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39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전에서 터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힘을 품은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짐과 동시에 닫혀 있던 정전의 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열린 정전의 문 사이로 대전 저쪽 끝의 거대한 용상 위에 한 사내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황포를 입고 관을 쓴 그에게서는 짙은 위엄이 느껴졌다. 한 사람을 질식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는 그는 도고 황존이었다.
“황존을 뵙습니다!”
광장과 허공의 대 위의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일어나 황존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한데 도고 일맥이라면 누구나 한쪽 무릎을 꿇어야 했음에도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는 도고 황존을 향해 인사만을 했을 뿐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이때 그의 표정은 덤덤해 보였지만 마음속에서는 광기 어린 살기가 자꾸만 기승을 부리려 하고 있었다. 마치 밀려드는 밀물처럼 그의 심신을 잠식하려 드는 그 기운을 억누르기가 갈수록 힘들어졌다.
한데 이 느낌은 정전이 열리고 도고 황존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더욱 격렬해졌다.
“모두 와줘서 기쁘구나! 말은 아끼고 술은 아낌없이 베풀 테니 부디 우리 도고 일맥을 비롯한 모두가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도고 황존이 오른손을 들자 곁에 나타난 허상이 술을 따라주었다.
광장과 허공에 뜬 대 위의 모든 이들도 상에 놓인 잔을 공손하게 치켜들었다.
말없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한제 역시 술잔을 들었다. 최대한 빨리 스승님의 선물을 전달하고 곧장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점점 초조해지고 짜증스러워지는 마음에 얼굴이 점차 창백해질 정도였다.
도고 황존은 미소를 지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도 축하의 뜻을 전하며 잔을 비웠지만 마시지 않고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제가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할 때, 도고 황존이 한 발 앞서 입을 열었다.
“우리 도고 일맥의 경사스러운 날을 맞아 내 선포할 것이 하나 있다.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현라 대천존의 제자이자 선족 백발 약천존인 이한제가 앞으로 우리 도고 일맥의 수호자가 될 것이다! 이한제, 앞으로 나와 칙령을 받으라!”
한제는 묵묵히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오더니 정전 밖에 서서 다시 포권을 했다.
“아직도 무릎을 꿇지 않을 생각이냐?”
도고 황존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한제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도 이상한 상황의 낌새를 눈치챘다.
그중 계도 황자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는 사실 한제가 도고를 거스르고 반기를 드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존, 저는 스승님을 대신해 선물을 전하러 왔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제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자꾸만 초조해지는 마음에 황존을 향한 눈에는 서늘한 빛이 어리기까지 했다. 자신조차도 눈앞의 상대에게 왜 이렇게 강한 살기와 반발심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한제는 소매를 휘둘러 현라가 건넨 상자를 소환해 앞으로 떠밀었다. 도고 황존 앞에 나타난 허상은 그 상자를 받아들고 황존에게 공손히 바쳤다.
“이한제, 너를 우리 도고 일맥의 수호자로 임명하겠다! 급한 일이 있다면 떠나도 좋지만 내일 황후 책봉식에는 꼭 참가했으면 좋겠구나.”
도고 황존은 한제를 바라보다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제의 거동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더는 그를 보지도 않았다.
“황후를 데려오도록!”
갈수록 초조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돌아선 한제는 곧장 떠나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돌연 그는 귓가에 닿는 방울 소리와 함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초조함과 짜증은 씻은 듯 사라졌다.
흠칫 놀란 한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야에는 황후의 옷을 입은 채 도고 황존을 향해 걸어오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색깔이 선연한 황후의 옷으로 인해 그녀는 한층 더 고귀해 보였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은 주렴에 가려져 있었다. 그 주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미간을 살짝 구긴 채, 그녀는 도고 황존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한제의 귀에 닿았던 방울 소리는 사실 방울이 아니라 주렴이 서로 부딪치면서 난 소리였다.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의 시선이 여인에게 쏠렸다. 절륜의 아름다움은 아니었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특유의 기운이 풍기는 여인은 영혼까지도 안정시킬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고요하고 잔잔한 느낌. 하늘 높이 떠올라 구름 사이를 오가는 새만이 이따금씩 볼 수 있는, 산골짜기에 만개한 백합 같았다.
한편, 한제는 그 여인을 본 순간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초조함과 짜증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송세정⋯⋯?’
그는 단번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시고 일맥 구역 흑석성에서 보았던 여인이었다.
도고 황존은 매우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황후, 내 곁으로 오시오. 오늘은 우리 도고 일맥의 기쁜 날임과 동시에 나와 황후의 기쁜 날이기도 하니.”
황후의 복장을 한 여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말없이 황존의 용상 옆에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대전 밖을 내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혼란이 어려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의 머릿속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천둥이 동시에 내리친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한제의 온몸과 원신을 뒤덮고 영혼까지 뒤흔들었다. 마치 그의 생에 부족한 한 부분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제는 표정이 급변한 채 여인을 응시했다. 심장은 점차 빠르게 쿵쾅댔다. 그녀에게서 너무도 익숙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모완⋯⋯ 이천매⋯⋯ 주은혜⋯⋯ 홍접⋯⋯.’
한제는 멍하니 여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여인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허나 끝내 그 익숙함의 이유를 명확히 알아내지는 못했다.
‘어째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여인의 얼굴은 낯설었다.
“이한제!”
그때, 높지는 않지만 묵직한 위엄이 어린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
“나의 황후가 그렇게도 자네의 시선을 끌던가?”
도고 황존은 서늘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외쳤다. 황존으로서 황후를 소개하는 자리임은 분명했지만 한제의 시선은 방만하게도 황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니 본래 한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황존으로서는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한제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했으나 눈빛은 여전히 복잡했다. 더욱이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 여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잠시 후, 그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고 눈빛에는 슬픔이 어렸다.
눈앞의 여인은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없이 침착하고 잔잔한 여인의 기운은 이모완과 닮은 구석이 있었으나, 이는 억지로 찾아낸 공통점에 불과했다.
‘모완일 리 없어. 기운이 닮았을 뿐. 내 착각이다.’
정말 그녀가 이모완이라면 지금 자신의 수준으로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송세정에게서 이모완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완의 육신은 피천관에 있고 잔혼은 잃어버린 상태다. 이 여인은 아니야. 한데 이 정도로 모완가 비슷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한제는 두 눈을 감아 슬픔을 숨겼다.
극도의 분노 (1)
한편, 송세정은 얼굴을 살짝 붉혔는데 눈빛에는 약간의 분노가 어려 있었다. 한제의 무례한 시선에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저 사내에게서 익숙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 느낌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내가 묻지 않았느냐!”
도고 황존은 왼손을 들어 올려 용상의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콰쾅!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팔걸이는 멀쩡했다.
그 순간, 수십 갈래의 살기가 나타나 한제를 겨누었다. 동시에 한제의 주위로 수십 갈래의 연기 같은 허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보일 듯 말 듯한 이 허상들은 도고 황존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곧장 한제에게 공격을 쏟아 부을 것이었다.
한편, 정전 광장과 수백 개의 대 위의 고족 사람들 또한 이 상황을 살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과 너무도 닮아 결례를 범했군요.”
그렇게 답하며 눈을 뜬 한제는 황후가 자신을 노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고 있자 어째서인지 심장이 아파왔다. 허나 이미 저 여인은 자신이 찾는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한제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저 모완과 너무나도 닮은 기운에 슬픔과 고통이 밀려들었을 뿐이다.
“뭐라?”
도고 황존의 눈이 순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번득였다. 이어서 곧장 고개를 돌려 송세정과 한제를 번갈아 보던 그의 입가에 돌연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걸렸다.
“황후, 장차 우리 도고 일맥을 책임질 이 수호자를 아시오?”
도고 황존이 여유롭게 물었다.
송세정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당시 국사는 잔혼을 봉인했으니 심지어 대천존이라 해도 그 여인의 정확한 정체나 내력을 알아챌 수 없을 거라고 했지.’
도고 황존은 비릿하게 웃었다.
‘한데 그 잔혼이 이한제와 관련이 있는 자의 것인가? 재미있군.’
도고 황존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서로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황후, 그가 잘 살펴볼 수 있도록 가까이 가보시오. 만약 정말로 둘이 서로 알고 있는 사이라면 이 또한 우리 도고 일맥의 경사 아니겠소.”
황존의 말에 여인은 말없이 일어나더니 천천히 한제에게로 다가갔다. 그런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는 한제의 심신은 마치 모완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진동했다. 심지어는 몸까지도 덜덜 떨렸다.
여인은 한제로부터 10척 떨어진 곳에 서서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 서늘한 눈에 어린 분노는 오히려 더 짙어져 있었다.
익숙함 속에 느껴지는 낯설음에 한제는 생각하는 것도 자신이 도고 황궁에 있다는 것도 이곳이 선강 대륙 고족 구역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마치 동부계 주작성 산골짜기로 돌아온 듯 멍하니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슬픔은 온 세상을 녹여버릴 만큼 짙었다.
그 슬픔을 목격한 여인은 돌연 찌르는 듯 아파 오는 심장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동시에 눈빛에 혼란이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노기가 드러났다.
“⋯⋯아닙니다.”
한참 뒤, 한제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돌연 술이 간절해졌다. 얼큰히 취해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잊고 싶었다. 방금 전까지 상대에게서 느꼈던 그 모든 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착각은 계속해서 그리움을 자극했고 수천 년 전의 일들을 떠올리게 했다.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난 한제는 더는 눈앞의 여인도 도고 황존도 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곧장 떠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상으로 돌아가 앉더니 그대로 술병을 입에 기울였다.
상당히 알싸한 술이었지만 취하지는 않았다.
어느덧 한제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술과 함께 그의 입으로 흘러든 눈물은 씁쓸하고 축축했다. 슬픔의 맛이었다.
송세정은 황존 곁으로 돌아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았다. 도고 황존은 짙은 미소를 지은 채 한제와 여인을 번갈아 보았다. 의기양양하고 기쁜 듯한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분명 둘은 관련이 있어. 잔혼이 혼란에 빠진 것도 이한제 때문인 듯하군. 네 수준이 얼마나 높다 한들, 네가 얼마나 많은 혼혈을 가지고 있다 한들, 대천존 현라의 제자라 한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슬픔을 막을 수는 없다! 아주 재미있군. 크흐흐.’
황존은 잔을 들어 다시 한번 연회의 참석자들과 술을 마셨다.
도고 일맥의 전통에 따르면 황후는 이만 돌려보내야 했지만 황존은 그녀를 자신의 곁에 앉혀 두었다. 한제가 슬픔에 빠진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상대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어마어마한 쾌감을 느꼈다.
이내 연회의 분위기는 고조됐다. 곳곳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터져 나왔고 축하 인사가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요란한 와중에도 한제는 묵묵히 술을 마셨다. 허나 슬픔은 술로도 씻어낼 수 없었다.
“황후, 이한제의 기분이 아무래도 좋지 않은 모양인데 그대가 나를 대신해서 저자와 술을 마셔주는 것이 어떻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