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44
한제는 그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유족(仙遺族)!’
한제는 체내의 원력을 가동하며 결인을 그린 손으로 허공을 때렸다. 원력이 흘러나와 허공에 녹아들면서 파동을 이루더니 어지럽게 뒤흔들리면서 공간이 왜곡됐다. 그러자 순간이동을 하던 선유족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사내는 멍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다가 퍼뜩 놀라 도망치려 했다. 허나 한제가 한 걸음 다가서며 바라보자 사내는 덜덜 떨면서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멈춰라!”
한제는 짧게 외치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사내의 몸은 우뚝 멈추더니 이내 한제 앞으로 끌려왔다.
한제는 상대에게 말을 걸려 했다. 한데 그 순간, 그는 표정이 변하더니 뒤를 돌아봤다. 대지에서 각기 다른 색을 띤 수백 개의 빛이 튀어나와 엄청난 속도로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빛들은 흩어지더니 갈포로 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모두 남성으로 대부분은 중년이었으며, 잔뜩 경계심을 품고 한제를 주시했다.
옷에 가려지지 않은 그들의 얼굴과 팔다리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특히 미간에서는 허상의 식물이 번득이고 있었다. 다만 식물의 수가 너무나 많고 잎이 다 펼쳐지지 않은 상태라 이파리의 정확한 개수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들 사이에서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백발에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노인은 한 걸음 다가와 경계심어린 얼굴로 한제의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상선(上仙)께서 이곳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노인은 매우 공손했고 그의 시선은 한제의 손등에 새겨진 마수의 뼈 모양 도안에 박혀 있었다.
한제는 침착해 보였으나 마음속으로는 다소 충격을 받은 상황이었다. 일반인도 아닌 선유족이 상선이라 칭했다니,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장품각에 가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선선족(仙選族)
“내 수준을 알아보는 겐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의 오른손에 꽂힌 그의 눈에 흥분의 빛이 담겼다.
“8품 상선이시라는 것을 소인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한제는 조용히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상선이라는 칭호와 고풍스런 말투… 한제의 눈에 노인은 무척 기이했다. 그러다가 불쑥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설마… 이들은 선계가 이미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이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만 살아왔다는 뜻!’
생각을 정리한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선인이 이곳에 오지 않은지 얼마나 됐지?”
안색이 살짝 어두워진 노인이 공손하게 말했다.
“소요 선왕께서 마지막 유언을 보내주신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요. 구체적으로 얼마나 지났는지는, 소인으로서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소요⋯⋯.”
한제는 그제야 어째서 상대가 마수의 뼈 문양을 그토록 주목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뭔지 알아보겠나?”
한제가 마수의 뼈 문양을 내보이며 묻자 노인이 공손하게 답했다.
“소요 선왕의 법보 자모도고(子母道枯)임을 소인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상선께서 소요 선왕의 법보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분명 그분과 가까운 사이라는 의미겠지요. 현음정(玄陰鼎)을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한제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옮겨 뒤쪽의 대륙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인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소인이 무례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영선과(靈仙果)가 일찍이 무르익었으니 상선께 대접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제는 말없이 노인의 안내에 따랐고 나머지 선유족 사람들은 경외심이 어린 눈으로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들을 따라왔다.
한제는 붙잡고 있던 사내를 풀어주었다. 자유를 얻은 사내의 눈에는 한층 짙은 두려움이 어렸다.
노인의 안내 아래 도착한 곳은 온통 녹색 빛으로 반짝이는 평원이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대했고 맑은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긋한 풀 내음에 심신이 안정됐다.
이 평원의 중심에는 많은 건물이 들쭉날쭉 모여 있었다. 망가지거나 무너진 건물은 없었지만 아주 오래 전에 지어진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한데 건물들로부터 1만 척 안에 들어선 한제의 눈빛이 변했고 그는 잠시 멈추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았다.
보기에는 이전까지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한제는 무언가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본래 금제에 일가견이 있던 데다가 이원의 지도까지 받았던 터라 그는 금제와 몇몇 선금들에 대해서도 훤했다. 덕분에 한제는 이곳의 풀과 건물들이 거대한 금제를 이루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노인은 한제의 눈빛을 눈치 챈 듯 설명했다.
“상선님, 이 진은 선왕께서 당시 직접 배치하신 것입니다. 우리 부족이 안개 마수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 보호용 금제이지요.”
한제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지만 사실 그 안개 마수에 대해 상당한 흥미가 생겼다.
‘소자요, 선유족, 현음정⋯⋯. 여기는 대체 어디지?’
그때, 한 차례 환호성이 한제의 상념을 깼다.
저 멀리 여러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날아올랐다. 그중에는 여인도 있고 사내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옷차림은 소박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아래 건물들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큰 눈으로 한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른 이들은 한제가 다가오자 뒤로 물러났다. 그들 대부분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한제를 안내해온 노인은 근엄한 얼굴로 부족원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는데 처음 들어보는 언어였다.
부족원들은 말없이 서로 떨어졌고 노인은 얼른 한제에게 다가왔다.
“안으로 드시지요. 여기가 저희가 사는 곳입니다.”
말을 마친 노인은 가장 높은 건물에 착지하더니 허리를 살짝 숙인 채 한쪽에 섰다.
노인을 따라 땅에 내려선 한제는 신식을 펼쳐 사방을 훑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나 한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기는 하나 들어갈 필요는 없겠군.”
노인은 흠칫 놀라더니 씁쓸한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 떠 있던 선유족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사방을 빙 두르더니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한제와 노인을 주시했다.
“상선님⋯⋯.”
노인이 무언가 말하려 하던 순간, 한제가 불쑥 말을 잘랐다.
“저들은 왜 나를 이토록 두려워하는 거지?”
노인은 씁쓸한 얼굴로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선계의 사람이 이곳에 온 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선왕께서는 저희를 버리신 게지요.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소인조차도 선인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우리 선선족(仙選族)의 고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면 소인도 상선님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다들 두려워하는 게지요.”
한제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노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저희 부족은 소요 선왕의 명에 따라 대대로 현음정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3만 년 전부터 현음정은 백 년에 한 번씩 열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열릴 때마다 그 안에서는 검은 안개가 분출됐습니다. 그 검은 안개는 마수가 됐고 그중 가장 강한 녀석은 인간의 모습으로도 변하지요.”
다시 안개 마수 이야기가 나오자 흥미가 생긴 한제는 귀를 기울였다.
“지금껏 그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한 안개 마수의 손에 목숨을 잃은 부족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저희 부족원들 중에는 상선님을 보고 마수가 변신한 존재는 아닌지 의심하는 자도 있을 겁니다.”
노인은 길게 탄식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한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노인의 말에는 신빙성이 있었다.
“현음정은 어디에 있지?”
한제는 주제를 돌렸고 그러자 노인이 다시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저희 부족의 금지에 있습니다. 지금 가서 보시겠습니까?”
한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현음정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보고 싶었다.
한데 그때, 부족원 중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선조님, 절대 그자에게 현음정을 넘겨서는 안 됩니다!”
천둥처럼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 떠 있던 무리가 양옆으로 갈라서면서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키가 10척에 달하는 사내가 통로를 따라 허공을 성큼성큼 걸어 다가왔다.
웃옷을 입지 않은 사내의 상반신은 물론 목과 얼굴 바로 아래까지도 검은색 문양이 가득했다. 또한, 사내의 미간에서는 잎이 열세 개 달린 식물이 기이하게 꿈틀거려 그를 더욱 요사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만들었다.
‘십삼엽(十三葉)!’
한제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가 주작성에서 봤던 선유족 구성원 중 가장 수준 높은 자는 십일엽(十一葉) 일조(一祖)였다.
‘양의의 수준에 상당할 터⋯⋯.’
그 사이, 사내는 몇 걸음 더 다가왔다. 그가 나타나자 선선족 부족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는데 그들의 표정에는 경외심이 가득했다.
“타산, 상선께 그 무슨 불경한 태도냐!”
정작 한제는 미동도 없었으나, 그의 곁에 있던 노인이 호통을 쳤다.
타산이라 불린 사내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냉소했다.
“선조님, 어르신께서도 늙으셨군요. 이자를 선인이라고 생각하다니, 정신이 나간 겁니까? 애초에 선인은 없습니다! 고서도 다 거짓이고요! 그게 아니라면 왜 지난 수만 년간 우리 부족에 단 한 명의 선인도 오지 않았겠습니까?”
“닥쳐라! 우리 선선족은 오래전부터 선인들의 사자였어! 선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족이 어찌 살아갈 수 있었겠느냐! 게다가 당시 선왕께서 남기신 유언도 있는데 그것도 믿지 못한다는 것이냐?”
노인이 분노한 얼굴로 외쳤다.
“믿지 못하겠느냐고 하셨습니까? 선왕이라고 하는 것은 강력한 수련자가 남긴 신식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걸 믿으라고요? 저는 수만 년 전부터 남아 있던 신식보다는 제 힘을 더 믿습니다!”
타산은 오른손을 꽉 쥐며 강력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를 본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손가락으로 타산을 가리켰다.
“이 정신 나간 녀석! 네가 감히⋯⋯.”
“정신이 나갔다고요? 우리 부족은 지하 마수의 체내에서 까마득히 오랫동안 소위 선왕이라는 자의 유언에 따라 현음정을 지켜왔습니다. 한데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현음정이 불러온 안개 마수가 우리 부족원들을 죽이고 있는 동안 선인은 어디 있었답니까? 저자가 정말 선인이라면 이 타산은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
절규와도 같은 말을 내뱉은 타산은 한제를 노려보며 한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더니 순식간에 한제 앞에 이르러 주먹을 휘둘렀다.
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