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75
자심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한제는 더욱 싸늘하게 내뱉었다.
“너는 끼어들지 마라!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주제에…”
자심은 영변기 중기의 기운을 미친 듯이 확산시키며 한제를 노려보았다.
“이한제, 네가 나를 공간의 균열 안으로 보내 죽을 뻔했던 일을 나는 잊지 않았다. 십억혼존번도 다 망가진 데다가 영변기 초기에 불과한 너를 죽이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심의 협박은 매서웠으나, 한제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나는 주작이나 한번 되어볼까?”
그 말에 흠칫 놀란 자심은 한제를 한 번 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만약 한제가 진짜 주작이 된다면 주작인으로 자신을 죽이고도 남을 것이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한제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건풍의 수준을 차지하게 된 지금도 그 두려움은 여전했다.
묵지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대우, 주작이 되고 싶은가?”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사자님, 제가 주작이 된다 해도 그 봉호는 저자에게 주십시오!”
한제는 무태를 가리켰다.
그 말에 무태는 감격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묵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 주작이라는 봉호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누구에게 주건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저 한제의 반응이 흥미로울 뿐이었다.
묵지는 이내 오른손으로 무태를 가리켰다. 순간 심장 모양의 결정이 나타나 무태를 향해 날아들더니 그의 미간을 통해 스며들어갔다.
“이곳에서 1년 동안 폐관수련을 하여 주작인을 깨닫도록 해라. 이제부터 너는 15대 주작이다! 허나 수성의 결정에 걸려 있는 봉인은 따로 풀지 않도록 하겠다!”
묵지는 말을 마친 뒤 소매를 휘둘렀다. 순간 운작과 자심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무태는 아래쪽으로 가라앉아 바닷속으로 빠져들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주작묘
이제 남은 것은 묵지와 한제뿐이었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한제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대우, 어쩌면 나중에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군. 나는 주작성을 떠나 수련 연맹에 보고를 하러 가야겠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보게 되겠지.”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저었다.
“사자님, 저는 아직 주작묘 안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묵지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손을 펼쳤다. 그러자 한 줄기 붉은 각인이 허공에 나타났다.
“이 각인을 기억해두었다가 이곳을 떠나고 싶을 때 선력으로 만들어내게. 그럼 이곳에서 나올 수 있을 거야.”
묵지는 다시 포권을 하며 감사를 표하는 한제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한제뿐이었다.
“나와 모완의 명혼은 모두 손에 넣었고 주작성의 다음 주작은 무태가 되었다. 그는 은혜를 잊는 자가 아니니 내가 떠난다 해도 나와 관련된 이들을 잘 살펴줄 거야. 그러니 나도 안심하고 떠날 수 있지.”
그가 무태에게 다음 주작의 봉호를 넘겨준 것은 앞으로 뒤탈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몸을 날려 먼 곳으로 질주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세 갈래의 검은색 빛이 멀리서부터 달려오더니 한제 앞에서 기린 마수의 잔혼이 포함된 세 개의 주요 혼백으로 변했다. 한제는 그 혼백을 십억존혼번에 거두어들였다.
“류미에게도 수가 있었던 모양이군. 하나의 주요 혼백을 소멸시키고 달아나다니⋯⋯ 이미 주작묘를 떠났겠지. 허나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주겠다. 류미,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건만 너는 몇 번이고 나를 건드렸다. 게다가 건풍과 연합하여 나를 사지로 몰아넣기까지 했으니 더는 가만둘 수 없어!”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다짐했다.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을 정리하던 한제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주작묘 안에 들어와 너무 큰 손실을 입은 것이다.
“십억존혼번에도 세 개의 주요 혼백만 남았을 뿐이라 혼번의 위력이 대폭 감소했다. 빨리 위력을 회복시켜야겠어. 그나저나 수성의 결정은 역시 대단하군. 허나 극의 경계의 진화와 관련 있다는 말은 거짓이겠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허이국을 이용해 그 굽은 칼을 찾는 것이다.”
한제는 줄곧 허이국을 감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단번에 허이국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 ★ ★
주작묘에서의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선유족은 운작이 주작묘에서 나온 뒤 물러나 주작성 서북쪽의 대륙 하나만을 차지한 채 함부로 수련자들과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
이번 전쟁으로 죽은 주작성의 수련자가 많아 각 종파들은 상당히 쇠잔해졌고 이에 그들은 대대적으로 제자들을 모집하려 나섰다.
그중에는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난 이도 있어, 각 문파에서는 이들을 보물처럼 여겼다. 하지만 개중에는 이전까지라면 수련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았을 일반인까지도 제자로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주작성에 문정기 수준의 수련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지백문의 선조인 그는 자신이 아니라 화신기 수준 수련자에 불과한 무태가 새로운 주작이 됐다는 사실에 분이 치밀었으나 수련 연맹의 사자가 직접 정한 것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온종일 폐관수련에만 매진했다.
1년 뒤, 무태가 주작묘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수준은 화신기 후기의 절정에 이르러 있을 뿐이었지만 주작인을 가진 덕분에 영변기 수련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역대 주작 중 수준이 가장 낮은 이였다.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무태는 주작묘에서 나오자 곧장 주작산으로 들어가 폐관수련을 진행했다.
주작성은 다시 평화를 찾아가고 있었다.
주작성 밖의 드넓은 우주. 류미가 자금색(紫金色) 빛을 타고 질주했다.
“이한제⋯⋯.”
그녀는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스승님이 존혼번의 네 번째 혼백을 몰래 내게 주시지 않았다면 난 주작묘에서 목숨을 잃었겠지!”
류미의 이마에서 자금색 빛이 번쩍 하더니 가늘고 긴 바늘이 나타났다.
“이제 천환무정도를 넘어 만환천마도(萬幻天魔道)를 수련할 테니, 다시 만나는 날 두고보자.”
류미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우주 가운데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데 이 드넓은 우주 공간을 또 다른 여인 하나가 덤덤한 표정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얼굴에 보라색 면사를 두른 여인, 자심이었다.
★ ★ ★
주작성 초나라, 운천종.
이전에 모완이 기거했던 누각 안에는 지금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하얀 옷에 검은 머리를 가볍게 묶어 뒤로 늘어뜨린 그의 외모는 평범했으나 기이한 기질이 느껴져 한 번 보면 평생 잊기 어려울 듯했다. 차분한 두 눈은 아이처럼 흑과 백의 구분이 명확했으나, 그 깊은 곳에는 상실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 공터에서는 호랑이 한 마리가 나른하게 엎드려 햇빛을 쬐고 있었다. 그러다가 때때로 두 눈을 뜨고 낮게 그르렁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호랑이 옆쪽에 자리한 나무 그늘에서는 한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티 없이 맑고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좌선한 채 호흡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온 콧김은 정수리 위로 모여들어 흩어지지 않았다.
누각에 앉아 이를 지켜보는 사내는 바로 한제였다.
1년 전 주작묘에서 나온 그는 초나라로 돌아와 꼬박 1년째 폐관수련을 이어오고 있었다.
한제는 마침내 주작묘에서 입었던 내상을 완벽하게 회복했다. 더불어 아직 영변기 중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수준도 약간 정진시킬 수 있었다.
7일 전, 무태가 그에게 초대장을 보내왔다. 주작의 봉호를 받는 축하연에 초청하는 초대장이었지만 한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허나 무태는 한제가 거절할 것을 이미 예상했기에 재차 권하지는 않았다. 대신 한제에게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평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한제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저물대를 두드려 선검을 꺼내 들었다. 이어 한 자루의 굽은 칼도 자연스레 딸려 나와 그 선검 주위를 맴돌았다. 상당히 기뻐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주인님, 이 넷째 녀석은 벌써 제가 잘 길들여 놓았습니다. 넷째야, 주인님을 뵈어야지!”
선검으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오더니 뒤이어 검은 안개가 솟아올랐고 이내 허이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척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굽은 칼은 한 번 바르르 떨리더니 짙은 남색 연기를 뿜어냈다. 그 연기는 머지않아 한 동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는데 다만 좀처럼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녀석은 한제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신식을 통해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봤다!”
이 모습을 본 한제는 마음 깊이 허이국에게 감탄했다.
주작묘에서 묵지가 떠난 후 찾아갔을 때, 허이국은 어떤 수단을 썼는지 몰라도 이 굽은 칼과 무척 가까워져 있었다. 심지어 허이국이 떠나려 하자 얼른 따라나섰다. 정말이지 상상을 뛰어넘는 광경이었다.
한제는 아직 그 굽을 칼을 조종할 수도 신식도 남길 수도 없었으나 허이국이 위험에 처하기라도 하면 그 굽은 칼은 당장 달려 나왔다.
덕분에 허이국의 어깨에는 날로 힘이 들어갔다. 만약 그가 마음속 깊이 한제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다면 또는 자신의 생사가 한제의 손에 달려 있지 않았다면 그는 굽은 칼만 믿고 배반했을지도 모른다.
한제는 자신이 저 굽은 칼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굽은 칼이 허이국이라도 잘 따른다는 것이, 그래서 간접적으로나마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도대체 어떤 존재의 명혼이 이 칼을 이렇게 강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던 한제는 지난 1년 동안 여러 번 연구해보았다. 그러나 끝내 알아낸 바가 전혀 없었고 이제 그 부분에 대한 궁금증은 접은 상태였다.
“주인님, 넷째 데리고 산책 좀 다녀오겠습니다!”
허이국은 한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선검을 말아 쥔 채 긴 잔영을 남기며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굽은 칼이 웅웅 소리를 내며 그 뒤를 바짝 따랐고 둘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져버렸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제는 저물대를 쓰다듬었다.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저물대에 있는 법보 중 다시 제련해야 하는 것들도 꽤 많았다. 천운성으로 가는 길 역시 까마득했고 그 와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그에 대한 준비도 필요했다.
한제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허공에서 괄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제야, 네가 조사를 부탁했던 일의 실마리를 찾았다. 초나라 봉황성(鳳凰城) 밖의 상원이라는 촌락이다. 이제 잡다한 일로 더는 날 귀찮게 하지 마라. 나는 친왕 노릇을 하느라 바쁘단 말이다. 아, 떠날 때는 잊지 말고 내게 알리도록 해라. 함께 떠나야지!”
사도환의 목소리는 곧 사라졌다.
한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