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53
왕족의 법보
잠시 후 한제는 시선을 돌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신의 기운을 풍기고 있는 망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벌려 알 수 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1천 척에 달하는 거구의 몸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망월의 포효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고신의 목소리로 터져 나온 포효는 하늘을 뒤흔들 법했고 이 허무의 공간 역시 고신의 포효를 감당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음파의 폭발을 일으켰고 그 여파가 사방에 미쳤다. 이 포효는 고신의 언어로 터져 나온 것으로 도전을 뜻했다.
유년기에서 성년이 될 때 다른 고신족 구성원에게 도전하는 것이 고신족의 오래된 풍습이었다. 한제는 이를 서사의 기억을 통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고신이 3성급에서 4성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성년이 된 고신의 기운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4성급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4성급에 오르는 것은 곧 이 고신이 성년이 될 자격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자격은 도전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한제의 외침은 망월의 체내에 있는 고신에게 자신의 도전을 알리는 것이었다.
한제의 포효가 울려 퍼진 순간, 망월의 체내에서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망월의 커다란 입이 벌어졌다. 그 안에서 수많은 촉수들이 쑥 뻗어 나왔는데 그것들은 한 사람을 옭아매고 있었다.
보통 사람 크기인 그의 미간에서는 다섯 개의 흐릿한 반점이 회전하고 있었으며, 촉수에 잔뜩 얽힌 그는 한제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의 동족아, 네 도전을 받아들이마!”
이 5성급 고신이 그렇게 말한 순간, 그를 옭아매고 있던 촉수들이 하나씩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고신은 세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첫 번째 걸음을 내딛은 순간부터 그의 몸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여 키가 3백 척에 달했고 굉장히 짙은 기운을 사방으로 풍겼다.
두 번째 걸음을 내딛었을 때는 1천 척 크기의 거인이 됐으며, 노련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드러냈다.
그리고 세 번째 걸음을 내딛었을 때, 그야말로 세상을 집어삼킬 듯 3천 척을 훌쩍 넘어 마치 천신(天神)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일목자는 눈앞의 광경에 심신이 바르르 떨렸다.
‘허목 저자는 고신이란 말인가?’
가문의 대장로가 파견을 명하기 전, 그는 망월에 대해 충분히 조사하고 여러 준비를 했다. 그렇기에 더없이 놀란 상태에서도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5성급 고신을 내보낸 망월이 다시 입을 닫으려 하자 일목자는 곧장 그 안으로 달려들었다. 수준이 대폭 하락한 상태였음에도 그는 여전히 빨랐고 순식간에 망월의 입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무동선의 표정은 복잡했다. 일찍이 연맹성역의 서적을 본 적이 있는 그는 망월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 체내에 월화(月華)라 불리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고서에서는 망월의 월화로 차공열(次空涅)급 법보를 하나 제련해낼 수 있다고 했다. 저 망월의 월화를 얻어 법보로 제련한다면 수련연맹 안에서 현보를 대체하여 그 지위에 오를 수 있겠지!’
생각을 정리한 그 역시 망월의 입이 닫히기 직전 그 안으로 들어섰다.
오직 청수만이 망월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굳은 얼굴로 말없이 한제와 거대한 몸집의 5성급 고신을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라진이다!”
고신이 두 눈을 서늘하게 번득이며 주먹으로 전방을 후려쳤다.
콰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손자국이 한제에게 달려들었고 뒤따라 라진의 거대한 주먹도 다가오고 있었다.
한제의 얼굴도 차갑게 굳었다. 그 손자국은 우(雨)의 선계에서 봤던 것과 비슷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혀 달랐다.
한제의 눈빛이 변한 순간, 그의 미간에서 네 개의 반점이 회전했다. 이어서 그는 오른손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고신의 언어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4성급 고신에 이르면 고신의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제는 바로 이날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순식간에 한제의 전방에 거대한 회오리가 몰아쳤다.
“고신의 병기!”
한제의 낮은 외침에 그 회오리에는 보라색 전광이 번쩍이며 흐르더니 그 안에서 긴 창이 튀어나왔다. 그 창은 보라색 전광으로 이루어진 허상이었다.
한제가 곧장 그 창을 내던지자 라진의 손자국과 충돌했다.
콰콰쾅!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손자국은 두 동강으로 갈라져 버렸다.
허나 그 손자국을 뒤따라오던 라진의 손이 그 창을 잡더니 힘껏 움켜쥐었고 그것만으로도 창은 그대로 으스러져 버렸다.
한제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라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강력한 기세를 발휘할 수 있었다.
한제를 보는 라진의 눈빛은 다소 복잡했다. 그가 반점을 하나 소모시키면서까지 극현천을 꼭두각시로 만든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덕분에 망월의 몸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말로 다하기 어려운 고충이 따랐고 심지어 자신이 망월인지 고신인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수천 년 동안 그와 망월은 동화되어 있었다. 그의 생각은 망월의 간섭을 받기 일쑤였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제 더 이상 고신이 아니라 망월의 꼭두각시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줄곧 한제에게 유산을 넘겨줄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삼켜버릴 것인지 고민해왔다. 그러던 중 극현천을 발견하고는 반점 하나를 넘겼다. 어쩌면 극현천을 통해 한제에게 반점 하나를 넘겨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라진이 주먹을 마주 휘둘렀다.
콰쾅!
충돌하는 순간, 한제는 팔이 저릿해짐을 느끼며 몇 걸음 물러났다. 라진 역시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상태였고 미간의 다섯 반점은 좀 더 흐릿해졌다.
한제가 라진에게 도전한 것은 상대가 유년기의 고신이 아닌 진정한 성년의 고신이라 해도 지금은 매우 허약해진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간의 반점이 흐릿하다는 것도 그 증거였다.
반면 자신은 비록 4성급에 불과할지언정 미간의 반점은 실체화된 것처럼 또렷하고 기이한 빛을 발했다.
게다가 그는 왕족이었다. 왕족은 고신 사이에서도 진정한 왕과 같은 지위를 누렸으며, 왕족 고유의 신통력과 법보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한제는 물러나던 중 뒤로 발을 뻗고 튀어올라 곧장 라진에게로 달려들었다. 두 고신은 끊임없이 상대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콰르릉! 쾅!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거대한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초반에는 한제가 약간 밀리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기세가 올랐다. 전투를 통해 한제는 점차 4성급 고신의 힘에 익숙해져갔고 덕분에 교전은 더욱 격렬해졌다.
쾅!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두 고신은 뒤로 밀려났고 한제는 그러는 와중에 한 손을 들어 올리며 고신의 언어로 뭔가를 외웠다. 순간 그의 뒤에서 허상의 인영이 하나 나타났다. 높이가 10만 척에 달하는 고신의 허상이었다.
“크아아아아!”
하늘을 떠받칠 듯 선 그 고신의 허상이 포효하자 라진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 역시 손을 들어 올렸고 그러자 그의 뒤에도 허상이 나타났다.
높이가 10만 척을 훌쩍 넘는 진정한 거인이었으나 이 거인의 몸은 매우 부어 있어서 고신이라기보다는 망월에 더 가까워보였다. 허나 놀랍게도 그 거인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 강력한 기세에 보통의 수련자라면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상할 것 같았다.
“캬아아아!”
갑옷의 거인이 고함을 내지르는 사이 한제와 라진 사이의 거리는 다시 좁혀졌다. 그리고 한제와 라진 그리고 각자의 뒤에서 허상으로 나타난 거인들 사이에서도 교전이 벌어졌다.
한제는 한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며 머릿속으로 당시 고신의 몸 안에서 보았던 탁삼의 법보, 고신 서사의 영혼으로 연결된 법보인 멸신모(滅神矛)를 떠올리면서 고신의 언어로 주문을 외웠다. 4성급 고신의 힘으로는 멸신모의 본체는 소환할 수 없었지만 그 허상이라면 가능할 터였다.
허공을 움켜쥔 한제의 왼손에 순간 대량의 붉은 안개가 모이기 시작했다. 용솟음치던 붉은 안개는 한제의 손바닥에 빠르게 응집되더니 하나의 창이 됐다.
길이가 1천 척, 굵기가 10척에 달하는 이 창은 붉은빛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고신족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멸신모였다.
멸신모가 모습을 드러내자 허공은 곧장 왜곡되기 시작했고 가볍게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허공에는 그물과 같은 무언가가 나타났다.
이 그물과 같은 것은 바로 이 허무의 공간에서 원신을 압박하는 진이었다. 이 진은 형태도 없고 드러나지도 않지만 멸신모의 위엄 아래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멸신모는 오직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신의 법보였다. 고신의 모든 왕족은 성년이 될 때 영원히 사용할 법보를 하나씩 갖게 된다. 이 법보는 대대로 물려줄 수 있고 오직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멸신모를 본 라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일찍이 그는 한제가 왕족의 유산을 얻고 자체적인 수련을 해온 고신족의 후손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멸신모를 본 순간, 그는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한제가 어디에서 그 유산을 얻은 것인지도 알게 됐다.
‘서사 그자도 죽었을 줄이야⋯⋯.’
라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어느새 그의 눈빛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서사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이라니.… 네가 그 멸신모의 위력을 어느 정도나 발휘할 수 있는지 봐야겠구나! 하하핫!”
라진은 마음속의 매듭을 풀어낸 듯 길게 웃으며 한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그의 오른팔 뼈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하나하나의 뼈가 가시처럼 그의 피부 밖으로 돌출됐다.
머지않아 그의 오른팔은 뼈가 잔뜩 돋아난 형태가 됐다. 그 뼈들은 돌출된 부분이 상당히 길어, 라진의 팔은 그 자체로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무기가 됐다.
허상의 멸신모를 바르쥔 채 전의를 불태우던 한제는 당시의 서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난 고신 이한제다!”
한 걸음 내딛은 한제는 멸신모를 매섭게 휘둘렀다.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물 형태 진이 흐릿해지며 허무의 공간을 뒤덮었다.
라진 역시 한제에게 달려들며 오른팔을 휘둘러 멸신모에 대항했다.
쾅!
둘의 법보가 충돌한 순간, 펑, 펑 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또한 이 허무의 공간에서는 두 사람의 교전에 따라 그물 형태의 진이 계속해서 드러났다.
한제는 하늘을 뒤덮을 듯 강렬한 전의를 불태우며 멸신모를 힘껏 내던졌다. 그리고는 두 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마름모꼴을 이룬 뒤 낮게 외쳤다.
“멸신인(滅神印)!”
멸신인은 고신족의 신통력 중 하나로 오직 왕족만 사용할 수 있었다.
멸신모가 라진을 향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감과 동시에 멸신인이 발현됐다.
이를 본 라진은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크하하하! 좋구나!”
이어서 그가 오른손을 휘둘러 날아들던 멸신모를 막자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뒤이어 달려든 멸신인은 허공에 상상을 초월하는 폭풍을 일으켰다.
그 폭풍이 퍼져나가면서 그물 형태의 진이 사방에서 드러났는데 번득이는 그 그물 형태의 진 아래쪽에서 두 갈래의 어슴푸레한 빛이 나타났다.
그 빛에서 풍기는 서늘하고 무정한 기운은 그물 형태의 진을 뚫고 스며들었다. 마치 바깥쪽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눈빛 같았다.
“망월⋯⋯ 고신⋯⋯.”
그 서늘한 빛이 드러난 순간, 고민에 잠겨 있던 청수의 표정이 돌연 급변하더니 어스름한 빛을 응시했다.
허나 이내 그 빛은 사라졌다. 마치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실 청수는 그 어스름한 빛을 보지는 못했다. 그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도록 충격을 느꼈을 뿐이다. 이는 아주 먼 옛날 그의 스승이었던 선제(仙帝) 백범 앞에서도 경험해본 적 없는 느낌이었다.
한데 잠재된 의식 속에서 그는 흐릿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런 모순된 감정이 드는 이유조차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