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0
그 사내의 마지막 말에 숨은 의미를 한제는 명확하게 파악했다. 어떤 사람이든 그 물약을 가져오기만 하면 그가 말했던 그 어떤 보상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뜻으로 자칫하면 한제가 다른 사람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제는 온몸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한제에게서 ‘어떤 방법으로든’ 물약 한 병만 얻어낼 수 있다면 그 자주색 옷의 사내를 찾아가 원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한제는 교역회에 참석하기 전부터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예상했기에 그리 긴장하지 않았다.
마지막 사람이 내놓은 물건의 거래가 성사되면서 교역회는 마무리됐다. 한제는 허벅지에 수십 장의 부적을 붙여,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의 기쁨과 얻지 못한 사람의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한제의 물약을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머리를 굴리던 몇몇 제자들은 깜짝 놀랐으나, 이미 뒤쫓기엔 늦었다는 것을 알고는 욕설을 내뱉으며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유일하게 한제의 정체를 알고 있던 이현만이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다가 부적을 사용해 한제의 뒤를 쫓았다.
똑똑한 자들은 굳이 한제를 뒤쫓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문파 내에서 이루어진 정식 제자들의 교역장이었으니, 불미스런 사고가 발생하면 범인은 쉽게 발각될 테니 말이다.
한제는 달리면서도 계속해서 다리에 부적을 붙였다. 속도를 높여주는 이 부적은 많이 붙일수록 높은 속도를 낼 수 있었는데 너무 많이 붙여서인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져서 하마터면 문파를 지나칠 뻔했다.
그가 이토록 서두른 것은 다른 제자들 때문이 아니라, 자주색 옷의 남자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제는 곧장 잡무처로 돌아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아무도 없는 방에 숨어 있다가 하늘 끄트머리가 밝아올 무렵 변신단의 효과가 사라진 후에야 그 방에서 나왔다.
다행히 어떤 이상 상황도 없었다. 한제는 잡무처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닫고 수련에 돌입하더니 다른 어떤 일도 돌아보지 않았다.
★ ★ ★
응기 9단계까지의 구결을 손에 넣은 한제는 방에만 틀어박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고 온 대산파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충만해졌다.
10위 안에 들기만 하면 법보(法寶), 단약, 영석(靈石), 옥패 등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인지, 모든 정식 제자들은 연말 시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이번 시합에 더욱 목을 매는 것은, 장문인(掌門人)이 우승자에게 문파의 중요한 보물인 쌍월환(雙月環)을 선물로 주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었다.
쌍월환은 300년 전, 문파의 어느 선배가 남긴 유물로 위력이 매우 강했고 공격과 수비가 모두 가능한 보물이었다. 누구나 탐낼 만한 물건이었기에 정식 제자들은 저마다 우승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입문자들 간의 시합은 이산이 무탈하게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입문자의 수가 많지 않은 와중에 이산의 자질이 워낙 압도적일뿐만 아니라, 문파 내에서도 가장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제자였으니 말이다.
한편 기명 제자 그러니까 수련생들의 경우 서로를 적대시하는 정도가 훨씬 심했다. 그들 입장에서 이번 제자 시합은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기회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중 상당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한제는 이런 분위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온종일 수련에만 매진했다.
그 달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한제는 장원으로 나왔다. 영기를 숨기는 데에는 이미 익숙해졌기에 응기 1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것 같은 상태로 위장할 수 있었다.
잡무처에는 보는 눈이 많아 수련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산 아래 조용한 곳에서 수련에 정진하고 싶었다.
그는 큰 보폭으로 나아가 얼마 후 손대주의 약초밭에 도착했다. 한제는 공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자 이한제, 사부를 뵈옵니다.”
“무슨 일로 왔느냐?”
약초밭의 대문이 열리기도 전에 손대주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이 표면적으로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제 수준이 낮아 내일 시합에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도리어 사부님의 체면을 구기게 될까 우려되니, 아예 참가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흥, 눈치는 제법 있구나. 허 사숙의 제자 이산은 어린 나이에도 벌써 2단계로 진입할 기세더구나. 그런 녀석에게 덤벼봐야 헛고생이다. 그 녀석은 단번에 널 쓰러트릴 거야. 듣자하니 네 친척이라지? 그런데 어찌 그렇게 차이가 나는지…”
손대주가 비웃음을 숨기지도 않고 중얼거렸으나, 한제는 개의치 않았다.
“이산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영기도 충만한 아이였습니다. 저와 비교될 바가 아니지요.”
“지난 반년 동안 다른 조롱박은 찾았느냐?”
손대주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물었다. 한제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물을 뜨러 그토록 자주 가는데 더는 조롱박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더 볼일 있느냐? 없다면 썩 꺼져라. 널 보기만 해도 답답하구나!”
손대주는 냉정하게 말했다.
“사부님, 산에만 있으려니 너무 답답합니다. 잠깐 내려갔다 오면 안 되겠습니까? 올해가 지나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한제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산 아래? 안 된다. 깜빡했는데 4년 후 있을 현도종(玄道宗)과의 교류회에 대비해 장문인께서 모든 정식 제자는 내년부터 4년간 합동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고 하셨다. 너도 참가해라. 교류회에서 면목 없는 일이 발생하여, 내 체면을 구겨서는 안 될 것 아니겠느냐!”
“합동 훈련이요?”
한제가 멍하니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교류회는 20년에 한 번씩 열린다. 수백 년간 이어져온 규칙이야. 현도종과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관계가 좋지만 사실 경쟁 관계이지. 최근 1백 년간의 교류회에서는 모두 우리가 지고 말았다. 정말 면목 없는 일이야. 그러니 합동 훈련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잘 들어라. 이번 합동 훈련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4년 뒤에 있을 교류회에서 내 체면을 구긴다면 너를 대산파에서 내쫓을 것이다!”
손대주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자기 할 말만 내뱉어버렸다.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나가 수련하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실망이 컸으나, 겉으로는 공손하게 손대주에게 부복한 후 물러났다.
잡무처로 돌아온 한제는 고민에 빠졌다. 밖으로 나가 수련을 할 수 없다면 이번 합동 훈련을 이용해 수련할 기회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다음 날, 정식 제자 시합이 시작되었다. 문파 내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지만 한제는 시합을 관람하는 대신 호흡을 가다듬고 응기 2단계를 공고히 다지기로 했다.
그 후 며칠간 수련생들의 대화를 통해 한제는 이번 정식 제자들 중 장 사형이 1등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자주색 옷의 사내가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입문자들 중 1등은 이산이 차지했다. 그 후로 이산은 더욱 오만방자해져 동년배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 ★ ★
1주일 후 이른 아침, 총 다섯의 종소리가 문파에 울려 퍼졌다. 이는 모든 정식 제자들에게 빨리 문파의 대전으로 모이라는 신호였다.
한제는 꿈속에서 수련하고 있던 탓에 그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가 잔뜩 화가 난 손대주가 잡무처의 대문을 박차는 소리에 퍼뜩 놀라 일어났다.
그는 황급히 석주를 숨긴 뒤, 비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 한제를 보며 손대주가 잡아먹을 듯이 소리쳤다.
“귀가 막혔느냐? 종소리 못 들었어? 이 망할 자식! 모든 정식 제자가 다 모였는데 너 하나만 오지 않았더구나! 온 사형과 사제들 앞에서 내 체면이 땅에 처박혔다! 네가⋯⋯ 네가 감히!”
한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대주는 한제를 찢어죽일 듯 노려보았다. 허나 장문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은 한제를 혼내기에 좋은 때가 아니었다. 손대주는 한제를 잡아끌어, 무지갯빛 구름에 태운 뒤 대전으로 향했다.
★ ★ ★
대전 앞에 도착한 손대주는 한제를 바닥에 메다꽂은 뒤 소리 죽여 말했다.
“한 번만 더 내 체면을 구겼다가는 넌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마지막 말을 내뱉는 손대주의 눈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한제에 대한 그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해, 기회만 생긴다면 당장에라도 내쫓을 생각이었다.
한제는 팔을 문질렀다. 응기 2단계에 이른 상태가 아니었다면 바닥에 메다 꽂힐 때 벌써 팔이 부러지고 말았을 터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손대주는 콧방귀를 뀌고 옷을 정리한 뒤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한제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손대주의 뒤를 따랐다.
대전은 대산파 내에서 가장 엄숙하고 장중한 곳이었다. 매우 넓은 그곳에는 선현들의 거대한 조각상 수십 개가 좌우로 늘어서 있어, 항상 묵직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손대주를 따라 대전으로 들어선 한제는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수많은 시선에 주눅이 들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뒷산
대전에는 40명이 넘는 정식 제자들이 저마다 검은색, 흰색, 붉은색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 허나 유일하게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만은 그 자리에 없었다.
모든 제자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공손하게 서 있었다. 그중에는 이산과 서 씨 소녀, 주 씨 여자 장 사형 등 낯익은 얼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앞에 양옆으로 펼쳐진 두 단에는 열 명이 넘는 노인들이 냉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정중앙에는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남색 옷을 입은 그에게서는 선인의 풍채가 느껴졌고 눈빛은 형형했다.
그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손 사제, 그가 자네의 제자인가?”
손대주는 황급히 아첨하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문인, 이 녀석이 바로 제 제자 이한제입니다. 입문이 늦어 종소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답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그 사부에 그 제자군. 저리 아둔하고 멍청한 제자라니, 당시의 자네를 쏙 빼닮았군!.”
오른쪽 첫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붉은 얼굴의 노인이 비웃듯 말했다.
“사형, 그 말은 심하셨습니다. 손 사제는 적어도 타고난 자질은 합격이었어요. 저 제자 녀석에 비하면 훨씬 낫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