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87
00787 180. 가속 =========================
세 환수들이 형진을 찾아갔을 때, 그는 캠코더를 들고 아기 공주들의 모습을 촬영하는 중이었다.
“아이구, 예뻐라.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건가 몰라.”
“빠아! 나 예뻐여?”
“예쁘다마다. 뻐뻐!”
“꺄하하하하!”
누가 딸 바보 아니랄까봐.
하지만 요즘 들어 아기 공주들이 더 귀엽고 예뻐진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원래부터도 귀엽긴 했다. 그러나 남동생이 태어난 것이 자극이 되었는지, 아니면 벌써부터 성장기가 찾아온 것인지 하루가 다르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쑥쑥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새로 태어난 아이를 돌본다 뭐다 해서 정신이 없는 형진의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자라가는 아기 공주들의 모습을 지금처럼 캠코더로 찍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들이 근처에 와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열둘이나 되는 아기 공주들의 모습을 캠코더로 찍느라 정신없는 형진의 모습이라니.
아이들이 너무 빠르게 자라는 것이 아쉬워서 그 모습이나마 이런 식으로 남겨두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잠시 기다렸지만, 자신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촬영에만 몰두하고 있는 형진의 모습에 결국 쿠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걸었다.
“크흠. 스승님.”
“응? 무슨 일이야?
“…”
자신들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캠코더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대답하는 형진의 모습에 그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다음에 올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당분간은 아기 공주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듯한 모양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환수들의 미래에 대해서.”
“그래?”
환수들의 미래라니. 너무 거창한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캠코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형진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단 사무실로 가있어. 바로 갈 테니.”
“알겠습니다.”
완전히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에 그들은 조금 허탈한 기분까지 느끼며 사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채 몇 분 지나기도 전에 형진이 뒤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저기… 공주님들은.”
규설이 그렇게 묻자, 형진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 촬영이야 계속하고 있지. 이건 아바타야. 뭔가 문제라도?”
“아뇨. 그럴 리가요.”
흑요호들도 분신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숫자는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신들은 공헌도만 충분하다면 필요한 만큼 아바타를 뽑아내어 사용할 수 있다. 어쩌면 흑요호라는 존재 자체가 신들의 그런 부분을 시험하기 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규설은 가끔 떠올리곤 한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마치 습관처럼 차를 우려내며 건네는 말에 세 환수들은 잠시 서로 눈치를 보았다. 막상 이렇게 마주 앉고 보니 뭐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한 탓이다.
결국 셋 가운데 은연중에 리더 역할을 맡고 있는 소야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왕성에 있으면서 저희들이 얼마나 작은 세계에 안주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래?”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소야는 찻잔을 들어 그가 따라주는 차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네. 그래서 저희들도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다가 저희들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인구 말인가.”
“그렇습니다.”
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들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대략이나마 눈치챈 탓이다.
“내가 비록 흑요호를 둘이나 맞이해서 아이까지 가진 몸이라고는 하지만, 그 외의 다른 종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여자를 더 맞이하는 것도 어쩐지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바보가 아닌 이상 규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모를 형진이 아니다. 처음에야 오는 여자 안 막는다는 주의로 다 받아들였다 치더라도, 아이가 늘어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차츰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중이다.
게다가 규설을 맞이하게 되면, 이번에는 다른 환수들에게서도 신부로 맞이해 달라며 여자들이 쏟아져 들어올지도 모른다. 누구는 받아들이고 누구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일. 그렇게 되면 아바타를 아무리 많이 운용하더라도 다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물론, 스승님께서 환수들 전부를 다 감당해 달라는 식의 부탁은 저희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럼?”
“다른 신들과 연결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신이라…”
그럴 듯한 얘기다. 제아무리 쭉정이 신이라도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 자신 정도는 아니더라도, 인간들과 맺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게 인구를 불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환수들의 인구를 단기간 내에 빠르게 불려나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형진은 난색을 표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나로서는 별로 좋은 생각처럼 느껴지지 않는데.”
“네? 어째서입니까.”
“첫째. 나는 환수들이 굳이 인간이나 다른 종족들과 같은 길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너희들은 어떻게 보면 신보다도 더 오래된 종족이고, 그에 걸맞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종족에게는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는 다른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건…”
“둘째. 내가 다른 신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또한 다른 모든 환수들을 포트니아 테론으로부터 위임받아 거느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들에게서 자신의 반려를 선택해 맞이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얘기는 되지 않는다. 신들은 물론이고, 환수들 역시 자신의 반려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옳은 일 아닐까.”
“…”
사실 강제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불만이 있더라도 그가 명령이나 지시를 내렸을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이들은 몇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바보짓이다. 그것도 자칫하면 지금껏 공들여 쌓은 다른 모든 것들이 단숨에 허물어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다.
“셋째. 이것은 또한 내 아이들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강제하려 한다면, 먼저 솔선해야 하는 법. 그런 이유 때문에 내 아이들 역시 같은 일을 겪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는 쪽에 힘을 기울일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죄송… 합니다.”
아이들이 형진의 역린이란 것은 그를 아는 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때문에 소야는 그의 목소리에 노기가 어린 순간 감당하지 못하고 얼른 머리를 조아려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도 너희들이 자신의 종족을 위해 이런 저런 궁리를 짜내는 것 자체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어쨌든 궁리하지 않으면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을 테니까. 더구나 환수들을 맡기로 약조한 이상,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고.”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두 가지 정도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꼼짝없이 야단맞고 쫓겨 가지나 않을까 싶어 숨을 죽이고 있던 세 환수들은 그의 말에 반색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형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일부러 신과 환수들을 맺어지도록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지다가 호감을 가지고 맺어지게 된다면 그건 오히려 축하할 일이 되겠지.”
“그럼…”
“최근 여러 가지로 업무가 많아지면서 신들에게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환수들 가운데 희망자를 선발해서 신들의 일을 돕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싶어. 단순한 업무 보조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물품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범위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그 와중에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되어 맺어지게 된다면 좋은 일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신과 환수들이 그런 식으로 같은 업무에 임하면서 서로 유대감을 가지게 되기만 해도 충분히 좋은 일이겠지. 어쩌면 그런 만남이 환수들이 지닌 가능성을 보다 좋은 방향으로 개화시켜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
형진이 난색을 표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주체가 되어 신과 환수를 강제로 짝 짓는 일이다.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 반려를 찾는 것뿐이라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미엘이나 하엘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환수들은 필요성을 느낀다면 어떤 인간보다도 우수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다. 신들로서도 그런 우수한 인재들이 자신을 돕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반길 것이 분명한 일. 거부할 이유가 없다.
확실히 좋은 방법이다. 더불어 환수들로 하여금 변화하는 인간 세상을 살펴볼 기회도 줄 수 있으니, 자신들도 이제는 변화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일이 설득하는 수고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럼 나머지 하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조금 안달이 난 듯한 모습으로 쿠가 그렇게 묻자, 형진은 차로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첫 번째 방법은 환수가 신들에게 다가서는 것이니, 나머지 하나는 신이 환수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되어야겠지.”
“신들이 말입니까.”
“그래.”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찬찬히 설명을 이어갔다.
“현재 많은 수의 신들이 엘리시온으로부터 나와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곳에 처박혀 있는 신들이 존재하고 있거든.”
그러자 소야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해하기 어렵군요.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신들로서는 외부로 나서기에 가장 좋은 조건일텐데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자신이 지닌 신격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신이라면.”
형진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인간과 같은 지성을 지니지 않은 종족이나 생명체들에게 수호신이 붙어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아직까지도 엘리시온에 틀어박혀 있는 신들의 대부분은 이미 자신들이 수호해야할 생물들이 멸종해버린 경우가 많아. 신격을 의미하는 단어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린 경우라 할 수 있지. 그들은 신이긴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자격을 상실한 신이기도 해.”
“…”
“나는 그들을 환수들에게 보내면 어떨까 생각중이다.”
세 환수들은 생각에 잠겼다.
신격이 유명무실해진 신은, 어떻게 보면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신격을 잃어서 권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또한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아바타를 비롯해서 신들을 위해 마련된 여러 가지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보통의 인간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 보면, 환수들의 반려로는 오히려 최상의 존재일 수도 있었다. 스스로 신앙이나 공헌도를 모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은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고 형진에게 빌리거나 구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힘을 보충할 방법만 찾을 수 있다면, 그리고 마법처럼 그런 힘들을 달리 활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그들은 또한 어떤 인간보다도 강력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또 아나. 그렇게 노력을 계속해 가다보면, 물벼룩과 클로렐라가 그랬던 것처럼 신격의 확장을 이루어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신격만 지닌 쭉정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신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환수들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신격이 유명무실해진 상태라 하더라도, 그들이 신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것은 반려로 맞이했을 때, 형진과 같은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짝을 맺고 맺지 않고는 본인들의 자유겠지만, 이것 또한 환수들로서는 종족을 번영시키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기회가 될 것이다.
“일단 내 의견은 이렇다. 이것은 우리 몇몇의 생각만으로 결정하기에는 너무나도 중대한 사안이니, 너희들은 다른 이들과 만나보고 내가 말한 두 가지 사안에 대해 그들의 의견을 물어 보도록. 나는 엘리시온으로 가서 그곳에서 여전히 웅크린 채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신들의 의향을 묻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