는 상태예요. 부탁입니다. 그녀를 구해 주세요.”
“저도 그것 때문에 지옥에 온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도 구할 겁니다.”
시로네는 방법을 설명했다.
에텔라를 구하면 샤갈도 구하는 게 되겠지만, 고민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러지 말아요.”
자신을 불태워 지옥을 정화하려는 리안과 심령권을 닫고 인류를 구한 진성음.
‘그들에 비하면 나는…….’
악마 같은 남자와 뒹굴고 있을 뿐이다.
“떠나 주세요. 진성음을 구하는 것도, 시로네 군을 찾는 것도 포기한 사람입니다. 저는 싸울 자격이 없어요.”
“자책하지 마세요.”
시로네는 에텔라를 알고 있다.
‘천국에서 사탄과도 맞설 만큼 정의로운 사람.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샤갈을 품을 수 없어.’
죽을 수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증오하는 남자와 얽히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겠지.’
이면 세계에서 업이라는 것은 해결의 대상이 아닌 감당해야 하는 무게일 뿐.
‘애초에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업이 부여된다. 리안이 특이한 경우일 뿐이야.’
정화 시간이 계급장은 아니지만 87해의 시간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선생님의 능력이 필요해요. 태극의 힘은 분명 우리가 하려는 일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정화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 빌어먹을 사슬을 끊을 수 있다고?”
샤갈의 말에 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넌 조용히 해.”
사슬로 얽혀서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일 뿐 그에 대한 분노는 여전했다.
“크크크, 잘됐군. 어이, 가자고. 너도 내가 지긋지긋할 거 아냐? 자유를 얻고 싶지 않아?”
에텔라는 샤갈과 눈을 마주쳤다.
“…….”
오직 그들만이 알고 있는 어떤 감정이 전해지자 샤갈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흥.”
죄책감 따위는 없다고, 그는 다짐했다.
“좋아요, 내 힘이 도움이 된다면. 하지만 잠시 시간을 주면 안 될까요? 몸을…….”
육체를 깨끗이 하는 것으로 마음을 씻어 내고 싶었다.
“네.”
시로네의 몸에서 미라클 스트림이 피어오르더니 핸드 오브 갓이 동굴을 뚫었다.
손유정이 고개를 쳐들고 입을 벌렸다.
“우와.”
전투는 이미르가 최고겠지만 야훼의 능력을 볼 때는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거대한 빛의 손이 산을 움푹 파내더니 맑은 물이 되어 구덩이를 채웠다.
순식간에 작업을 마친 시로네가 말했다.
“손유정, 새 옷을 드려.”
마테리얼의 능력으로 의복을 만들 수 있지만,
“네이.”
손유정이 머리카락을 뽑았다.
옷가지가 전부 만들어지자 에텔라가 그것을 품에 안고 고개를 들었다.
“하나 더…… 부탁해도 될까요?”
리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구긴 가운데 시로네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샤갈의 옷도.”
“진짜요? 저 녀석 엄청 나쁜 놈인데. 아까도…….”
야훼의 눈빛이 정면으로 쏘아져 들어오자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아, 알았어요.”
필요한 것들을 챙긴 에텔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가요.”
샤갈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리안을 노려보다가 혀를 차며 일어섰다.
“사슬이 풀리면 너부터 죽여 주마.”
리안이 답했다.
“제발 그러기를 바라지.”
두 사람은 시로네가 만든 호수에 도착했다.
무릎을 꿇은 에텔라가 우선 목을 축이더니 손에 물을 담아 고개를 돌렸다.
샤갈이 중지를 들었다.
“너나 많이 처마셔.”
넝마 같은 옷을 벗고 에텔라가 몸을 씻자 샤갈의 기분은 더욱 불쾌해졌다.
“한동안 맛이 가 있더니, 이제 다시 싸울 기분이 드나? 하긴, 이 사슬만 끊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지.”
“당신도 와요.”
몸단장을 끝낸 에텔라가 불렀다.
“…….”
“악과 싸우기 위해서는 마음이 정갈해야 합니다. 이게 도움이 될 거예요.”
“악? 미쳤냐?”
샤갈이 소리쳤다.
“내가 악 중의 악이야! 어떤 악도 나에게 공포를 줄 수 없어! 그런데 뭐? 마음이 어쨌다고?”
“샤갈.”
에텔라의 진심이 사슬로 전해졌다.
“크윽.”
“당신이 나를 함부로 할 수 있듯이, 나는 당신에게 선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와요.”
“짜증 나게.”
더 우스운 꼴을 보이느니 그냥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샤갈이 걸어갔다.
“여기에…….”
샤갈이 얼굴을 들이밀고 엎드리자 에텔라가 물을 떠서 머리를 감겨 주었다.
“라파엘 대주교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악의 힘이 이기심이라면, 선의 힘은 희생이다.”
자신이 직접 죽인 사람의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샤갈은 침묵했다.
“선이 악을 부수는 것은, 그 또한 악과 다르지 않다. 희생해라, 에텔라. 악이 강해질수록 더욱.”
그녀는 샤갈의 머리에 비누 거품을 냈다.
“그것이 바로 음양의 상성. 악은 부수는 게 아니라 선으로 바꾸는 것일지니…….”
“좋은 사람이군. 내가 죽였지.”
여전히 속을 긁는 샤갈의 말이었으나 에텔라는 더 이상 화내지 않았다.
“그래요. 라파엘 대주교님이 마지막 순간에 당신을 용서하셨던 것은, 선과 악의 거대한 싸움을 예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악을 파괴한다고, 악이 없어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선이 된다면…….”
“네가 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분명 그렇죠.”
희생이 클수록 악의로 변하기는 쉬운 법이고, 에텔라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당신을 원망하고, 내 상황을 저주하고. 하지만 이제 끝났습니다. 당신과 나의 여정도 이게 마지막일 거예요.”
쏴, 물이 부어졌다.
‘마지막.’
샤갈의 긴 머리가 커튼처럼 얼굴을 가린 가운데, 그의 뺨으로 물이 떨어졌다.
***
성전은 대소란이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성전이 열린 와중에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이건 명백한 공격 행위입니다.”
기스는 삿대질을 할 정도로 파라스의 국왕 키트라에게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것이오?”
“이, 이……!”
천사들을 쓸모없게 만들었잖아.
핵심은 그것이었다.
세계 각지에 피라미드가 세워지는 바람에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차라리 잘된 일 아닌가?’
타국의 입장에서는 천사들의 힘이 무력화되었다는 사실에 박수를 칠 일이었다.
‘우리가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잖아?’
키트라가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초고대 문명을 세운 것은 내 의지가 아니오. 그리고 막을 수도 없지.”
코로나 왕국이 맞받아쳤다.
“이미 황도12궁이 율법을 조작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소. 증거도 있소이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텐데.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들이니 알고 있겠지. 신의 개입을 인간이 막아 낼 수는 없어.”
“신이 아니오.”
성전의 모두가 옵저버 자리를 돌아보았다.
종교적인 내용 외에는 말을 아끼던 콘스탄틴 교황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신께서는 저런 무식한 구조물로 인간의 삶을 파탄 내지 않습니다. 저건 악마의 재앙입니다.”
“악마라.”
키트라는 피식 웃었다.
“항마부의 성기사들이 피라미드를 조사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증거를 수집할 겁니다. 그리고 만약 키트라, 당신이 이단이라면…….”
콘스탄틴이 눈을 부릅떴다.
“내 손으로 직접 당신을 벌할 것이오.”
라미교 최고의 신성력이라 칭해지는 황금빛 광채가 회의실에 가득 찼다.
‘역시 엄청나구나.’
사람들의 시선이 하비츠를 찾아 헤맸으나 예상했던 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교황은 이를 갈았다.
‘이 사건마저 피해 가는 건가? 간사한 놈.’
은근히 힘의 대결을 기대했던 그는 감정 그대로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첫 만남 이후 그가 아직 교황령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보고를 통해 들었다.
‘무슨 짓을 꾸미는가?’
하비츠와 위저드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시로네가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맞췄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