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06
교랑의경 506화
순간 황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런저런 일들이 계속 떠올랐다.
“폐하, 옥체가 많이 좋아지셨나 봐요. 동 내한은 폐하보다 나이도 많은데, 근래 삼 년 동안 아이를 둘이나 얻었대요.”
안비가 황제의 팔을 잡고 흔들며 웃었다.
동 내한! 그 약! 정 낭자의 약!
황제의 머릿속에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럼 정말 그때 그 간식 때문에? 어떻게, 이런 경사가!
물론 황제는 정교랑이 도조 이 진인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고, 신선의 제자라는 말은 더더욱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알 수 없이 흥분됐다.
어쩌면······.
“뭐라? 안비가 회임을 해?”
고능준 역시 귀비가 보내온 소식에 깜짝 놀랐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했으면 한 게지. 낳아 봤자 핏덩이 친왕인 것을. 친왕이 여럿 더 생긴들 무슨 대수겠느냐.”
“아닙니다, 대인. 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서찰을 가져온 궁녀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듣자니 그날 폐하와 안비께서 진안 군왕이 가져온 간식을 드시고 용종을 잉태하신 거래요.”
“터무니없는 소리!”
고능준은 코웃음을 치며 푹신한 침상에 몸을 기댔다.
“대인, 진안 군왕이 가져온 간식은, 정 낭자가 손수 만든 거라고 했어요.”
궁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정 낭자?
고능준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사사건건 안 빠지는 데가 없어? 그 여인의 간식을 먹은 덕분이라고? 그래서 황제의 후궁이 회임을 했다?
“이거야말로 큰일이구나.”
고능준이 느릿느릿 말했다.
곡강지에서 돌포탄 시험 발사를 마친 후, 또 하나의 어마어마한 병기가 탄생했다는 소식은 경성 구석구석으로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연기가 막 피어오르지 뭐요. 그 돌포탄에 맞은 자리는 혈육이 낭자한 게 아주 아수라장이 따로 없더라니까.”
“요괴가 등장하기라도 했나?”
“비슷하지. 신선의 제자가 만들어 낸 병기잖소.”
“글쎄 아니라니까. 이번엔 아니오. 폭죽 파는 이씨네 가문 사람이 만든 거래.”
술집과 찻집에서 이런저런 소문이 퍼져 나가는 사이, 안 그래도 이름난 이씨 가문 폭죽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점포 안팎은 몰려든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 돌포탄과 비슷한 폭죽 있소?”
“저게 그거요?”
“저것 좀 보여 주시오.”
점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아우성을 쳐대는 바람에 폭죽은 진작 동이 났고, 주인이며 점원들은 발을 땅에 디딜 새가 없을 정도로 분주히 움직였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이씨 가문에서는 힘들다고 불평하는 이 하나 없었고, 얼굴에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 무는 노을이 졌을 때 태어났어. 그때 지나가던 승려 하나가 들어와서는 점을 봐 주겠다더니, 무성(武星)이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했지.”
늙은 아낙이 마당에서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 우쭐한 표정으로 말하자, 옆에 있던 이들이 함께 웃어 주었다. 물론 같잖다는 투로 비웃는 이도 있었다.
“어젯밤만 해도 애초에 그 어미를 죽였어야 했다고 하지 않았나? 오줌통에 빠트려 익사시키려고 했다며?”
누군가가 입을 삐죽이며 옆 사람에게 쫑알거리자 옆 사람이 손을 뻗으며 탁 쳤다. 저쪽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아낙 하나가 걸어왔다.
“이무의 색시구나. 어서 이리 오렴.”
늙은 아낙이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
“이제 아주 보물단지가 됐네.”
“아무렴. 이제 고명부인이 될 사람인데, 누가 감히 견주겠어?”
다들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하는 듯 소곤거리며 아낙을 에워쌌다.
떠들썩한 거리나 이씨 저택과는 달리 옥대교의 정 낭자 집 대문 앞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오늘도 글씨 연습을 안 하는 거요?”
삼삼오오 다가온 사람들이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오늘은 글씨를 안 쓴다는 알림이 안 붙었소만······.”
대답하던 이가 저택의 대문 쪽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일제히 고개를 돌려 쳐다보던 이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저게 누구요?”
정교랑의 저택 앞에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저게 바로 그 배은망덕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귀판관이오.”
거리에 있던 이가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회랑 아래에 선 반근은 바깥에 대고 퉤 침을 뱉었다. 그러더니 겁이 더럭 나는지 또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못 봤다는 걸 확인한 반근이 홱 돌아서며 말했다.
“이제 잘못한 걸 알았나 보네. 이미 늦었네요.”
“틀렸어.”
건들거리며 지나가던 시녀가 반근의 어깨 위에 손을 턱 올리고 말했다.
“잘못을 깨달은 게 아니야. 그저 자기 마음 편하자고 저러는 거지.”
반근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 듯 시녀를 쳐다보다가 얼른 시녀를 따라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저자가 아씨를 뵙겠다고 하면, 아씨께서 만나 주실까?”
반근의 물음에 시녀가 웃으며 대꾸했다.
“반근, 그 말도 틀렸어. 만나고 안 만나고는 아씨께 달린 일이 아니야. 저자한테 뵙겠다고 말할 용기가 있는지에 달렸지.”
반근은 이해가 가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대문 밖에 있던 사환이 들어와 풍림이 세 번 예를 올린 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딱히 할 말도 없고, 볼 것도 없겠지.
대문이 열리고, 늘 보아 익숙한 몸종이 걸어 나왔다. 거리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정 낭자가 글씨 연습을 하려나 보군.”
“볼 수만 있고 물을 수는 없는 건가?”
“물을 수도 있지. 자네도 이무처럼 보고 나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면, 정 낭자가 제자로 받아 줄지도 몰라.”
“그렇다면 좀 이따 정 낭자한테 내 글씨를 보여 줘야겠군. 가르침을 얻을지도 모르잖아.”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곧 입을 다물고 정 낭자를 따라 붓을 들었다.
“옷 빨 거면 서둘러. 글씨 연습을 마치고 나면 물이 온통 새까매질 거야.”
저쪽에서 아낙들이 소리쳤다. 이쪽에서 조용히 글씨 연습을 하는 동안, 저쪽 거리에서는 아낙들이 화기애애한 목소리로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 한원조가 시선을 거두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님, 가 보시겠습니까?”
사환의 물음에 한원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풍림도 예를 세 번 올린 후 떠났는데, 내가 가서 만나라고? 뜻이 다른 자와는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다는 말까지 해 놓고.
조당에서 오간 말들은 이미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소식이 빠른 역관에서 누군가가 아주 생동감 넘치는 말투로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놀라 혀를 내두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기도 했다.
“그래서 악은 정의를 이길 수 없다잖아. 귀신은 결국 귀신이야. 경성으로 올라오자마자 명성을 드높이고 싶어서,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들이받은 거지. 상대는 무려 신선이었는데!”
그건 한원조가 찬성할 수 없는 말이었다.
풍림이 어찌 명성을 탐하는 인물이란 말인가. 다만 지금은 형세가 바뀌었을 뿐이다. 이기면 왕이지만 지면 역적이 되는 법.
사실 그다지 생경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부친에게 들은, 그 여인이 요승을 상대하던 때의 이야기도 똑같았다. 아예 손을 쓰지 않는다면 몰라도, 손을 썼다 하면 기필코 상대를 죽음으로 내모는 여인이었다. 아주 빠르고, 정확하고, 매섭게, 사정을 두지 않고.
어떻게 된 사람이 이럴 수 있지?
보살의 마음으로 은혜를 갚는 한편, 정의든 악이든 가리지 않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살인을 하다니.
“강주 바보······.”
한원조는 나지막이 읊조린 후 뒤돌아 걸음을 내디뎠다.
“가자.”
말에 오른 한원조는 몇 걸음 가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인파에 둘러싸인 채 조용히 앉아 글씨를 쓰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문가에 시립해 있던 반근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피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과 희열도, 가는 길이 다른 걸 알았을 때의 슬픔과 원망도 없이, 그저 행인을 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원조는 시선을 거두고 말을 재촉하며 인파를 헤치고 지나갔다.
부친의 일로 한원조는 역관에 머물고 있었다. 한원조가 돌아오는 모습을 본 역승이 얼른 나와 웃으며 맞이했다.
“한 수재, 누가 찾아왔습니다.”
부친이 하루에 세 차례나 황제를 알현한 이후로, 이들을 찾는 사람은 많았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려는 동향 사람도 있고, 연줄을 대려는 동문도 있었다. 물론 이제부터 연을 맺으려 드는 생면부지의 사람이 더 많았지만. 상대가 귀찮아하는데도, 어쨌든 인맥을 넓히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역시 정 낭자로 인한 일이지.
“아버지는 안 계십니까?”
한원조가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계시오만, 한 수재를 찾아왔다고 해서요.”
역승은 공손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한원조가 고개를 들자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걸어 나오는 사내가 보였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부자는 아니어도 결코 가난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낯선 얼굴이었다.
누구지?
“한 은공.”
이대작이 앞으로 다가서며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은공’이라는 말에 한원조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하는 사내를 보며 한원조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은공이라······. 누가 누구의 은공인지도 모르겠군.
한원조와 이대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졌다. 이대작은 별말 없이 허리를 숙인 채 대뜸 비전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한원조가 그날 자신이 태평거에서 돌려준 배당금인 걸 한눈에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은공, 일단 제 말씀부터 들어 보시지요.”
이대작이 한원조의 말을 끊고 웃으며 말했다. 한원조가 이대작을 쳐다보았다.
“저도 은공과 아씨 사이의 지난 일은 이제 막 들었습니다. 은공께서 아씨의 은인이시라고······.”
“아니오. 정 낭자가 내 은공이오.”
한원조가 이대작의 말을 끊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대작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건 아씨와 은공 사이의 일입니다. 이 돈은 저와 은공 사이의 일이고, 아씨와는 무관합니다.”
한원조가 또다시 멈칫했다.
이 무슨······.
“아씨는 은공께 신세 진 걸 갚고자 하셨습니다. 은공께서 지나가는 길에도 불의를 못 참고 정의롭게 나서 주신 덕분입니다. 아씨께선 저를 숙수로 고용해 은공께 은혜를 갚으셨지요. 이 배당금은 본디 제 것입니다. 제가 은공께 드리는 거고요.”
그렇게 된 거였다고?
“숙수의 것이라 해도 받을 수 없습니다. 너무 과합니다.”
한원조가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이대작은 비전을 내밀었다.
“은공, 속 좁게 이러지 마십시오.”
이대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에는 받으셨잖습니까.”
한원조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은공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은공께서 아씨 때문에 이 돈을 돌려주신 걸 잘 압니다. 저 역시 다른 뜻은 없고, 그저 은공께 알려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이 돈은 아씨와 무관한 것이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한원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막 입을 열려는데, 이대작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염려 마십시오, 은공. 제가 돈을 돌려드리려는 것은 은공께서 오해하셨기 때문이지, 은공을 협박하려는 게 아닙니다. 전 은공의 마음을 잘 알고, 은공의 뜻을 이해합니다.
제가 돌려드리려는 이 돈은 이전의 것입니다. 이제 은공께서는 더 이상 태평거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시니, 염려 마십시오. 이것으로 계산을 끝내고, 은혜만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돈이나 재물에 관해서는 얽히는 일 없을 겁니다.”
한원조가 잠자코 이대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정 그렇다면 이제 지나간 일은 언급하지 말고, 여기서 끝내기로 하죠.”
한원조가 웃으며 말하자 이대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은공.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대작은 뭐라 덧붙이는 말도 없이 깔끔하게 일어났다. 한원조가 이대작을 바라보았다.
“살펴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