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12
“저⋯⋯ 저자는 누구지?”
“어째서 우리 귀원종을 도와준 걸까?”
그때, 여연비가 미소를 지으며 작게 외쳤다.
“백발이었어!”
스승의 죽음 후로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은 막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때, 장로의 직계 제자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며 하나하나 검광이 되어 네 장로의 안내에 따라 귀원종으로 돌아왔다.
“허나 송오덕과 노적이 죽었으니 자도종에서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
네 장로 중 선두에 선 노인이 신식을 통해 다른 셋에게 신식으로 전했다.
“스승님은 분명 택령법을 사용하신 후에 북쪽과 백발이라고 하셨어. 그리고 방금 그는 백발이었지. 그가 스승님이 말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는 거야!”
“하지만 그 선배가 대체 누군지, 우리 귀원종에 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 북쪽에서 데려온 서른한 명의 제자들을 관찰해봤지만 어떤 실마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우리를 한 번 도왔는데 두 번이라고 못 돕겠는가!”
“찾아도 소용없을 거예요. 그 선배가 우리에게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두는 편이 옳아요.”
여연비는 다시 한 번 환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저물대에 힘을 한 줄기 불어넣어 오래된 족자 하나를 파괴했다.
사원으로 돌아온 여연비는 곧장 허윤과 함께 약초밭으로 향했다. 두 여인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다른 이들의 혼을 앗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여연비의 신분을 깨달은 제자들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곁에 있는 허윤은 그들을 모두 물렸다. 두 여인은 지금 누구의 방해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스승님, 그⋯⋯ 그 사람은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허윤은 격하게 뛰는 심장을 안은 채 곁에 있는 스승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 ★ ★
운해성역 5급 성역 안, 먹먹한 안개 속에는 막라 대륙의 세 배가 넘을 정도로 넓은 보라색 대륙이 하나 있었다. 마치 한 마리 흉수처럼 웅크린 채 냉랭한 기운을 뿜어내는 대륙이었다. 또한 막라 대륙과 달리 이곳에는 무려 네 개의 검은 탑이 부드러운 빛으로 대륙을 밝히고 있었다.
이때 우주를 뒤덮고 있는 안개 일부가 일렁이더니 1천 척에 달하는 호랑이 흉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튀어 들어왔다.
맹렬한 눈으로며 보라색 대륙을 바라보던 흉수는 이 대륙 어딘가에서 암컷 흉수의 울부짖음을 어렴풋이 듣고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대륙을 감싸고 있는 빛의 장막에 몸을 부딪쳤다. 이에 그 보호막은 격렬하게 깜빡였다.
“캬오오오!”
호랑이 흉수가 포효와 함께 다시 몸을 날리려던 순간, 한 줄기 보라색 빛이 대륙 안에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다가왔다.
그 빛 안에는 자금색 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있었는데 엄청난 위엄이 풍기는 그의 깊은 눈에서는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보호막을 뚫고 나온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보라색 빛이 호랑이 흉수를 순식간에 가둬버렸다.
“제련!”
냉랭한 목소리가 떨어지자 호랑이 흉수를 감싼 보라색 빛은 순간 거대한 연단로가 되더니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는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는데 그 소리는 점차 약해지더니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또 한 마리의 호랑이 흉수를 잡으셨군요. 축하합니다, 종주님. 머지않아 호골혼도(虎骨魂刀)를 완벽하게 제련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긴 웃음소리와 함께 역시 자금색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아직 아홉 마리나 더 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 부근 안개 속에는 호랑이 마수가 더 이상 남지 않은 듯하니 더 먼 곳으로 가야겠군.”
한데 음침하게 웃던 중년 사내는 순간 표정이 변하더니 오른손으로 허공을 한 번 움켜쥐어 저물공간에서 옥패를 하나 꺼냈다. 옥패는 사내의 손에서 쩍 하고 갈라졌고 그 안에서 한 줄기 잔혼이 흘러나왔다.
그 잔혼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르르 떨더니 흩어져 사라졌다.
“소종주님!”
곁에 있던 노인이 경악한 듯 외쳤다.
중년 사내는 잔혼이 점점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곁에 선 노인은 심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종주를 바라보았다. 종주를 따른 지 아주 오래된 그는 상대가 침착해질수록 더욱 강한 폭풍이 불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노적이 어디에 갔었지?”
한참 뒤, 중년 남자가 눈을 떴다. 한 줄기 슬픔이 두 눈을 스쳐갔으나 그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덤덤했다.
“소종주께서는 막라 대륙에 갔었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답했다. 그의 심신은 여전히 덜덜 떨렸다. 그로서는 5급 성역 안에서 감히 자도종의 소종주 노적을 죽일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막라 대륙, 귀원종⋯⋯ 어째서 누구도 내게 그 일을 보고하지 않은 거지?”
노운종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노인은 몸서리를 쳤다. 머릿속에서 퍼뜩 떠오른 일에 얼굴까지 삽시간에 창백해진 그였다.
“소종주께서는⋯⋯.”
“수련자인데도 미색을 탐하고 제멋대로 굴지. 자도종 소종주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지난 몇 년간 적지 않은 종파의 여제자들을 희롱했고 그들의 원기를 흡수하는 악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중년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종주⋯⋯.”
노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노적과 함께 막라 대륙에 간 것은 송오덕이겠지? 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송오덕이 보살폈으니까. 노적 눈에 송오덕은 어쩌면 두 번째 아버지처럼 보였을지도… 막라 대륙에 간 것은 귀원종의 여연비 때문일 테지. 그 종파의 선조가 죽은 틈을 타 귀원종을 제 침궁으로 만들 생각이었을 터.”
노인은 침묵했다. 그가 아는 바에 의하면 종주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노운종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흐릿한 안개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묵묵히 그 너머를 바라보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려 보라색 대륙으로 향했다.
“그 쓸모없는 녀석이 죽었으니 이 세상의 화근 하나는 줄었겠군. 허나 어찌됐든 내 아들이다. 그 아이가 여연비를 원했으니 함께 순장해줘야겠지. 노적을 죽인 자도 같이…”
허나 말의 내용과 달리 노운종의 목소리는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 덤덤했고 그 뒷모습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어려 있었다.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사내의 뒤에 선 노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종주님, 소종주와 함께 떠나기 전의 송오덕에게 듣기로⋯⋯ 소종주가 자운해(紫雲海)에서 우리 자도종의 천음번(天陰幡)을 가져갔다 했습니다. 여연비의 혼백과 이전에 수집했던 여인들의 혼백을 모두 그 안에 봉인해 음선(陰仙)을 사육하겠다고 말입니다.”
앞서 가던 노운종이 우뚝 멈춰 서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좀 전과 달리 두 눈에는 하늘을 뒤덮을 듯한 노기로 번득였고 두려움과 충격으로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망할 자식!”
★ ★ ★
막라 대륙, 귀원종.
여연비는 약초밭의 평범한 목조 건물을 묵묵히 바라보며 망설이다가 뜰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허윤이 뒤따랐고 허윤의 심장은 두방망이질 쳤다.
한제의 방은 문이 닫혀 있었고 여연비와 허윤이 왔는데도 열리지 않았다.
한참 뒤, 여연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조용히 말했다.
“선배님, 계십니까?”
“없다!”
방 안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여연비와 허윤의 귀에 떨어졌다. 두 사제는 몸을 바르르 떨었지만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 전, 연맹성역에도 한제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똑같은 답을 들었던 여인이 하나 있었으나, 여연비는 물론 이를 알지 못했다.
여연비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살짝 웃었는데 그 모습이 퍽 아름다웠다. 그녀는 방 쪽으로 몸을 살짝 숙이며 작게 말했다.
“제 스승님께는 여자호라는 사숙이 있었습니다. 스승님 말씀에 따르면 여 사숙은 도에 정신이 팔려 있어, 실종되기 전까지 막라 대륙을 나간 적이 없다 하셨지요. 주종에도 아니 가보시고 벗도 적었으며, 심지어 귀원종 사람들조차 그분을 뵌 적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한데 스승님은 제게 그분의 초상화를 주셨습니다. 그분은 저희 여 씨 가문의 조상이기도 하니까요. 아주 오래된 그림이라 곳곳이 헤져 있었는데 방금 이곳까지 오는 길에 완전히망가져 버렸습니다.”
그 말을 마친 여연비는 미소를 띤 채 공손히 뜰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허윤은 스승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침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제는 손에 든 검은색 연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뜰을 나가는 여연비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여연비는 움찔했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고 뜰을 빠져나갔다.
‘총명한 여인이로군.’
한제는 시선을 거두었다.
방금 그녀가 한 말을 허윤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한제는 알아챌 수 있었다. 이는 한제가 그 백발 사내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녀는 한제와 같은 수준 높은 수련자가 이곳에 숨어든 것은 귀원종에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거나 누군가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것까지 파악한 듯했다.
다만 귀원종에 한제가 원하는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기에 누군가로부터 도망쳐 온 것이라는 추측에 더 무게를 두었다.
한제가 귀원종에 더 머물려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을 신분이 필요했다. 여연비의 말은 한제에게 그 신분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평생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했지만 이토록 똑똑한 여인은 드물었다. 수많은 모습을 가진 류미와도 달랐고 냉정한 홍접과도 달랐으며,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모완과도 다른 그녀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한제는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자호⋯⋯ 그 신분이라면 이 운해성역 안에서도 다른 이들의 의심을 받지는 않을 수 있겠군!”
그가 신분을 중시하는 것은 나천성역에서 높은 수준의 수련자에게 정체를 들키는 바람에 큰 불편을 겪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성역에서나 외부인을 배척하게 마련임을 알게 된 것이다.
허윤의 가슴앓이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한 한제는 다시 손에 든 검은 연꽃에 신식을 뻗어 연구를 이어나갔다. 이 연꽃이 평범한 법보였다면 주의를 끌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신식으로 살펴도 다른 어떤 방법으로 살펴도 이 연꽃은 진짜 식물처럼 느껴질 뿐이었는데 아주 희미한 진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운해성역은 신기한 것 투성이로군. 이 연꽃의 봉인이 풀리면 강력한 보호막이 형성되는 것 같은데… 정말이지 흥미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