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82
“아저씨⋯⋯.”
은혜가 낭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저씨라니.”
작게 한숨을 내쉰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랑 갈래?”
은혜는 한층 아득해진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저 아저씨는 그립고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는 복잡한 표정으로 은혜를 안은 채 오른손을 휘둘러 한 줄기 영력으로 아이를 감쌌다. 비행을 할 때 불어닥칠 찬바람을 막아줄 보호막이었다.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선옥으로 만들어진 보탑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옆에는 석실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집에 왔다.”
한제는 은혜를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은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기심 어린 커다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고 그저 한제 곁에 서 있었다.
한제가 어디를 가든 은혜는 그 뒤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한제가 좌선을 할 때면 얌전히 그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깊은 밤, 은혜가 곯아떨어지자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한제는 꿈을 꾸는 듯한 아이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완아, 네 원영은 안정적이지 못해서 기억을 회복할 수 없지만 네가 열아홉 살이 되면 자연스럽게 회복될 거야.”
은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당시 모완과 함께했던 장면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작게 한숨을 쉰 한제는 은혜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세 살 아이에게는 잘 먹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했기에 석실 밖으로 나온 한제는 법술로 주방 하나를 뚝딱 만들었다. 지금껏 밥이라고는 지어본 적도 없었지만 많은 먹거리를 사와 직접 죽을 끓이고 밥을 했다.
이른 아침, 눈을 뜬 은혜가 가장 먼저 본 것은 가부좌를 튼 채 옆에 앉아 있는 한제였다. 은혜는 턱을 괸 채 얌전히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은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배고프니?”
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그의 손에 죽 한 그릇이 나타났다. 은혜는 죽을 다 먹은 후에야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저씨, 이 그릇 어떻게 날아왔어?”
한제는 답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고 좌선을 했다.
★ ★ ★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한제는 이런 생활에 점차 익숙해져갔다. 매일 은혜가 조금씩 커가는 것을 보면서 화범(化凡)하여 일반인으로 살던 당시로 돌아간 듯했다. 안정적이고 평범한 생활이었다.
어느 날 깊은 밤, 좌선한 채 호흡하던 한제는 석실 안에서 들려온 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 달려갔다. 어린 은혜가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이불을 한 쪽으로 걷어찬 아이의 작은 손은 꽉 쥐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발악하는 듯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아저씨⋯⋯ 살려줘. 아저씨⋯⋯ 아버지⋯⋯ 어머니⋯⋯.”
한제는 오른손을 아이의 미간에 얹고 천천히 한 줄기의 영력을 불어넣었다. 은혜는 차차 안정을 찾아갔고 이내 두 눈을 뜬 아이의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한제를 본 은혜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울음은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온통 어둠만 가득한 가운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녀를 떠나고 아저씨도 떠나 홀로 남은 악몽을 꾼 것이었다.
한제는 소리 없이 웃었다.
“이거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또 아까 같은 일이 생기면 흔들어.”
한제는 저물대에서 방울 하나를 꺼내 은혜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는 구사평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한제는 연구를 통해 이 방울이 그가 그 상고 시대 수련자에게서 얻은 방울 법보와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아냈다. 한제는 이 세 개의 방울에 새겨진 몇 개의 결인과 사용 방법을 연구했고 실제로 시험해본 결과 그 위력에 상당히 만족했다. 세 개의 방울 사이에는 기이한 관련이 있어서,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어디에 있든 다른 방울의 존재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구사평의 저물대에는 검집도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검집을 본 순간, 한제는 자신의 저물대에 있는 세 개의 검집을 모조리 꺼내 비교해 모았다. 네 자루의 검집은 새겨진 꽃무늬만 다를 뿐, 그 외에는 똑같았다.
★ ★ ★
어느덧 2년이 흘렀고 은혜는 다섯 살이 되었다.
지난 2년 동안 한제는 곤란한 상황을 여러 차례 맞닥뜨렸다. 은혜는 더 이상 이전처럼 얌전한 아이가 아니라 말괄량이 소녀가 되어서 이따금 한제가 자리를 비울 때면 장난삼아 방울을 흔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한제가 곧장 자신의 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제는 아이를 꾸짖지 않았다. 하지만 총명한 은혜는 몇 차례 그런 일을 벌인 후로는 더 이상 그런 장난을 치지 않았다. 대신 그 방울이 진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언제나 품속에 지니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한제는 은혜를 데리고 그 부모를 찾아간 적도 있다. 다만 부부가 모두 잠든 후였다.
사도환
석실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제가 눈을 떠보니 은혜가 살금살금 보탑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죽 한 그릇이 들려 있었다. 한제를 본 은혜는 혀를 쏙 빼물더니 냉큼 달려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 나 아까 또 신선 언니 보고 왔다. 근데 언니는 밥을 안 먹어.”
네 살 되던 해에 보탑 안의 여인의 시체를 본 후부터 은혜는 틈만 나면 그리로 달려갔다. 심지어 한번은 한제가 끓여준 죽을 가지고 가 여인의 시체에게 먹여주려고까지 했다. 여인의 시체가 전혀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제로서는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사실을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죽을 먹이려 했던 일에 대해서는 꽤나 진지하게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결국 은혜는 하얀 옷의 여인이 왜 항상 잠만 잘 뿐 밥은 먹지 않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신선 언니는 밥을 먹지 않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죽을 가지고 올라갈 필요는 없어.”
한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보다도 그는 은혜가 여인의 시체는 ‘신선 언니’라고 부르면서 자신은 아저씨라고 부른다는 게 조금 의아했다. 그리고 만약 주일이 대나성(大羅星)에서 돌아와 이런 광경을 보게 된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그럼 언니는 배가 고프지 않아? 난 맨날 배고픈데…”
눈을 휘둥그레 뜬 은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죽을 가져다 두면 언니가 나중에 먹을 거야. 아저씨는 내 일에 신경 꺼.”
한제는 쓰게 웃으며 뭔가 말하려다가 순간 안색이 변하더니 먼 곳을 내다보며 말했다.
“여야, 탑 안으로 들어가.”
“응, 또 나쁜 사람이 왔구나. 정말 성가시다니까.”
은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뒤 죽 그릇을 들고 다시 보탑 안으로 들어갔다.
1년 전부터 다른 나라에서 천우에게 도전한다는 명목 하에 수련자들을 보내오고 있었다.
처음에 한제는 그들에게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은 보탑의 결계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분수를 알지 못하고 방자하게 굴었다. 사방의 산마루를 점거한 채 공공연히 안을 훔쳐보며 법보를 휘두르곤 했다.
언젠가 한 번 깊은 밤, 잠에 들었던 은혜가 그 소리에 놀라 깨서는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한제는 곧바로 몸을 날려 밖으로 나섰다.
그가 돌아왔을 때 산골짜기 밖에는 피가 낭자한 사람의 머리 일곱 개가 나뒹굴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밖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도전을 해오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고 그중에는 이름난 화신기 수련자도 더러 섞여 있었다.
일단 살육을 저지른 뒤로 한제는 찾아오는 사람들을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았다. 그 기세에 찾아오는 사람의 수가 줄었지만 여전히 이따금 찾아오는 자가 있었다.
“천우, 설역국의 요범이 깃털 부채를 가지러 왔다.”
지극히 냉랭한 목소리가 산골짜기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설역국이라⋯⋯.”
한제는 침착한 눈빛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계 밖에는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바다처럼 푸른 옷을 입은 청년의 용모는 평범했으나, 그에게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두 눈은 밝았고 피부는 얼음처럼 빛났다. 그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사방 1천 척 안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한기 어린 눈으로 한제가 나오는 것을 보던 그는 포권을 취한 후 말했다.
“천우, 깃털 부채의 남은 부분을 내놓아라!”
한제는 청년을 훑어보았다. 청년의 수준은 화신기 중기였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두 개의 깃털이 달린 부채를 꺼내 내던졌다. 부채는 곧장 긴 무지개가 되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옆쪽의 산골짜기 절벽을 때렸다. 드러난 부분이 살짝 흔들렸다.
청년은 몸을 훌쩍 날리더니 그 옆에 있는 절벽을 향해 내달렸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두 개의 방울을 꺼내들더니 흔들었다. 낭랑한 방울 소리가 담긴 음파가 사방으로 확산됐다.
요범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결인을 한 오른손으로 옆을 가리켰다. 하얀 빛이 번득이면서 예리한 얼음 칼날들이 생겨났다. 그 얼음 칼날들은 요범의 손짓에 쉭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라 한제에게 날아들었다.
한제는 피하기는커녕 앞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다시 한 번 방울을 흔들자 두 개의 방울은 허공에서 점점 더 커지더니 딸랑딸랑 소리를 퍼뜨렸다.
순간, 허공을 가르던 얼음 칼날들에 균열이 나타나더니 한제에게 가까워지기도 전에 펑펑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심지어 산골짜기 절벽에도 균열이 일었다.
일찍이 천우라는 명성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 온 요범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온 목적은 깃털 부채가 아니라 탐사였다.
땅에 내려선 그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서늘한 눈빛으로 맹렬히 달려들었다. 순간, 그의 몸에서 끊임없이 번득이던 하얀 빛줄기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거대한 허상을 이루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노인의 허상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한제는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렸고 그의 손으로부터 한 줄기 영력이 쏘아져나가며 방울에 찍혔다. 그러자 두 방울은 빠르게 회전하면서 끊임없이 서로 부딪쳤다.
이는 한제가 이 법보를 연구하면서 알아낸 또 하나의 용법으로 회전하며 서로 부딪치던 방울의 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 격렬한 소리에 요범의 몸은 수십 척 뒤로 물러났다. 겨우 몸을 안정시킨 요범은 방울을 주시하며 외쳤다.
“죽여라!”
노인의 허상은 곧장 팔을 들어 한제를 가리켰다. 그 손짓 한 번에 그의 허상은 곧장 수축하여 한 줄기 기운이 되더니 한제를 찌르려 했다.
허상의 기운은 번개처럼 빠르게 질주했다.
한제는 나이법을 이용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이미 상공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그 허상의 기운은 민첩하게 방향을 틀어 우뚝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