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722
교랑의경 722화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정자와 누각이 찬란하게 밝혀졌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흐드러지게 핀 국화꽃이었다.
“저기 좀 봐요.”
방백종이 먼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건 누가 공물로 바친 건데, 황실에 딱 세 그루만 있어요. 폐하께 한 그루 남겨 드리고, 나머지는 황후마마께서 다 이쪽으로 보내 주셨어요.”
방백종이 고개를 돌리고 네 명의 내시들이 짊어지고 있는 가마 위의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황후마마께서 당신이 저걸 보고 그림을 그려 줬으면 하신대요.”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방백종이 국화꽃밭을 여유롭게 거닐었다. 내시들은 그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가마를 들고 걸었다.
“당신이 글씨를 잘 쓰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림까지 그렇게 잘 그릴 줄은 몰랐어요. 주복 그 녀석이 딴 건 다 필요 없다며, 화폭 두루마리 한 개만 가지고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방백종이 고개를 돌리고 씩 웃었다.
“그런데, 안 줬어요. 그 녀석을 일부러 골려 주려고요.”
붉은 두봉을 걸친 정교랑의 표정은 한없이 온화했다. 늦가을의 밤바람이 불어오자, 두모가 펄럭이며 정교랑의 얼굴을 가렸다.
방백종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두모를 바로 씌워 주었다.
“요즘은 일이 너무 바빠서, 오늘에서야 당신과 이렇게 바람을 쐬네요. 당신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하겠지만, 난 신경이 쓰여요.”
길가에 서서 방백종과 내시들을 바라보던 경 공공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경 공공의 옆에 서 있던 내시가 한숨을 쉬었다.
“대인, 이대로는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태자비는 정상인이 아닌데, 태자 전하께서 태자비를 정상인 대하듯이 대하시다니.
밤에는 같은 침상에서 잠을 청하고, 식사도 함께 하고, 심지어는 아침 수련을 할 때도 태자비를 모시고 나가셔. 태자 전하께서 연무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실 때마다, 태자비의 가마를 옆에 두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하시는 건지.
태자 전하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우리 같은 내시들은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오금이 저린단 말이지.
“최소한 태자부에 새로운 사람들을 좀 들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근거리에서 전하의 시중을 들 수 있는 궁녀도 없을뿐더러, 이제 전하의 춘추도 적지 않으시니······.”
내시가 이어서 말하려던 찰나,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하라고 시켰느냐?”
내시가 멈칫했다.
“누가 시킨 건 아니고, 소인의 생각이옵니다. 대인, 저도 몇 년 동안 태자 전하의 시중을 들지 않았습니까. 다른 뜻은 없습니다.”
내시의 대답에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죽으려면 혼자 죽어라. 괜히 남한테 불똥 튀게 하지 말고.”
경 공공의 말에 깜짝 놀란 내시는 그 말뜻을 뒤늦게 이해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의 따귀를 내리쳤다.
경 공공은 더는 내시를 쳐다보지 않고, 정교랑의 가마가 왔던 길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그들을 맞이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켰다. 그는 침전을 향해 가는 방백종 일행이 멀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입술을 삐쭉이며 투덜거렸다.
“어차피 시간문제일 텐데. 폐하께서도 자손이 몇 없었기 때문에 양자 입적을 하신 거잖아. 그러니 태자 전하도 당연히 자손 문제에 신경을 쓰셔야지. 지금은 그렇다 쳐도, 나중에 제위에 오른 뒤에는 어쩌시려고?”
9월 말, 어느새 밤바람이 서늘해지고 북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천자의 침궁 안에 있던 등불이 바람에 일렁였다.
편전에 있던 황후는 내의로 갈아입고 머리를 푼 채 등불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바람 소리가 들려오자,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 이불을 더 가져다드렸느냐? 태의가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오랜 시간 병석에 누워 계신지라 한기가 들면 안 된다고 하였다.”
문밖에 서 있던 내시가 대답했다.
“예, 이미 가져다드렸습니다.”
황후가 고개를 숙이고 이어서 책장을 넘겼다.
“마마.”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황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궁녀가 문을 열자, 황제의 시중을 드는 내시가 당황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누군가가 문을 살짝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실내의 정적을 깨트렸다. 침상 위에 누워있던 방백종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흐릿한 실내의 등불을 확인하던 방백종은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문가를 쳐다보았다.
“전하, 전하.”
경 공공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방백종이 물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면서 젖혀진 이불을 다시 정교랑의 어깨까지 끌어다 덮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경 공공이 잰걸음으로 방백종에게 다가갔다.
“전하, 황후마마께서 지금 잠시 입궐하실 수 있겠냐고 하문하셨습니다.”
방백종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입궐하라는 전갈이 아니라, 잠시 입궐할 수 있겠냐고 하문하신다는 것은······.
황궁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입궐을 명하신 게 아니라, 입궐할 수 있냐고 하문하신다는 것은, 궁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뜻인데.
황제 폐하?
뇌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치자, 방백종은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왔다.
“전하.”
경 공공이 서두르는 방백종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태자가 냉큼 달려가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방백종은 양자로 들어온 태자였다. 게다가 선문 태자가 죽던 날, 방백종이 병사들을 이끌고 경성에 입성하고 궁문을 부순 일로, 세간에 떠도는 말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태자가 곁에 있었다는 소식이 밖으로 전해진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한 소문이 퍼질 것이 자명했다. 이는 황후가 방백종에게 은밀히 소식을 전한 연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태자가 곁에 없었다면, 그 또한 각종 유언비어를 양산할 터였다. 물론 그런 소문은 근본이 없어서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유형의 것이었다.
방백종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마차를 준비해라.”
나 방백종은, 단 한 번도 세간의 말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천자의 침궁 안에 켜져 있던 등불이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
문밖에는 당직을 서는 금위군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내시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천자의 침궁 주위는 더욱 스산해 보였다.
“태자가 왔다고?”
내시의 말을 들은 황후가 조금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침상 앞에 앉아 있던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침상에 누워있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등불이 황제를 바라보는 황후의 얼굴을 비추었다. 다소 복잡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곧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과 함께 방백종이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가 휘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폐하께서 어찌 되셨습니까?”
방백종이 예를 올릴 겨를도 없이 물었다. 황후가 잠시 방백종을 쳐다보고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술을 꾹 닫았다.
옆에 시립해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문밖으로 물러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너는 어쩜 아직도 선문 태자 때와 똑같은 것이냐.”
황후의 말에 방백종이 멈칫했다.
육가아가 매화를 따다 변을 당한 게 아니라 회혜왕의 음해에 당한 것이라고 따져 물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 아니면 육가아를 그만 놓아주고 경성을 떠나라고 한 말을 거절했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
전자는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진상을 밝히려 했을 때였고, 후자는 의리를 지키고자 굳이 어려운 길을 가겠다고 선택했을 때였다.
어쨌든 황후는 내심 방백종이 입궐하지 않기를 바랐다.
“마마께서도 여전하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소자를 보호해 주려 하시지 않습니까.”
당초 육가아가 매화를 따다 벼랑에서 떨어졌을 때, 황후는 방백종을 지켜 주고자 아픈 몸을 이끌고 달려와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황후가 아니었더라면, 방백종은 그때 뭇사람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다만, 소자는 신하의 마음으로 본분을 지킬 뿐이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방백종이 이어서 말하고는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이 아이가 입궐하지 않은 채로 폐하께서 붕어하신다 한들, 세간의 소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야. 그런 유언비어야 늘 있는 것인데, 굳이 그런 것들을 일일이 신경 쓰며 살 필요는 없지.
황후가 방백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다.”
방백종이 경악한 얼굴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붕어하신 게 아니라, 깨어나셨다고?
그건 정말 좋은 일인데, 황후마마께서는 왜······.
어두운 등불에 비친 황후의 복잡한 표정을 잠시 쳐다보던 방백종은 이내 숙연해졌다.
애초에 폐하께서 앓아누우신 이유가 뭐였지?
귀비가 안비를 음해하고, 회혜왕이 빗속에서 사죄한다는 명목으로 폐하를 협박하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 뒤로 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나. 귀비는 미쳐 버렸고 고능준과 진소도 죽었으며 육가아도 죽었다. 태후마마는 연금되셨고, 후궁의 모든 권력은 황후마마의 손에 들어갔다. 게다가 과거의 진안 군왕이 지금 태자 자리에 앉았는데, 이 수많은 변화를, 폐하께서는 과연 감당하실 수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폐하께서 아직 제위를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황후마마든, 태자든, 그게 누구여도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시면 그에 따라야만 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황제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겠지만, 지금 그 황제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면 모든 게 달라질 수밖에.
“폐하께서 조금 전에 눈을 뜨셨다.”
황후가 목소리를 낮추고 방백종을 향해 말했다.
“본궁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방백종이 말없이 황후를 쳐다보았다.
황후의 말뜻은 이러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말한다면, 황제는 깨어나지 않은 셈이 된다는 것.
방백종이 천천히 전각 안을 둘러보았다. 천자의 침궁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실 이곳은 황후의 침궁이나 다름없었다.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후궁 전체는 황후의 손아귀에 있었다. 궁문을 닫는 순간, 누가 죽고 사는 문제는 모두 황후 한 사람이 결정했다.
사실 지금 황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수상태인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맑은 정신으로 깨어난 황제는 더더욱 그러했다. 다시 깨어난 황제는 모든 이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쥔 막강한 권력의 황제니까.
깨어난 황제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 득세하고 있는 황후와 태자를 가만두지 않는다면? 본디 자신의 것이었던 권력을 태자와 황후가 나눠 가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세간에 떠도는 온갖 낭설의 충격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황제가 깨어난 후에 벌어질, 너무도 많은 불확실한 일들에 황후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중 단 한 가지라도 현실로 이어진다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
황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층층의 휘장 너머로 황제가 누워있는 침상이 보였다.
그러니 가장 좋은 건 황제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게야. 그래야만 본궁이 생각하는 만일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촉광부영이라는 말을 듣는 게 뭐 어때서······.”
황후가 말을 이어가면서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네가 연의왕이 되고자 하는 건 아니잖느냐?”
전각 안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안 그래도 어둑했던 등불이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구석에 남아 있던 내시들은 자신들의 몸을 어둠 속에 숨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소자,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방백종이 말했다. 황후가 말없이 방백종을 쳐다보자, 방백종도 황후를 바라보았다.
“생각을 끝낸 것이냐? 안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방백종이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자, 황후가 옆으로 비켜섰다.
등불이 없는 휘장 안은 더욱 깜깜했다. 방백종이 침상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황제를 가려 황제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등불을 가져오너라.”
방백종의 말에, 내시 한 명이 등불을 들고 휘장 안으로 들어왔다.
“더.”
두 개, 세 개의 등불이 휘장 안을 비추자, 드디어 침상 앞이 환해졌다. 방백종이 몸을 숙여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병색이 완연하여 안색이 누렇게 뜬 황제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폐하.”
방백종이 황제를 불렀다. 황제의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이윽고 그가 두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