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19
폭풍이 붕괴하자 그 자리에는 한 갈래 거대한 균열이 나타났다. 이어서 하늘을 뒤덮을 듯 격렬한 화염을 이글거리는 균열 사이에서 한제가 걸어 나왔다.
펄럭이는 백의와 흩날리는 백발, 잔혹한 눈빛. 한제는 균열에서 나오자마자 일곱 빛깔 화염 안쪽에 가부좌를 튼 상대를 바라보았다.
“장존!”
활활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번뜩이는 두 눈이 한제에게 꽂혔다.
“이한제라고 했던가?”
흐릿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다!”
한제는 날카롭게 외치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번개 문양과 아홉 색깔 화염이 튀어나와 허이국을 감싸더니 곧장 저물공간으로 회수했다.
뒤이어 번개 문양과 아홉 색깔 화염은 커다란 손으로 변해 유금표를 틀어쥐더니 힘껏 잡아당겼다. 덕분에 수많은 가지로부터 겨우 벗어나게 된 유금표 역시 저물공간으로 들어갔다.
화염 속의 인영은 한제를 저지하지 않았다.
“대단하구나. 네게서 청림과 청수, 그리고 사마묵이 보인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알면서도 온 것은 1대 주작을 믿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의 부상을 틈타 처리하겠다는 생각인가?”
“둘 다 부정하지 않겠다!”
한제는 한층 날카로운 살기를 번득이며 앞으로 나서서 일곱 빛깔 화염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왼쪽 눈의 아홉 빛깔 화염이 증폭되면서 허상의 화염으로 튀어나와 폭풍을 형성했다.
오른쪽 눈에서는 번개 문양이 튀어나와 맴돌다가 아홉 갈래의 천둥 번개로 변해 아홉 마리의 태고 뇌룡이 됐다. 이때 번개 문양에는 한 줄기 균열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태고 뇌계에 이를 수 있었다.
한제는 결인을 그린 왼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순간 풀과 나무의 향으로 가득 찬 이 공간에 빽빽한 숲이 형성됐고 뒤이어 장천목령이 일어나 일곱 빛깔 화염에게 달려들었다.
붉은 검 역시 한제의 손짓에 따라 돌진했다.
심지어 한제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온몸의 수준을 사방으로 폭발시켜 거대한 충격을 일으키기도 했다. 순식간에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신통술과 법보를 일곱 빛깔 화염에 쏟아부은 것이다.
그러나 화염에서는 서늘한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훌륭한 판단이다. 난 분명 아직 회복하지 못했지. 허나 네가 가져온 그 천역주가 있다면 나는 금세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염 속의 그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 팔 역시 갑옷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난 여태 수련을 해오면서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샀다. 하지만 결국 누구도 나를 죽이지는 못했지. 넌 분명 뛰어난 녀석이지만 나를 해하기에는 부족하다. 대신 네 기개를 높이 사 나는 단 하나의 술법만 사용해주마!”
일곱 빛깔 화염 속 인영은 들어 올린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이 세상을 하나의 우물이라 한다면⋯⋯.”
순간 온 세상이 진동했다. 아래쪽에는 파문이 일면서 수증기가 발산됐고 형용할 수 없는 힘이 확산됨에 따라 공간 전체가 눈 깜짝할 사이 수면으로 변해버렸다.
“우물 속에는 만물이 있지. 네 모든 신통술, 법보, 그리고 네 몸 역시 우물 안에 존재할 뿐이다.”
수면이 된 공간은 곧 잔잔해졌다. 그러다가 물결이 멈추자 수면 위로 모든 것이 비추어 보였다.
한제의 화염 폭풍과 번개 문양, 장천목령⋯⋯ 심지어 정중앙에는 한제 자신도 있었다. 다만 모든 것이 거꾸로 비춰 있었고 일곱 빛깔 화염은 보이지 않았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얼핏 보면 수면 위와 아래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제의 몸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법보들 역시 그대로 멈춘 상태였다. 수면에 비친 모습에 모든 존재가 기겁한 듯한 모습이었다.
한제는 수면에 비친 것이 자신임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기묘하나 매우 사실적이기도 했다.
“내가 발휘할 단 하나의 신통술은 바로 우물 안의 달을 건지는 정중로월(井中撈月)이다!”
우물에는 본디 달이 없다. 있다 해도 그것은 하늘의 달이 비춘 모습일 뿐이다. 허나 일곱 빛깔 화염 속의 존재는 단순한 현상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정중로월!
화염 속 인영은 수면을 향해 손을 내렸다. 그러자 수면에는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에 비춘 한제는 어느덧 그 손에 건져지고 말았다.
상대가 손에 틀어쥔 것은 물이 아니라 분명 거친 눈빛으로 몸부림을 치는 한제였다.
그 모습을 본 한제의 심신이 순간 굳어졌다.
“우물에 비친 달이 퍽 아름다워 하나 갖고 싶었지. 자 이렇게 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일곱 빛깔 화염 속 그는 한제를 쥔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자는 바로 너다!”
화르륵 일어난 일곱 빛깔 화염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그 안의 흐릿한 인영은 곧 또렷해졌다.
얼굴이 창백하고 두 눈이 깊은 물처럼 잔잔한, 빼어난 외모의 중년 사내였다. 그는 기이한 형태의 회색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마치 피부처럼 육신과 구별할 수가 없었다.
선인의 느낌이 풍기는 그는 자신의 손에 붙잡힌 한제를 바라보았다.
“봐라, 너를 죽이는 것은 이토록 간단하다.”
그의 정중로월로 건져내는 것은 영혼이었다.
“보아하니 정말 극심한 부상을 입은 모양이군.”
한제는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에서 이전과 같은 포악한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침착함뿐이었다.
수면 아래에서 한제를 건져 올린 사내는 기이한 눈으로 한제를 보았다.
그의 정중로월 아래 모습이 비친 사람은 육신의 힘을 모조리 잃어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한데 지금 한제는 분명 말을 했다.
뿐만 아니라 한제는 몸을 날리면서 손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주작의 깃털이 나타났다.
1대 주작의 고향에 존재하는 진정한 주작, 수련자의 영혼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 있는 주작을 소환할 수 있는 깃털이었다.
깃털은 곧장 온 세상을 불태울 법한 화염을 발산했고 이 공간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불바다는 분노한 듯 더욱 격렬하게 타올랐다.
중년 사내는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한제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무너져 죽음을 맞이했다.
“큭!”
한제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지만 멈추지 않고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1대 주작이 알려준 대로 낮게 외쳤다.
“6대 주작, 주작의 깃털을 통해 태고계로부터 우리 주작족의 원령을 소환한다!”
콰르릉!
한제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굉음이 울려 퍼졌고 중년 사내는 눈을 번득이며 벌떡 일어섰다.
“내 너를 얕잡아봤구나! 철저하게도 준비를 했어. 한 줄기 마혼으로 본체를 대신하다니, 훌륭하다!”
한제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천운자와 결합하여 미래를 예측한 바 있다. 그리고 수도자와의 전투를 앞두었을 당시처럼 그는 흐릿한 미래를 보게 됐다. 영혼과 관련하여 죽음의 위기가 닥친 미래였다.
한제가 평생 숱한 위기를 겪고도 여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영리함과 신중함 덕분이었다.
장존이 중상을 입은 상태임을 알고 있음에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그는 여러 개의 퇴로를 마련해두었다. 심지어 그는 고마의 혼에게서 이성을 지워 자신의 혼백을 대체하기까지 했다. 그랬기에 그토록 강력한 술법인 정중로월이 건져낸 것은 한제가 아닌 고마의 혼이 되었다.
마혼으로 자신의 혼을 대체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한제와 같은 고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통 수련자라면 제아무리 수준이 높은 자라 해도 상대에게 진즉 발각되거나 무너져 내렸을 터였다.
하지만 고마와 뿌리가 같은 고신인 한제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상대가 아직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 상태인 데다가 그가 한제를 과소평가했다는 것도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한제라 해도 성공하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물론 그랬다 해도 한제는 다른 퇴로를 준비해 두었겠지만.
세상을 멸망시키는 우산
사방을 뒤덮은 불바다 속에서 한제가 주작의 원령을 소환한 순간, 화염이 들끓었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의 정중앙, 한제의 상공에는 거대한 회오리가 나타났다. 신비의 세계로 통하는 문으로 회오리에서는 주작의 포효가 들려왔다.
이 주작의 포효를 들은 순간 한제는 심장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주위를 맴돌던 그의 주작 역시 주작 원령의 포효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듯 경외심 어린 눈빛을 드러냈다.
반면 일곱 빛깔 화염 속 중년 사내의 뒤로 나타난 일곱 빛깔 주작 역시 두려워하는 듯했지만 녀석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허나 감히 덤벼들 엄두는 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중년 사내의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그 늙은이가 날 죽이라고 네게 그것까지 내주었단 말이냐?”
“캬오오오!”
사내의 목소리를 뒤덮으며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주작의 포효와 함께 화염 회오리에서는 두려울 정도의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 위압감이 확산됨에 따라 세상의 온도는 마치 염계(炎界)처럼 치솟기 시작했다.
콰쾅!
거대한 주작의 부리가 회오리에서부터 내려왔다. 부리 하나만 겨우 보일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늘의 절반을 뒤덮었고 그 순간 위압감이 몇 배로 증폭했다. 동시에 하늘을 뒤덮고 있던 불바다가 불룩해지면서 점점 격렬하게 타올랐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내려온 주작의 부리는 일곱 빛깔 화염 속 중년 사내를 쪼을 듯 매섭게 달려들었다. 그러는 사이 하늘은 주작 원령의 거대한 머리로 변해 있었다.
광기 어린 분노의 화염을 드러낸 주작의 두 눈을 본 순간, 한제는 그것이 1대 주작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콰콰쾅! 콰르릉!
끊임없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늘의 절반을 차지한 주작의 부리는 어느덧 일곱 빛깔 화염으로부터 1천 척 거리에 이르렀다.
고신의 손가락보다 더 빠르고 강력한 기세로 따지자면 8성급 이상의 성년 고신이 직접 발휘한 신통력으로나 대항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중년 사내는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두 손을 휘둘렀다. 순간 그의 몸을 감싼 일곱 빛깔 화염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주작 한 마리를 형성하더니 주작 원령의 부리에게 달려들었다.
꽈르릉!
두 주작이 충돌한 순간, 일곱 빛깔의 주작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쿨럭!”
중년 사내는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하더니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는 결인을 그린 두 손을 맹렬히 휘둘렀다.
“지(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