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2
2화. 조선통신사 호위무관, 태건 (1)
호수처럼 평온한 바다다. 금빛 햇살이 스며든, 미풍이 일으킨 잔물결이 수면에서 너울너울 춤을 춘다.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청량한 바닷바람이, 또 점점이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선사하는 수려한 풍광이, 사람들을 벌써 몇 시간 째 갑판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큰 강이나 다름없다더니······.”
다른 이들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조선인 무관, 태건 역시 세토내해의 풍경에 흠뻑 빠져 있었다. 선 굵으면서도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룬, 헌앙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왜국의 세토내해는 혼슈와 큐슈, 시코쿠 등 일본 본토를 구성하는 세 개의 큰 섬 사이에 자리한 해협이다. 그리고 이 해협을 수백 척의 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동쪽으로 이동하는 장면은 장엄하다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경치도 경치인데······. 저 배들 숫자만큼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또 다른 젊은 무관 이하륜은 바다를 뒤덮은 조선통신사 선박과 일본 호위 선단의 행렬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로,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태건이 한 살 더 많은데다 지위가 높다 보니, 자연스레 형이 되었다.
조선에서 출발한 조선통신사 사행단의 배는 여섯 척에 불과했다. 정사 황윤길이 승선한 정사 기선과 그 짐을 실은 복선, 그리고 부사 김성일이 탄 기선과 복선, 서장관 허성의 기선과 복선, 이렇게 둘씩 세 개 조로 구성되었다. 무관으로서 정사의 호위 임무를 맡은 태건과 이하륜은 가장 덩치가 큰 정사 기선에 승선해 있었다.
여기에 더해 사행 일정 내내 동행하며 편의를 봐주고 있는, 대마도인들을 태운 선박도 열다섯 척이나 되었다. 이들 스물한 척의 선단이 세토내해로 진입하자, 그 때부터 세토내해 연안 지방 영주들이 보낸 호위선 수백 척이 교대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처럼 대규모 호위 선단을 붙이는 게 관행이 되어, 어떤 때는 팔백 척이 넘은 적도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태건을 이하륜이 깨웠다.
“형, 뭔 생각해?”
“하카다와 나고야의 일이 떠올라서.”
“하긴··· 기분이 좀 더럽긴 했지. 왜놈들이 아주 작정하고 뺑뺑이 돌리는 데 말이야.”
하륜은 몹시 기분이 상했다. 대마도를 떠나 이키 섬에 기착한 후, 바로 세토내해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일본 측은 빙 둘러가도록 동해에 연한 세 도시로 사행단을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먼저 대한해협에 연해 있는 큐슈 북부의 하카다(후쿠오카)를 거쳤고 그 다음은 나고야였다. 이곳은 동쪽의 대도시 나고야가 아닌 후세에 가라츠 시라 불리게 될, 대마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였다. 조선 측은 이곳을 ‘낭고야’라 표기했다. 나고야 다음으로 들른 곳은 혼슈의 나가토(장문주)였다. 이곳 역시 동해에 인접한 도시로, 훗날 조슈 번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다.
“그거보다 철포 말이다. 하카다나 나고야에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하카다는 국제 무역항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태건은 거기서 철포 ― 훗날 명에 의해 조총이란 이름이 붙게 된다 ― 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었지만 시도해 볼 틈이 없어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일본 내전에서 조총의 영향력이 지대했기에 조선통신사 사행단원들 모두가 조총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만큼 일본 주민들 사이에 조총의 위력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우리 조선도 조총을 바로 만들 수 있을까?”
“형, 장난해? 왜가 만드는데 조선의 기술자들이 그걸 못 만들겠어? 조선을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그건 아는데, 총열 만드는 게 어디 쉽냐?”
“어렵지 않게 만들어 낼 거야. 난 그보다 저 배들 보니까 좀 가슴이 답답해진다. 배 크기도 장난 아니고. 갈 길이 너무 먼 거 같아서 말이야.”
이하륜은 계속 바다를 뒤덮은 배들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 사행단 내 격군만 해도 이백 명이 넘는다고 했지?”
격군은 노를 젓거나 여타 뱃일을 하는 하급 선원이었다.
“거기에 사공도 스무 명 정도 있대. 다들 경상좌수영 소속이고.”
“저, 태 판관 나리.”
두 사람을 향해 하급 통역관이라 할 수 있는 소통사가 다가왔다.
태건의 직위는 훈련원 판관으로 종5품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셋 임을 고려하면 꽤나 높은 직위였다. 이하륜 역시 훈련원 소속으로 종7품 참군의 지위에 있었다.
“무슨 일이오?”
“곧 하리마국의 무로츠 항이란 곳에 정박한다고 왜인 안내인이 알려 왔습니다.”
“하리마국?”
“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히메지 성이 있답니다.”
태건은 히메지란 말을 듣자마자 그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후세의 효고현에 속한 곳으로, 현재 다이묘는 기노시타 이에사다였다.
“혹시 영주가 관백, 풍신수길의 사돈 아닌가요?”
“아, 맞습니다. 그걸 어찌··· 저도 방금 왜인에게 들어 알았습니다만.”
“뭐, 바람결에 들려온 얘기가 있어서. 정사님께 이미 고하셨지요?”
“아, 무, 물론입니다. 나리.”
태건의 예의 바른 응대에 소통사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태건의 이런 태도는 이미 사행단 내 신분이 낮은 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고, 찬사도 자자했다.
소통사가 물러나자, 이하륜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와! 정말 미쳤다. 어떻게 형은 영주 이름까지 기억해?”
묵직한 성격의 태건과 달리, 이하륜은 매우 명랑하고 싹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게 뭐 어렵나? 이미 접한 정보잖아.”
“그거 한번 들었다고 누구나 다 기억하냐고! 정말 기억력 괴물 아니랄까봐.”
태건은 선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항구 전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기선 며칠 묵겠군.”
“아무래도 그렇겠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영지니까. 그럼 가볼까요?”
태건과 이하륜은 하선 준비로 인해 주변이 분주해지자, 정사 황윤길을 호위하기 위해 선실로 향했다.
* * *
무로츠항은 조선통신사 행렬을 구경하러 몰려든 주민들로 인해 이미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다이묘가 보낸 병력 덕분에 질서는 나름 잘 유지되었다.
객관이 항구에서 가깝다보니 사행단 행렬이 금세 끊어졌음에도, 객관 부근 거리는 더욱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태건은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문관들 몸살 좀 앓겠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니까. 내가 무관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진짜.”
이하륜은 그간 겪은 일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시 일본인에게 조선통신사는 21세기 한류 스타에 버금갈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선진 문물에 목마른 일본인들은 통신사 사행단을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괴롭혔다. 조선 관리의 글과 그림을 얻기 위해 부근에서 힘 좀 쓴다는 이들이나 학승,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새벽까지 필담을 나누거나, 글을 지어주길 청했다. 그래서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문관들은 잠이 너무 부족하다며 비명을 질렀을 정도. 그래도 관행상 이 일본인들을 내칠 수가 없었다. 이런 문화 교류를 위해 오백에 가까운 인원이 일본으로 왔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조선 문관뿐만이 아니라, 글을 쓸 줄 아는 무관과 다른 수행원들도 괴롭혔다. 행렬이 멈추면, 길가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단 한 글자라도 좋으니 글을 써달라며 종이와 붓을 내밀었다. 그러면 사행단원들은 말에 탄 채, 몸만 돌려 글씨를 써주곤 했다. 그 모습이 마치 21세기에 연예인 사인을 받으려 몰려든 팬덤과 같았다. 아울러 그렇게 얻은 글은 귀한 대접을 받았고,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또 성가신 환영연이 벌어지겠군.”
태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들르는 곳마다 그 지방 영주가 책임지고 접대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거창한 연회가 열리고, 밤늦게까지 필담을 나누고 그림을 그리는, 소위 ‘필담창화’로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 * *
다음날, 조선통신사 측은 곤혹스런 일과 다시 직면하게 되었다. 한 무리의 일본 무사들이 객관으로 몰려와 문관들처럼 조선 무관들과 교류하길 청한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조선 측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공터에 대련장을 꾸미고 구경꾼까지 미리 모아 두는 꼼수까지 동원했다.
이 소식은 통역관들을 통해 사행단 사람들 사이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세 사신의 귀에도 즉시 들어갔다.
정사와 부사, 서장관을 삼사라 칭하는데, 이들이 바로 조선통신사를 대표하는 사신들이었다. 삼사는 늦은 아침밥을 든 후,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에잉! 왜인 무사들이 또 나섰다고?”
정사 황윤길은 소식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대마도에서 당한 기억 때문이다. 부사 김성일도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무인들의 교류라는 게 곧 비무이니, 또 모욕을 주고자 온 모양이올시다.”
“그렇겠지요. 어떻게? 말릴까요?”
“에휴! 그 또한 모양새가 우스우니 그냥 두고 봅시다.”
정사와 부사는 각기 서인과 동인 출신인데, 이 둘은 현재 조선 조정에서 생존을 건 권력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무사들의 도발에, 둘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서장관 허성이 일어나며 말했다.
“전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록과 보고의 의무가 있는 서장관 허성은 당연히 가야 했다.
“뭐, 같이 가 봅시다. 어쨌든 구경거리 아닙니까?”
황윤길이 일어서자, 김성일도 쭈뼛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도······.”
세 사신이 일어서자 눈치 빠른 통역관이 재빨리 앞서 달려갔다.
이윽고, 세 사신은 객관 뒤편 공터에 마련된 임시 연무장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통역관이 손을 써둔 덕분에 대련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상태였다. 연무장으로 사신들이 들어서자,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공손히 예를 표했다. 아울러 일본인 수행원들은 재빨리 의자까지 대령해 두었다.
“이런··· 이거 일이 커졌구려.”
정사 황윤길이 낮게 탄식을 터트렸다. 대련장 주변이 구경꾼들로 가득 들어찼기 때문이다.
“쳇! 그러게 말입니다.”
김성일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대마도의 경우, 구경꾼이라도 적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형편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이 들자, 정사 황윤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어찌 칼로 일본 무사를 이긴단 말인가? 대마도에서 이미 겪었지 않은가?”
황윤길도 조선 무인들이 평소 활 위주로 수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일본 무사들이 대놓고 도발한다고 생각했다.
“역시 왜인들은 참으로 음습한 자들이··· 오! 누군가 목검을 준비하고 있네요. 아, 태 판관!”
부사 김성일은 대련을 준비하는 이의 정체가 태건임을 알아봤다.
“태 판관이라면··· 저 젊은 무관의 무예가 뛰어나단 평이 있던데,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황윤길은 태건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고 조금은 희망을 걸어 보았다.
“그래도 평생 칼 하나로 먹고 살아온 왜인 무사를 어찌 상대할지. 지난번 대마도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잖습니까?”
허성의 표정엔 기대감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이미 태건의 패배를 예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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