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06
교랑의경 206화
“차정사에 있는 비석에 관한 얘기 잘 들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몸이 회복되자, 그녀는 딱 한 번 본 것도 잊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아졌다.
진씨 가문의 초대에 응해 차정사에 갔던 날에도 이 소년이 있었다. 어찌나 거리감이 느껴지는지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 속을 종잡을 수도 없을 것처럼 보이던 이 낭자가 뜻밖에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년은 기뻐 얼굴이 환해졌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보잘것없는 재주일 뿐이죠.”
소년은 했던 말을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공자님께서 재주가 많으시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시녀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낚시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어가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주고받는 모습을 멀찍이서 쳐다보던 진십팔랑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오라버니와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보던 진십팔랑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때 가슴이 떨린 사람은 진십팔랑만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연못을 향해 걸어오던 진소의 부인과 동서인 진 사노야의 부인도 이 장면을 목격했다. 진 사노야의 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더위를 피해 정자에 앉은 진소 부인과 진 사부인은 시중을 드는 측근 몸종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놀러 가라며 자리에서 물렸다.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연못에서 낚시를 하던 소년과 소녀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정원의 다른 쪽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형님, 전에도 한 번 물어봤던 얘긴데, 정 낭자는 아직 혼담이 안 나왔죠?”
천천히 부채질을 하던 진 사부인이 불쑥 얘기를 꺼내자, 진소 부인이 동서를 힐끔 쳐다봤다.
몇 년을 바보로 살았던 여인인데, 누가 혼담을 꺼내겠어. 물론 진 사부인이 무슨 뜻에서 꺼낸 말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정교랑의 이야기만 나오면 진소 부인은 고마운 한편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여인으로 태어나 시집만 잘 간다면 평생의 안식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딸들의 혼사를 챙길 때면, 정교랑 생각이 절로 났다.
정 낭자의 부모와 가족들이 인륜지대사를 어떻게 다룰지 모르겠네. 우리 집에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문이라면 좋을 텐데. 그런데 아무래도 정 낭자가 조금은…….
“농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물어보던 찰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까워져 대화가 끊겼다.
“돌아가서 이야기하죠.”
진 사부인은 이쪽으로 오는 소년과 소녀들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앉아서 좀 쉬다가 밥 먹으러 가자꾸나.”
정오가 지난 뒤, 정교랑은 진씨 가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교랑이 막 대문을 들어서는데 담벼락 너머에서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몸을 내민 소년은 마당으로 걸어온 정교랑을 쳐다보며 헤헤 웃었다.
시녀와 반근은 이제 그러려니 하며 각자 할 일을 하러 갔다.
“요즘 바쁜가 봐요? 몇 번이나 왔는데도 없어서, 오늘도 없는 줄 알고 이만 가 보려고 했어요.”
“네, 요즘 바빠요. 나한테 볼 일 있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묻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모처럼 나와도 딱히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거든요.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낭자라 보러 왔죠.”
진안 군왕은 잠시 생각하다가 눈썹을 꿈틀이며 물었다.
“아 참, 혼사 얘기로 바쁘죠? 어느 가문이랑 하기로 했어요? 내가 대신 알아봐 줄까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점포 여느라 바빴어요. 점포가 두 개 더 늘었거든요.”
“점포요?”
진안 군왕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몸을 좀 더 앞으로 뺐다.
“장사도 할 줄 알아요?”
“아니요. 하지만 장사할 줄 아는 사람을 구하는 법은 알죠.”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바빠요. 요즘에는 책을 두 권씩이나 더 외우느라.”
진안 군왕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정말 대단하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진안 군왕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경사가 생긴 김에, 같이 축하하는 건 어때요?”
축하? 무슨 축하? 시녀가 손에 있던 옷을 내려놓고 밖을 내다보았다.
반근과 금가아는 마당에서 바삐 움직이면서 쉼 없이 떠들어댔고 담벼락의 소년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공명등(孔明燈: 종이풍선에 촛불을 밝혀 하늘로 띄우는 등. 성공과 복을 기원하는 의미) 만들어 봤어요?”
담벼락 너머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나무 참빗을 쥐고 있던 정교랑이 멈칫했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 만들어 봤을걸요.”
“만들 줄 아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죠?”
“네.”
정교랑은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놀렸다.
“난 만들어 본 적 없어요.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는데,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럼, 우리 둘 다 기억을 못 하는 거네요.”
정교랑의 말에 담벼락 너머에서 쾌활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맞아요. 우린 정말 동병상련이군요.”
소년의 말을 들은 시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네. 대낮에 공명등을 날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저 호색한은 정말 맛이 간 게 분명해.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햇볕 속에서도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다리 밑 나무 그늘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엇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거 봐, 누가 공명등을 날리고 있어.”
그 소리에 여러 사람이 시선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의 저택에서 흔들거리면서도 나란히 떠오른 공명등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해가 떠 있는 시간이라 다소 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뉘 집 애들인지 장난을 치나 보네.”
공명등이 그리 희귀한 물건도 아니다 보니,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은 마당에 서서 고개를 들고 하늘 높이 날아가는 공명등을 바라봤다.
“누굴 위해 복을 빌었어요?”
담벼락 너머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은 멀어져가는 공명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몰라요.”
웃음소리가 마당 안까지 전해졌다.
“신기하네요. 나도 모르거든요.”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저택에서는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해졌다. 바람을 타고 유유히 날아간 공명등은 점점 멀어져갔고, 대낮인지라 하늘이 밝다 보니 금세 보이지 않게 됐다.
서원의 대문이 열리자 제자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왔다. 오래 가두어 놓았던 새들이 새장을 탈출하는 모습 같았다.
“공자님, 드디어 밖에 나와서 바람 쐴 수 있게 됐어요!”
사환이 싱글벙글 신이 나서 외쳤다. 사환은 고개를 돌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자리한 서원을 힐끔 쳐다보며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듯 몸을 떨었다.
“장강주 선생께서는 정말 무서운 분이네요. 다음번에 수업하실 때는 이런 식으로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사람을 열흘, 보름씩이나 가둬 놓고 수업을 하다니요. 정말 사람 잡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스승님께 불경하구나.”
정사낭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자 사환은 멋쩍은 듯 혀를 날름거렸다.
“저 안에 갇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필요한 걸 사러 나오는 게 아니었다면, 나 역시 서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을 게다.”
마지막 한마디에 깜짝 놀란 사환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정사낭이 지금 서원으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그 안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사낭!”
익숙한 고향 사람의 말씨가 귓가를 스치자, 왁자지껄한 인파 속에서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던 정사낭과 사환은 멈칫했다. 길가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던 마차에서 소년 공자 하나가 부채를 들고 폴짝 뛰어내렸다.
“경성은 번화하다지 않았어? 근데 왜 이렇게 휑하고 외진 곳에 있는 거야?”
소년 공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평했다. 정사낭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소년 공자를 쳐다보다가,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니, 너, 십칠, 네가 여긴 웬일이야?”
별실 안. 냉채와 과일, 그리고 술이 식탁 위에 순서대로 올라왔다.
“됐어, 충분해.”
정사낭이 서둘러 말했다.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왕십칠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앞가슴이 훤히 보일 정도로 노출된 옷에 청화포로 허리를 꽉 졸라매 더없이 가녀려 보이는 요염한 여인이 술을 따르던 손을 멈췄다. 여인은 왕십칠이 던져준 돈을 받고는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며 교태를 부렸다.
“감사드려요, 공자님.”
여인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한 후 몸을 일으켜 나갔다. 여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분향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역시 경성은 재미있는 곳이야. 술 파는 여인네조차도 저리 눈치가 빠르니.”
왕십칠이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정사낭의 어깨를 툭 쳤다.
“넌 참 복도 많다. 이리 좋은 곳에 오다니. 살살 놀아, 몸 상하지 않게.”
정사낭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왕십칠의 부채를 쳐냈다.
“난 공부하러 온 거야! 여기 올라온 후로 지금까지 경성 안으로 들어온 건 이번이 두 번째라고!”
왕십칠은 정사낭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웃으면서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입에 넣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온 건데? 어쩌다 경성까지 온 거야?”
왕십칠은 정사낭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은 채 술 한잔을 입에 털어 넣고 연신 감탄을 해댔다. 그러고는 정사낭의 술잔을 채워주며 함께 마시자고 권했다.
“나? 나야 뭐, 정혼자를 데리러 왔지.”
왕십칠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그 말에 정사낭은 입에 머금었던 술을 내뿜어버렸다.
“뭐? 네 정혼자?”
정사낭은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아?”
왕십칠이 눈을 찡긋거렸다.
“내가 봐서 뭐해.”
정사낭은 고개를 내젓고 다시 술잔을 채웠다. 왕십칠이 가지고 다니던 그림 통에서 족자 하나를 꺼내면서 웃었다.
“에이, 그래도 한 번 봐.”
정사낭이 술잔을 든 채 흘겨보았다. 그림?
왕십칠이 손으로 족자를 털자 그림이 천천히 펼쳐졌다. 정사낭은 다시 한번 풉 소리를 내면서 입에 있던 술을 모조리 뿜어냈다.
“너, 너, 너.”
사레가 걸린 정사낭이 콜록대면서 왕십칠을 향해 삿대질했다.
“맞아, 맞아. 이게 바로 내 정혼자야.”
왕십칠이 웃으면서 족자를 조심스레 돌돌 말았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왕십칠! 그 애한테 병이 있긴 하지만, 네놈이 이리 함부로 모욕할 수 있는 여인은 아니라고!”
부아가 치민 정사낭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호통쳤다.
“누가 모욕했다고 이래?”
왕십칠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우리 집안과 네 숙부 선에서 이미 끝낸 혼담이야.”
정말인가? 정사낭은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진짜라니까. 네 누이 어디 있어? 내가 가서 좀 봐야겠는데.”
왕십칠이 정사낭 쪽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정사낭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왕십칠이 평소에 철없는 짓을 많이 한다 해도, 혼인 같은 인륜지대사에 대해 멋대로 지껄일 린 없는데. 설마 진짜로 집에서 이 혼사를 동의한 건가?
“너희 집에서도 허락하겠대? 그 여인이 어떤…….”
정사낭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당연하지. 농담하는 거 아니라니까.”
왕십칠은 웃으며 족자를 조심스럽게 그림 통에 담아 넣고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 누이 어디 있냐고. 내가 가서 얼굴 좀 봐야겠다니까.”
정사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나도 아직 못 만났어.”
“경성에 온 게 언젠데 아직도 못 만났다고? 그럼 지금껏 뭐 했어?”
왕십칠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나 공부하러 왔다니까!”
똑같이 왕십칠을 노려보던 정사낭은 창피한 듯 말을 이었다.
“실은 누이가 어디 있는지 몰라.”
“외조모 댁에 있는 거 아니었어?”
놀란 왕십칠이 되묻자 정사낭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혼담을 넣을 수라도 있으면 차라리 괜찮지. 그 사이에 원래의 새장에서 다른 새장으로 옮겨진 건 아닐지 모르겠네.
“그럼 주씨 가문으로 가 보자!”
왕십칠은 남은 술과 음식들을 내팽개치고 곧장 문을 나섰다.
낮에는 손님이 별로 없는 가게여서 그런지, 쿵쾅대며 복도를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십칠, 천천히 좀 가.”
정사낭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천천히는 무슨. 또 어디서 무슨 고생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얼른 가서 구해야지.”
급하게 모퉁이를 돌던 두 사람이 마주 오던 이들과 부딪쳤다.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노을 빛깔을 닮은 치맛자락이 눈에 들어오며 맑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두 사람은 황급히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한발 물러섰다.
사각사각 옷자락 소리를 내며 걸어오던 이들은 가던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든 왕십칠은 잠시 넋이 나갔다. 두 몸종이 각각 비파와 칠현금을 하나씩 안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소녀를 사이에 끼고 지나갔다.
수려한 옷차림에 가벼워 보이는 몸짓, 흰색 옥비녀로 곱게 감아올린 머리카락까지, 여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분칠하지 않은 청초한 얼굴에 깊은 눈매를 가진 여인은 두 사람의 시선을 느꼈는지 자연스럽게 그들을 훑으며 지나갔다. 여인의 일행은 순식간에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왕십칠과 정사낭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얼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경성이란 곳은…… 과연 신선들이 사는 곳이야.”
여인의 일행이 지나간 지 한참 후에야 왕십칠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