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42
손가락 끝이 자신을 가리킨 순간, 한제는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수도자를 마주했을 때보다도 훨씬 큰 위기감이었다.
앞으로 그대로 멈춰 서서 곧장 두 손을 휘둘렀다. 넓게 펼쳐졌던 호풍과 환우의 세계가 하나로 응집돼 그의 주위를 감쌌다. 동시에 한제는 광영순도 다시 소환해 주위에 둘렀다.
흰 손의 검지가 광영순과 충돌했다. 광영순은 손가락 끝에 닿자마자 바들바들 떨리더니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곧장 무너져 내리면서 그 반발력으로 손가락에 대항했다. 하지만 이내 그조차도 완전히 와해돼 사라졌다.
손가락은 이어서 호풍과 환우의 세계에 닿았다. 그러자 이 세계 역시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고 그 안의 수많은 전혼이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그들의 몸에서 피어오른 유백색 기운이 손가락의 힘에 맞섰다.
그러나 손가락의 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광영순을 붕괴킨 후로도 풍우계를 와해시키기 직전이었다.
손가락은 점점 깊이 파고들어 풍우계는 거대하게 움푹 파였고 붕괴될 듯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유백색 기운이 필사적으로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풍우계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임을 눈치챈 한제는 재빨리 물러나면서 저물공간을 소환했다.
그 순간, 풍우계는 급속도로 수축해 한제의 체내로 들어왔고 방해가 사라지자 손가락이 곧장 그의 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감히!”
한제가 버럭 고함을 지른 순간, 저물공간에서 고신의 손가락뼈가 튀어나와 백옥처럼 희고 고운 손가락과 맞닿았다.
쾅!
짧지만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공간이 기우뚱 흔들렸다. 동시에 여인이 소환한 손가락은 고신의 손가락뼈와 충돌한 순간 우뚝 멈춰 섰고 금방이라도 흩어져 사라질 것처럼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큭!”
한제는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해내면서 고신의 손가락뼈와 함께 뒤로 밀려났다. 그 순간, 한 줄기 보이지 않는 빛이 고신의 손가락뼈를 관통해 한제의 가슴을 뚫고 들어간 뒤 피 안개를 일으키며 등 뒤로 빠져나갔다.
격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허나 한제는 끔찍한 통증조차 무시한 채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붉은 검을 소환했고 멈춰 있는 손가락을 향해 매섭게 휘둘렀다.
번득이는 붉은 빛이 돌진했고 거대한 손은 붉은 검을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충돌의 순간, 붉은 검은 손을 그대로 관통했다.
“끼야악!”
가늘고 유약한 신음과 함께 손가락이 잘려 나갔고 곧바로 흩어져 사라졌다. 백의의 여인 앞에 떠 있던 옥패도 폭발해 가루가 되었다.
“커헉!”
여인은 창백한 얼굴로 피를 토해내더니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 세상에 녹아들어 도망치려 했다.
“도망칠 수 없다!”
한제는 보통의 수련자라면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 정도의 부상을 입고 가슴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날카롭게 일갈했다. 고신으로서의 회복력 덕에 상처가 아물 듯한 조짐이 있었다고는 해도 어지간히 독하지 않고서는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한제는 모든 법보를 거두고는 여인이 일으킨 파문의 흔적을 따라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둘의 입장은 여인이 쫓고 한제가 도망치던 상황에서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투영 분신처럼 보이면서도 실재하는 것처럼 육신을 가지고 있다니, 저 여인은 매우 기이하다. 남몽도존의 신통술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죽었겠지. 지금 죽이지 않는다면 언젠가 더 큰 위험이 될 터! 게다가 저 여인의 몸에도 숨겨진 비밀이 있다. 방금 발휘한 신통술은 본체의 힘을 끌어다 쓴 게 분명해. 더구나 저 여인은 이곳에 대해 나보다 잘 알고 있다. 어딘가로 숨기 전에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해!’
한제는 쉬지 않고 세상에 녹아들며 여인을 뒤쫓았다.
한편, 공간의 파문과 함께 사라졌던 여인은 한참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지금까지와 달리 허둥대며 다시 세상에 녹아들어 다급히 도망쳤다.
그녀가 떠난 순간, 그곳에 또다시 파문이 일더니 한제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또한 곧장 다시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의 추격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1각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써 몇 차례나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고 간격은 점점 짧아졌다.
백의의 여인은 무척 초조했다.
‘세 번… 세 번만 더 순간이동을 하면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어!’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 듯했다.
한데 그때, 그녀의 발아래에서 파문이 일더니 공간 자체를 찢어발길 듯 격렬한 진동과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꽈릉! 꽝!
천둥번개는 사방을 맴돌며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고 이에 원력이 요동쳐 그녀의 순간이동을 방해했다. 그리고…
“으으…”
여인이 두려움 가득한 시선을 돌린 곳에서 한제가 나타났다.
그는 한없이 냉랭한 얼굴로 말없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구름이 공간을 채우면서 하늘과 땅이 나타났다. 이어서 하늘과 땅이 중첩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쿨럭!”
여인은 피를 토하며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지만 그 순간 뒤에서 번득이던 핏빛이 그녀의 등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크아악!”
비참한 비명과 함께 여인의 옷이 붉게 물들었고 주위 공간에는 크게 왜곡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번득이는 화면들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화면 속에는 한 여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디선가 티 없이 희고 고운 손 하나가 나타나더니 여인의 미간을 눌렀다.
그때, 왜곡된 화면이 무너져 내렸고 짙은 유백색 기운이 여인의 정수리로부터 흘러나왔다.
실체를 가진 것처럼 짙은 유백색 기운 안에는 한 줄기 금색 선도 어렴풋이 드러났다. 이 유백색 기운은 바로 향불의 힘이었다.
여인의 정수리에서 흘러나온 향불은 풍우계 전체 향불의 3할에 이를 정도로 짙었다.
향불의 기운이 여인의 몸을 채우자 붉은 검에 꿰뚫린 상처에서 출혈이 멎었다.
여인은 그대로 물러나더니 사방의 원력이 어지러워진 상태임에도 다시 한번 세상에 녹아들어 도망치려 했다.
‘저 여인을 풍우계의 혼으로 삼을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한제는 다시 여인을 뒤쫓기 시작했다.
★ ★ ★
태고의 성신 서북쪽에는 마갈족(魔蝎族)의 성역이 있다. 마갈족은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태고의 성신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잔혹함으로 유명했다.
한데 그 마갈족 성역의 어느 수련성 밖에서 파문이 일더니 백의의 여인이 잔뜩 허약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나타나기가 무섭게 다시 순간이동을 하려 했다.
‘이제 두 번! 두 번의 순간이동이면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어!’
허나 그녀는 순간이동을 하지 못했다. 하늘을 뒤덮을 듯 짙은 붉은 빛이 나타나 허공을 가르며 그녀의 미간으로 달려든 것이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그 순간, 여인의 정수리에서 한층 짙어진 유백색 기운이 흩어지더니 방어막을 이루어 붉은 검을 막아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검은 유백색 기운을 관통해 여인에게 뻗어 갔다.
그나마 방어막의 영향으로 방향이 틀어진 덕에 여인은 미간이 아닌 오른쪽 어깨를 뚫리는 것에 그쳤다.
“크윽!”
여인은 비명을 내지르며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때, 허공에서 한제가 나타나더니 여인을 향해 손을 뻗어 꽉 움켜쥐었다.
“어딜 도망치려 하느냐!”
그의 힘에 꽉 붙들린 순간, 여인은 혀끝을 깨물더니 피를 뿜어냈다. 피는 유백색 기운과 합쳐져 요란한 소리와 함께 퍼져나갔다. 그 반동으로 여인은 한제의 힘에서 벗어나 마갈족의 수련성으로 피할 수 있었다.
“마갈족이여,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난비의 분신이다! 당장 나와서 저자를 막아라!”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잠시 후 수련성에서 강력한 기운이 흘러나왔고 눈 깜짝할 사이 수천 명의 수련자가 나타났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행패를 부리느냐!”
수련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인은 그 틈을 이용해 단약을 삼키고는 고개를 돌려 한제를 노려보더니 다시 한번 순간이동을 하려 했다.
허나 한제는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1만 척에 달하는 고신으로 변하더니 몸을 날렸다. 동시에 주먹을 세차게 휘둘렀다.
콰쾅!
단 일격에 온 우주가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고 거대한 균열이 나타났다. 쩌적 소리와 함께 끝없이 벌어지는 균열은 우주를 둘로 갈라버릴 기세였다.
“헛!”
균열이 나타난 순간, 백의의 여인은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한층 창백해졌다.
그 무렵, 수천 명의 마갈족 수련자가 법보를 꺼내 들고 공격해왔지만 한제는 그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앞으로 나섰다.
그러는 사이 사방에서 그의 주위로 빛이 모여들더니 거대한 빛 덩어리를 형성했다. 이 빛 덩어리는 마갈족의 모든 신통력과 법보를 그대로 반사했다.
“크아악!”
“커헉!”
광영순의 힘 아래 사방에서 수련자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게다가 그중에는 고신이 된 한제가 튀어나가는 기세를 못 이겨 육신이 무너져 내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낸 한제는 곧장 백의의 여인에게 주먹을 뻗었다.
속임수
상황을 인지한 마갈족 성역의 다른 수련성에서도 수련자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백의의 여인은 이 세상에 자신과 한제만이 남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도 상대의 주먹을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위기의 순간, 그녀는 온몸에서 더 많은 유백색 기운을 발산했다. 이 기운들은 순식간에 미간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새하얀 미간에 천(川)자 낙인이 나타났다. 각각의 선은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번득였고 그 순간 여인의 심신에는 거의 잊혔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기억 속,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족(河族)의 성녀로 선택되어 전수를 받던 그날, 그녀의 앞 허공에서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손바닥이 나타났다. 따뜻한 손바닥이 미간을 문지르자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하족의 낙인이 지워졌다.
“오늘부터 너는 나의 분신 중 하나로 그 분신을 자양하고 나의 회복을 돕거라. 또한 너는 나의 향불이 되기도 할 것이다.”
허나 지금은 위기의 순간.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대해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