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92
이 순간, 타지아는 이미 청림에게 패한 셈이었다. 모든 별을 폭발시킴으로써 청림의 육신을 취할 자격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타지아는 죽더라도 눈앞에 있는 한제와 함께 죽을 작정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마족의 가장 강한 신통력 하나라도 사용해볼 셈이었다.
한제는 타지아가 최강의 신통술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좀 전까지는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기다렸다면 이제는 고족의 일원인 타지아를 존중하는 마음도 생겨났다.
분노에 찬 포효가 울려 퍼지던 그때, 타지아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 보통 사람의 크기로 줄어든 대신 거의 실체를 갖춘 존재가 됐다. 칠흑처럼 검은 몸, 머리 위로 솟은 뿔, 거기에 새빨간 눈까지. 타지아는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무서운 기운을 발산했다.
“자기(紫氣)!”
타지아의 낮은 외침과 함께 온몸의 검은 기운 중 절반이 급격하게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그의 몸 안팎을 맴돌던 그 기운은 타지아가 손가락을 교차시켜 마름모를 그린 순간 두 손을 타고 그 마름모 도안으로 뿜어져 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 보라색 마름모가 그의 두 손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겁(魔劫)!”
타지아의 포효와 함께 그의 미간에서 생겨난 회오리 안에서 마혼이 튀어나와 마름모 안으로 달려들었다. 순간 그 마름모 모양의 빛이 크게 번득였다.
“죽어라!”
타지아는 몸을 날리면서 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보라색 마름모가 번개처럼 한제를 향해 돌진했다.
그 마름모는 처음에는 손바닥 크기였으나 점점 더 커지더니 한제 앞에 도달했을 때에는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묵묵히
한제는 차분하게 두눈을 감고는 마겁의 힘을 느꼈다. 그 순간, 마겁이 사방을 뒤덮고 이 공간을 주위로부터 완벽하게 분리해내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그 마름모 모양이 빠르게 수축하면서 닿는 곳을 모두 무너뜨리며 점점 다가왔다.
“허나 안타깝게도⋯⋯ 자기가 짙지 않구나.”
한제는 안타까운 듯 혀를 차며 눈을 떴다. 그때 마겁과 그 사이의 거리는 3촌도 되지 않았다. 그 마름모는 잔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줄어들면서 모든 것을 무너뜨릴 기세였다.
한제는 마겁을 바라보며 가볍게 외쳤다.
“산붕(山崩)!”
그 순간, 거대한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오르더니 곧장 구름을 꿰뚫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두 번째, 세 번째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총 아홉 개의 거대한 산이 사방에 나타나 급속도로 수축하던 보라색 마름모를 저지했다. 보라색 마름모와 아홉 산봉우리의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자기마겁의 위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해 머지않아 산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제가 덤덤한 표정으로 짧게 외쳤다.
“붕괴!”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아홉 개의 산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콰르릉! 쾅!
산이 붕괴하면서 화산처럼 용암이 폭발했다. 그 용암은 마겁과 충돌하면서 엄청난 기세를 내뿜었고 이에 사방은 요란하게 뒤흔들렸다.
한제는 그 안에서 느릿하게 걸어 나와 멀지 않은 곳에서 넋이 나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마를 응시했다.
“이것은 네 힘이 아니다. 넌 그저 청림의 의식의 바다에서 청림이 준 힘을 대신 행한 것뿐이다! 만약 이곳이 의식의 바다가 아니었다면 네게 청림이 준 힘이 없었다면 난 널 개미 죽이듯 죽였을 것이다! 난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 포기할 수 없어!”
타지아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여기까지 내다본 청림의 계산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청림이 강자를 찾아 자신의 마혼을 소멸시키려 하는 대신 구원자를 의식의 바다로 끌어들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청림의 의식의 바다는 이미 대부분 고마에게 점령됐지만 아직 청림에게 속한 곳이었다. 다만 지금 있는 이곳은 고마에게 침식당한 상태라 자신을 공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청림은 한제의 혼백에 도를 전수했다. 즉, 청림은 한제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 셈이었다. 때문에 이곳은 한제의 마음대로 바뀔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고 어떤 규칙이든 모방해낼 수 있으며, 심지어 세 번째 단계의 힘을 가질 수도 있었다.
타지아는 이 모든 것이 일시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한제와 청림의 혼백은 같지 않다. 억지로 다른 이의 의식의 바다를 통제해봐야 오래갈 수는 없다. 게다가 이곳에서 빠져가게 되면 한제는 즉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었다.
허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 타지아는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임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청림, 네가 이겼다!”
타지아는 씁쓸하게 외쳤으나, 곧 매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허나 내게는 생명을 대가로 할 마지막 신통술이 남아 있다. 고마족의 가장 강력한 신통술이지. 이것을 발휘한 후라면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다!”
타지아는 비릿하게 웃으며 몸을 날리더니 두 손을 힘차게 뻗으면서 마기로 몸을 에워쌌다. 그리고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시마도(始魔道)!”
그 목소리와 함께 타지아의 몸이 무너져 내렸고 동시에 하늘은 줄기줄기 짙은 마기로 뒤덮이면서 눈 깜짝할 사이 어두워졌다.
그 칠흑처럼 어두운 하늘에 한 쌍의 음산한 눈이 나타나더니 하늘 곳곳에 여러 쌍의 똑같은 눈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모두 한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그 수많은 눈들을 마주 보았다.
“네 이름은 이한제!”
아주 오래된 것 같은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쌍쌍의 눈들은 그 눈빛이 점차 멍하게 변해갔다.
반면 한제의 두 눈은 한없이 맑았다.
“열다섯에 수련자의 길에 오른 지 1천 년이 넘었구나. 허나 네 명에는 살기(煞氣)가 있어. 수련자의 길에 오르면 반드시 가족을 해치게 되지. 네 부모는 물론 친척들도 죽었다. 남은 자는 매우 적고 그나마도 여태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짐에 따라 쌍쌍의 눈들은 점차 맑은 빛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영혼에 각인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었다.
한제는 몸을 살짝 떨었지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맑았다.
“네 부모는 너 때문에 죽었다! 네 혈족은 모두 너 때문에 죽었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하늘의 모든 눈들이 피처럼 붉어졌다. 심지어 그중 몇몇은 폭발해 핏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동시에 한제의 눈도 붉어졌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네 아내 역시 너 때문에 숨을 거두었고 네 아이도 너 때문에 죽었다. 네 곁에 있던 이들 중 남은 이는 없다!”
퍼펑!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하늘의 눈들은 계속해서 무너져 내리며 피를 흘렸다.
한제의 두 눈 또한 새빨개졌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 상태로 그는 몸을 덜덜 떨며 몇 걸음 물러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혼백인 상태라고 해도 그는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고통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이 고통은 마치 독약처럼 그의 심신을 파고들면서 모든 것을 손상시켰다.
“네게 은혜를 베푼 둔천도 주작성황도 숨을 거두었지. 주일마저도 너와 만난 뒤로 사랑하던 여인과의 관계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게 됐고 운선 부부 또한 너로 인해 스승을 구하기 힘들어졌지.”
거친 목소리는 느릿하게 울려 퍼졌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는 기이한 규칙을 품은 채 하나하나의 신통력처럼 한제를 공격했다. 한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 다 했나⋯⋯?”
한제는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평소였다면 누군가가 그런 소리를 한다 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을 그였지만 지금의 그는 어째서인지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찢기는 듯 아팠다.
“너⋯⋯.”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순간, 한제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표정은 침착했고 심지어 싸늘해 보이기까지 했다.
“말 다 했느냐고 물었다.”
그 덤덤한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배어 있지 않았다.
한제는 몸을 훌쩍 날리며 손을 휘둘렀다. 순간 하늘에 나타났던 수많은 눈들은 콰쾅 하고 무너져 내리며 피를 흘렸다. 그 피는 한제의 몸에도 떨어졌다.
“이 이한제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실수를 한 적은 있으나 도심을 따른 행동이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제는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는 서늘한 바람처럼 울려 퍼졌다.
“선술, 운성(隕星)!”
그가 낮게 외친 순간, 한 줄기 별이 하늘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이 별은 층층의 검은 안개를 관통하며 의식의 바다에 강림했다.
뒤이어 별빛들이 줄기줄기 검처럼 검은 바닷속에서 튀어나와 하늘로 솟아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 세상은 별빛으로 가득 찼다.
한제가 춤을 추듯 두 팔을 휘두르자 그 별빛들은 휘몰아치면서 일제히 하늘의 검은 안개를 향해 달려들어 콰쾅 하는 붕괴음과 함께 충돌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파문을 일으켰다. 이 파문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퍼펑!
한제의 몸 역시 그 파문에 무너져 내리면서 이오와 호연, 주일 그리고 청상으로 분리됐다. 청림 또한 분리되어 나왔는데 그의 두 눈에는 감탄이 담겨 있었다.
뒤이어 이 의식의 바다가 붕괴하면서 이들도 점점 사라져 버렸다.
★ ★ ★
우의 선계 안, 칠흑처럼 어두운 허무의 공간. 표류하고 있던 푸른빛의 대전에서는 사도환이 신중한 얼굴로 그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돌려 진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피어올랐다.
은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시선은 한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제의 몸이 바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느릿하게 눈을 떴다.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대전의 문 옆으로 다가가 그 너머의 허무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대전 너머의 허무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저 멀리서 먹먹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서 본다면 부서진 채 표류하는 온갖 부스러기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그저 묵묵히 이 허무의 공간을 영원히 표류할 뿐이었다.
진 안에 앉아 있던 청림이 두 눈을 떴다.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이전에는 선제였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저 한 명의 노회한 수련자처럼 느껴졌다. 중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데 그가 깨어난 순간 그의 몸에서는 짙은 썩은 내가 났다.
뒤따라 깨어난 청상은 자신의 오른팔에 난 상처를 보며 눈썹을 살짝 구겼다. 그리고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워낙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탓에 아직 이 육신에 적응이 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이오와 호연도 속속 눈을 떴다. 이오는 감격한 눈빛으로 얼른 자리에 엎드려 공손하게 청림에게 허리를 숙였다.
“스승님⋯⋯.”
호연 역시 긴장한 얼굴로 청림을 향해 돌아앉으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청림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 옛날 자신이 아꼈던 제자들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스승님!”
이오는 몸을 격하게 떨며 눈물을 흘렸다.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요령의 땅에 머물면서 스승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기대해왔다. 당시 선제 청림이 자신을 제자로 거두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