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99
교랑의경 99화
수왕부는 장례를 마친 후였지만 상중인지라 붉은색의 화려한 장식은 생략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집에 비해 새해 분위기가 덜했다.
진안 군왕이 수왕비에게 예를 올렸다.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돌아오라고 널 재촉하신다니 정말 잘됐구나. 새해가 되면 바로 돌아가거라.”
수왕비는 기쁜 표정이었지만 진안 군왕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 부왕 곁을 더 지켜야 합니다. 최소 반년은 지나야…….”
“너도 참,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수왕비가 말을 끊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반년에 돌아가는 여정까지 생각해 보아라. 그럼 근 일 년이나 경성을 비우게 돼. 일 년이면 태후마마와 폐하도 너와 서먹해지실 거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였다.
“너도 이제 다 컸는데 감정을 앞세워서야 쓰겠느냐. 군왕에 봉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봉지도 못 받았으니, 폐하의 마음을 잃어선 안 된다.”
수왕비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진안 군왕은 예를 올리며 알았다고 했다.
“대황자와 이황자는 아직 어리다. 그나마 넌 궁에서 황자 대우를 받으며 함께 먹고 자고 했으니 정이 남다르지. 그건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야.”
수왕비가 말을 이었다. 진안 군왕은 엎드려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었다. 감격과 친근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수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우의 국공 작위도 확실히 매듭지어야 하고.”
수왕비는 흐뭇하면서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네 아우의 국공 지위는 네 군왕 지위에 못 미치잖니. 네 형제들이 왕부에 남아 있는 건 예법에 안 맞아.”
진안 군왕은 수왕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네. 소자, 바로 상경길에 오르겠습니다.”
* * *
대문으로 들어온 시녀는 찬바람에 두봉을 바짝 여미며 걸어갔다. 마주치는 여종들이나 몸종들은 다들 깍듯하게 길을 비켜섰다.
“반근 낭자.”
웃으며 말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몸종은 고개를 숙인 채 길을 비켜서려다가, ‘반근’이라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리따운 시녀가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몸종은 멍해졌다.
“반근 낭자, 어디 다녀오나 봐?”
여종 하나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시녀는 그렇다고 하며 웃음을 지었다.
“네. 날이 추워서 어멈도 바쁘죠?”
“아니야, 바쁘긴.”
여종은 웃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기야 하지, 곧 새해잖아.”
“고생이 많네요.”
시녀가 웃었다. 여종은 밝게 웃으며 시녀가 모퉁이를 돌아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세상에, 저 낭자는 어쩜 저렇게 붙임성이 좋을까. 곱기도 하지.”
그러더니 옆에 있는 이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여편네들 말로는 성격이 불같다던데 전혀 아니야.”
“그러게요.”
옆에 있던 몸종도 멀어져가는 시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동의했다.
“듣기론 부인과 일곱째 아씨한테도 말대답을 했대요. 그런데 직접 보니까 예절을 모르는 사람 같진 않아요.”
시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렸다. 여종들과 몸종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시녀의 시선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감싸고 걸어오던 몸종에게서 멈췄다. 몸종은 추운 듯 몸을 떨고 있었다.
“저기, 언니.”
시녀가 몸종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몸종은 못 들은 척 종종걸음으로 시녀를 지나쳐 가 버렸다. 시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웃으며 두봉을 바짝 여민 시녀는 마당 안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반근은 한참을 걷고 나서야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문 앞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전에는 밤에만 어쩌다 마주치곤 했는데, 저게 바로 아씨의 새 반근이구나. 훌륭하네. 얼굴도 곱고 말도 잘하고……. 반근은 멍하니 한참을 보다가 손을 들어 눈물을 닦고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감싸 안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몸종들은 시녀가 보이자 예를 표했다. 주 부인이 새로 보낸 몸종들이었다. 웃어른이 내린 걸 거절할 수는 없는지라 정교랑은 전부 남겨 두기로 했다. 일을 시키고 말고는 별개의 일이었지만.
시녀가 웃으며 몸종들에게 인사했다. 두 몸종이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시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이들은 또 말없이 문을 닫았다. 병풍 앞의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책을 보고 있었다.
“아씨, 잘 처리했어요. 의원이 봤는데 목숨은 지장 없대요. 돈도 줬고요. 의원 말로는 마음의 병이래요. 한 공자가 위로의 말을 건넸더니 병세가 한결 좋아지더라고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 사람들이 널 기억하겠지?”
정교랑의 물음에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인이랑 한참을 얘기했으니 분명 기억할 거예요. 한 공자와 함께 가서 딱히 의심하지도 않고요. 절 믿는 눈치였어요.”
“그거면 충분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씨, 이젠 뭘 할까요?”
시녀가 궁금한 듯 묻자 정교랑이 시녀를 힐끔 쳐다봤다.
“아무것도 안 해. 이미, 다 했잖아?”
시녀는 놀랐다가 곧 실소를 터뜨렸다.
“아씨, 이게 다예요?”
“이게 다야.”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안 그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안 그럼 뭐? 시녀가 입을 삐죽거리며 웃었다.
“책 읽는 거 들을래.”
시녀는 정교랑의 말에 네 하고 대답한 후 책을 받았다.
“지난번에 어디까지 읽었더라…….”
시녀가 책을 펼치며 혼잣말을 했다.
“한식을 전후하여 호수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배가 많아졌다.”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는 정말 기억력이 좋으세요.”
시녀가 웃으며 책을 펼치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다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첫 번째 배, 두 번째 배, 세 번째 배, 네 번째 배, 다섯 번째 배…….”
그믐 전날은 명절 맞이로 가장 바쁜 날이었다. 바깥양반들은 조상께 제를 올릴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안주인들은 자식들의 옷을 챙기고 앞으로 며칠 동안 이어질 연회 준비로 바빴다. 아직 나이가 어린 이들은 한담을 나누며 들뜬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렸다.
명절 분위기 속에서도 조용히 지내던 정교랑과 시녀가 문밖으로 나섰다.
“이런 때에 외출을 한다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 부인이 물었다. 예전의 다정하고 온화한 표정은 이미 벗어던진 뒤였다.
“내일이면 그믐이잖아. 교교, 또 어딜 가겠단 거야?”
정교랑은 뒤돌아 주 부인을 쳐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부인, 내일이 그믐이라 저희 아씨께서 나가시겠단 거예요.”
시녀는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부인, 잊으셨어요? 저희 아씨는 주씨도 아닌데, 외조모님 댁에서 그믐을 보내게 하시려고요?”
시집간 여식은 친정집에서 그믐을 보낼 수 없다는 법도가 있긴 했다. 그런데 외손녀도 안 되나? 주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밖에 나와 있다지만 그래도 명절인데 저희 아씨께서도 조상님께 제는 올려야 하잖아요. 경성에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면 돼요. 그래야 두 집안 조상님들이 제삿밥 앞에서 당황하시는 일이 없죠.”
“아무리 그래도, 괜찮을까?”
주 부인은 결정을 못 내리겠는 눈치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육낭은 사환이 들고 있던 채찍부터 낚아챘다.
“어머니는 일 보십시오.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
갈 테면 가라. 집에 있어 봤자 말썽이나 피우지. 주 부인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떠들썩하던 거리엔 인적이 드물어졌다. 새해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행인만 이따금 보였다. 주육낭이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소리를 들은 사환이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아씨, 오셨어요?”
사환이 큰 소리로 외쳤다.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이 왔구나.”
두 사내가 손을 비비며 따라 나왔다.
“돼지머리를 삶고 있었어.”
“넷째 도련님, 다섯째 도련님, 돼지머리도 삶을 줄 아세요?”
시녀는 놀란 목소리로 물으며 정교랑을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럼, 그럼.”
두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 어서 들어가자. 날씨가 춥네.”
한쪽 옆에 주육낭이 서 있었지만 다들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영락없는 마부 취급이었다. 소리를 듣고 안에서 또 몇 명이 달려 나왔다. 누이를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겨운 목소리로 서로 누이와 오라버니를 불러댔다.
주육낭은 웃고 떠드는 남녀를 힐끔 보고 냉소를 짓더니, 들고 있던 채찍을 휙 내던졌다. 눈치 빠르고 몸이 날렵한 사내가 재빨리 손을 뻗어 받았다. 웃음소리가 뚝 그치고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주육낭은 길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 벌써 저만치 가 있었다. 정교랑은 못 본 척 시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들도 곧 정신을 차렸다.
“누이의 외가는 대체 어떤 댁이야. 마부도 저리 늠름하네.”
“그러게. 아까 휙 던질 때 보니까 팔심이 장난 아니야. 긴 창이었으면 아주 사람을 꿰뚫을 정도였어.”
사내들이 떠들어대며 마차를 몰아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금가아! 장난치지 말랬지!”
여인의 고함 소리는 떠들썩하던 마당에 더욱 생기를 불어넣었다. 사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문을 닫았다. 문에는 악귀를 쫓는 두 문신(門神)인 신다(神茶)와 울루(鬱壘)의 부적이 걸려 있었고,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붉은 등롱은 명절 분위기를 더했다.
거친 사내들뿐이었지만 집 안팎은 깨끗하게 청소한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예법을 지키기 위해 정교랑의 방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반근이 고생이네.”
방을 정리하고 나오는 시녀를 보며 서무수가 말했다.
“아직 경성이 익숙하지 않아서 하녀를 함부로 들이기도 뭣하고.”
범강림도 거들었다.
“별로 안 힘들어요. 새 집이고 아씨께서 계속 지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걸레질만 한 번씩 하면 되는데 고생은요. 고생은 도련님들이 하셨죠. 새해 준비를 잘 해놓으셨네요.”
“다들 외로운 처지라 뭐든 직접 하다 보니 이런 건 익숙해.”
시녀의 말에 범강림이 웃으며 대꾸했다.
안에 등불을 여섯 개나 켜 놓고 회랑 아래에도 등롱을 두 개나 건 덕에, 안팎은 대낮처럼 밝았다. 시녀는 금가아, 사내들과 함께 음식을 바삐 옮겨 담았다. 곧 음식을 들여갔다. 금가아도 문가에 작은 탁자를 놓은 후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시녀가 금가아에게 건넨 건 차였다.
“누나, 나도 술 마실래.”
“넌 밤에 문도 지켜야 하는데 무슨 술이야. 멀쩡한 정신으로도 길을 잃었으면서 술까지 마시면 어쩌려고.”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금가아의 얼굴이 빨개지자 방 안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금가아가 아직 경성을 잘 모르긴 하지만, 이제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거야. 반근, 너무 놀리지 마.”
범강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큰 도련님 말씀이 맞아요.”
금가아가 신나서 말했다. 시녀는 웃으며 정교랑 뒤로 가서 앉았다. 서무수가 정교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 상공 댁에 보낼 새해 선물은 내가 직접 갖다 줬는데, 진 상공은 댁에 안 계셨어. 진 부인이 직접 나와 맞이하면서 누이에게 줄 새 옷을 전해 줬지. 주는 거니까 받아야 할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누이 대신 받아 놨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뜻대로 해요.”
“진 부인이 누이더러 명절 지나면 놀러 오래.”
서무수가 말했다. 진씨 저택에서 보고 겪은 일을 떠올리니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진 상공 댁 문턱을 넘어 보다니. 막 경성에 도착했을 때 전에 알고 지내던 형제들을 찾아봤지만, 대부분 성을 지키는 하급 관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문간방에서 푸대접만 당했을 뿐, 대청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