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11
눈을 번득인 한제는 곧장 떠나려다가 문득 기이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라 대륙 서쪽 가장자리 상공에 전광이 번득이면서 콰쾅 하는 우렁찬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검은 탑은 부드러운 빛을 발산하며 막라 대륙을 밝히고 있었다. 이 탑은 안개를 대륙 밖으로 조금이나마 밀어내는 동시에 외부 종파 수련자는 물론 운해성역 곳곳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흉수(凶獸)들로부터 보호 작용을 했다.
운해성역에서 마수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수련자들이 길들인 영수와 운해성역을 돌아다니며 수련자들과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흉수였다.
한데 지금 막라 대륙 서쪽에 드리운 검은 탑의 빛이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천둥과 빗소리마저 묻힐 만큼 거대한 소리가 막라 대륙 안에서 우렁차게 울리며 귀원종에까지 또렷하게 전달됐다.
뒤이어 길이가 1천 척에 달하는 새카만 올챙이 같은 영수가 무너져 내린 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번쩍이는 전광에 휩싸인 채 막라 대륙 안으로 조금씩 들어섰다. 이 영수뿐이었다면 막라 대륙의 보호막을 뚫지는 못했을 것이나 녀석의 등에는 포악해 보이는 노인이 서 있었고 그의 오른손에는 보라색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그 노인과 함께 선 보라색 옷의 청년은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귀원종은 이 몸의 것이다! 크하하하!”
콰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거대한 영수는 막라 대륙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노인은 대견해하는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청년의 웃음소리가 이어지는 와중에 검은색 영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돌진해 귀원종으로 다가왔다.
“자도종의 소종주께서 오셨는데 귀원종에서는 얼른 나와서 맞지 않고 무얼 하느냐?”
노인의 음산한 목소리가 막라 대륙 전체를 뒤덮었다. 이 대륙 유일한 종파인 귀원종에서도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노인이 보라색 바람이 맴도는 오른손을 휘둘러 일으킨 회오리가 거칠 것 없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쉬지 않고 내리던 비도 회오리가 부는 곳에서는 멈췄고 계속해서 내리치던 천둥번개도 그 회오리에 닿는 순간 흩어졌다. 멀리서 보면 꼭 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 무렵, 좌선을 하던 귀원종 제자들은 엄청난 압박이 서쪽에서 전해져오는 것을 느끼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귀원종 동원의 산맥 꼭대기, 네 명의 장로 중 중년 사내가 씁쓸한 얼굴로 두 눈을 번쩍 뜨더니 한 줄기 긴 빛이 되어 서쪽으로 돌진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시자마자 이렇게 방자하게 굴다니! 이 이향동, 지금껏 참았으나 죽더라도 떳떳할 수 있도록 맞붙어보겠다!”
서북쪽 산꼭대기에서도 한숨 소리가 들려오더니 두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악문 채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 역시 곧장 서쪽으로 몸을 날렸다. 귀원종의 생사가 코앞에 달린 순간, 그들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참지 않는다고 해도 뭘 어쩌겠는가? 그들이 감히 자도종의 소종주를 죽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곁에 있는 노인만 해도 귀원종 전체를 덜덜 떨게 만들 정도인데 말이다.
‘송오덕⋯⋯ 스승님께 덤볐다가 패배한 적이 있지. 스승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찾아오다니⋯⋯. 우리 귀원종은 정말로 여기까지란 말인가?’
남쪽 산맥 꼭대기의 붉은 누각 안에서는 여연비가 얼굴 가득 살기를 담은 채 한 줄기 붉은 빛을 그리며 서쪽으로 달려들었다.
“노적! 이 여연비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게 굴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귀원종의 네 장로 뒤로는 직계 제자들이 따랐다. 당혹과 분노, 굳건함이 뒤섞인 표정의 이 제자들 안에는 허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었지만 비바람을 맞으며 나아가는 동안 어째서인지 그녀의 머릿속에는 두 사람이 떠올랐다.
하나는 검은 머리에 비쩍 마른, 생김새는 평범하나 언제나 깊은 물처럼 고요하고 잔잔한 자였으며, 다른 한 명은 하얀 머리에 하얀 옷을 입은, 손짓 한 번으로 온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강한 자였다.
두 사람의 모습은 그녀의 머릿속을 빙빙 맴돌다 결국 하나로 합쳐졌다.
한편 사원 안에 서서 붉은 빛들이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한제는 만약 귀원종이 소멸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결국 미간을 팩 구기며 투덜댔다.
“정말 성가시군.”
그는 이내 소매를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고 순간 발아래에 파문이 일렁이더니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자목 구렁이는 한제가 사라진 쪽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상대가 이미 떠났으며 당분간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그제야 맘껏 포효했다.
막라 대륙의 밤이 지나고 하늘 끄트머리가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서쪽에서 휘몰아치는 보라색 바람 뒤로 검은색의 거대한 영수 위로는 한 노인이 오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곁에 있는 보라색 옷의 청년은 한층 음탕한 표정으로 흥분한 듯 말했다.
“송 숙부, 여연비에게는 중상을 입혀도 좋으나 죽여서는 안 돼. 며칠 가지고 놀면서 원기를 흡수한 다음 죽여도 늦지 않을 테니까.”
말을 마친 그가 입술을 핥았다.
그 순간, 대답을 하려던 노인은 흠칫 놀란 얼굴로 전방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파문이 나타났다. 흘러넘칠 듯 엄청난 힘을 품은 파문은 순간 확장됐고 이내 그 안에서 백발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이 냉랭한 백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발산한, 하늘을 뒤덮을 듯한 살기에 거대한 영수조차 움찔했다.
보라색 옷의 청년이 분노한 얼굴로 호통을 치려는 순간, 노인이 얼른 청년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진지한 얼굴로 외쳤다.
“난 자도종의 송오덕이라 하네. 미안하지만 내 체면을 봐서 조금 비켜줄 수 있겠나?”
노인의 말을 들은 청년은 흠칫 놀란 얼굴로 전방에 나타난 자를 살폈다.
“체면을 살릴 기회를 주지. 당장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막라에 발을 들이지 마라!”
뼈를 파고들 듯 냉랭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에 노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 낯선 사내의 수준을 파악할 수 없어 공손하게 대했으나 상대는 매우 거만하게 나왔다.
“방자한 말투로군. 귀원종의 선조라고 해도 우리 자도종 앞에서는⋯⋯.”
노인이 말을 다 맺기도 전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보라색 옷의 청년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한제는 말없이 서늘한 눈을 번득이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면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한 줄기 살육의 기운이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그 짙은 기운은 상상을 초월하는 한기를 품고 있어 빗방울들이 쩌적 소리와 함께 얼어붙어 버렸다.
그 순간, 검은색 영수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영성이 매우 높은 녀석은 순간 온 세상을 채운 살육의 기운에 두려움을 느끼고는 누가 명을 내리기도 전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청년 역시 얼굴에 창백해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낮게 호통 치듯 외쳤다.
“너⋯⋯.”
그러나 그가 뭔가를 제대로 외치기도 전에 노인이 손바닥으로 그를 후려쳐 검은 영수의 등 위에 태우더니 곧장 소매를 휘둘러 영수를 물러나게 했다.
“빨리 가십시오! 전 저자를 죽이고 합류하겠습니다!”
노인은 진중한 표정으로 영수를 후퇴시킨 뒤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노인의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던 보라색 옷의 청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영수의 등에 실린 채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한제는 오른손을 살짝 휘둘러 살육의 기운을 거칠게 일으켜서는 사방에서 노인을 향해 쏟아냈다.
노인은 눈동자가 바짝 졸아든 채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보라색 바람을 일으켰다. 살육의 기운과 보라색 바람이 충돌하자 콰쾅 하는 요란한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환우(喚雨)!”
한제가 왼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외친 순간, 반경 1천 척, 1만 척, 10만 척을 채운 빗물들은 그대로 멈추더니 그의 손을 따라 한 줄기 힘에 휘말린 채 노인을 향해 돌진했다.
한편, 노인은 심신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눈앞의 백발 수련자가 발휘한 두 가지 신통술은 여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이었으나 그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안 되겠다! 내가 상대할 자가 아니야!’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직감한 노인이 도망치려 한 순간, 한제가 서늘한 눈을 번득이며 덤덤하게 한 마디 외쳤다.
“정(定)!”
찰나의 순간, 노인의 몸은 바르르 떨리면서 허공에 멈춰버렸고 눈 깜짝할 사이 사방에서 얼음 결정이 된 빗방울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 노인의 몸에 응집됐다. 이내 노인은 거대한 얼음 결정에 갇혀버렸다.
한제는 멈추지 않고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저물공간에서 녹슨 철검 한 자루가 빠져나왔다.
한제는 곧장 그 검을 들어 올렸다가 매섭게 내리쳤다. 이에 희끄무레한 빛으로 덮여 있던 세상은 그 순간 한 줄기 강력한 빛에 휩싸였다.
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얼음 결정은 피로 물든 채 깨져버렸다.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던 모습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고 깨진 원신은 한 줄기 원력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노인, 송오덕을 처치한 한제는 몸을 틀어 벌써 저 멀리 도망간 검은 영수와 보라색 옷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냉랭하게 청년을 응시하던 한제는 이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때, 하늘이 맑아지고 비가 그치더니 흐릿한 무지개가 아침 해 아래 걸렸다. 저 멀리서 다가오던 여연비와 귀원종 네 장로는 그 무지개 아래 검은 영수의 뒤를 쫓는 눈부신 백발의 인영을 볼 수 있었다.
귀원종 네 장로들은 공기 중의 짙은 피비린내와 원신이 무너지면서 생겨난 원력의 파동을 통해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좀 전에 나타난 엄청난 위력의 빛에 결전을 치르겠다던 다짐이 사라진 이들은 잔뜩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한편, 노적은 두려움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음의의 수준에 이르는 동안 높은 신분 덕에 한 번도 이런 위기감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자도종의 강자인 송오덕과 함께였으니, 노리개 하나 손에 넣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른 여정에서 성역 어디서든 원하는 대로 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한데 그는 아직도 송오덕이 그렇게 간단하게, 원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러나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백발 청년의 모습에 노적의 비명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난 자도종의 소종주다! 날 죽인다면 우리 아버지 노운종은 이 막라 대륙 전체를 파괴해버릴 것이다!”
겁에 질린 노적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를 태운 영수조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내게 손끝이라도 댔다가는 우리 자도종에서 생이 끝날 때까지 네놈을 쫓을 것이다!”
노적은 침까지 튀겨가며 폐가 찢어져라 소리치더니 저물대에서 검은색 연꽃 한 송이를 꺼냈다. 새카만 연꽃은 요사스럽게 펼쳐지더니 검은 빛을 발산해 노적의 일그러진 얼굴을 뒤덮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구명 법보였다.
허나 그 법보를 활성화하려던 순간, 손가락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무런 힘도 없는 듯 가벼워 보이는 그 손가락이 곧장 노적의 미간을 찍었다.
쾅!
짧지만 강렬한 소리와 함께 노적은 피를 토해냈다. 터져나간 눈자위로 피가 줄줄 흘렀고 노적은 끈 떨어진 연처럼 휘날리며 피 안개로 터져나갔다.
원신이 무너져 내리던 순간, 노적은 심장이 쿵쾅대는 것과 몸이 휘청대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갈수록 약해졌고 격렬하게 박동하던 심장도 갈수록 힘이 빠져갔다. 그리고 곧 그는 어떤 소리를 듣지도 무엇을 느낄 수도 없게 됐다.
이때, 저 먼 곳에 있던 귀원종 네 장로 뒤로 도착한 직계 제자들은 피로 범벅이 된 한 사람이 호를 그리며 나가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피 안개 속, 무지개 아래 백발 인영의 뒷모습이 그들의 마음에 각인됐다.
허윤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냘픈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랫입술을 꼭 깨문 그녀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번득였다.
한 가닥 솜털
노적은 죽었다. 육신은 무너져 내렸고 원신은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의 오른손에는 만개한 검은 연꽃과 저물대 하나가 떨어졌다.
운해성역 5급 성역에 속한 수련자에게는 노적 자체도 강자에 속했겠지만 그보다는 자도종 때문에 노적을 죽이기 힘들었을 터였다. 이곳의 5급 성역에서 자도종은 상당한 명망을 가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종파인 데다가 종주인 노원종은 5급 성역에 명성이 자자한 강자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것이 나천성역의 정뇌선이자 연맹성역의 주작성황, 선제 백범의 후계자이자 청수 선군의 사제이며 청림의 제자인 한제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노운종이니 자도종이니 하는 것은 탁삼에 비하면 한 가닥 솜털만도 못한 존재였다.
주인을 잃은 검은색 영수는 감히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한 줄기 검은 빛이 되어 한제에게 거두어졌다.
하늘은 이미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또렷해진 무지개가 부드러운 빛으로 막라 대륙을 감쌌고 귀원종 사람들의 눈과 마음까지 밝혀주었다.
한제는 곧 모습을 감추었다. 귀원종 사람 중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저 그 당당한 뒷모습과 휘날리는 긴 백발만을 보았을 뿐이다.
귀원종 네 장로 중 여연비를 제외한 셋은 서로를 힐끔거렸다. 그들의 절망감과 슬픔은 짧은 순간 기쁨과 놀라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꿈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