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65
시음종 종주와 청룡성황의 대결은 성역 전체를 뒤흔들었다. 허나 결과적으로 시음종의 첫 번째 왕은 철저히 패배했다. 청룡성황이 마음만 먹었다면 목숨을 취할 수도 있었다.
이 전투 이후 시음종은 사성종과 청룡성황을 두려워하게 됐다. 그러니 사성종의 명령에 따라 나천성역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봉계의 진
한편, 두 성역이 전쟁을 이어가는 동안 탁삼이 깨어나 진을 꿰뚫고 주작성 밖으로 나왔다.
그의 출현에 나천성역은 충격에 빠졌다. 탁삼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자로 주작성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천성역 수련자들의 행태에 분노해 사방을 휩쓸었다. 단숨에 수만 명의 나천성역 수련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엄청난 살육을 저지른 그는 한 마디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너무 약하군.”
나천성역 수련자 누구도 감히 그를 뒤쫓지 못했다. 숨어 있던 노부자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연맹성역으로부터 멀리 달아났다.
다행히도 주작성 밖으로 나온 탁삼은 연맹성역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먼저 사성종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신의 힘을 발휘해 청룡성황에게 중상을 입히고 사성종 성역을 붕괴시켰으며, 연맹성역 동쪽에 수많은 균열을 일으켜 누구도 진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청룡성황에게도 한 마디만을 남겼다.
“너무 약하군.”
뒤이어 주작성종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손을 휘둘러 화염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눈에 거슬려!”
누구도 감히 그의 그런 행태에 분노를 터뜨리거나 저항하지 못했다.
사성종을 떠난 탁삼은 곤허경으로 향해 어떤 노인과 싸웠고 상대를 미간에 봉인한 후 멸신모를 꺼내 곤허경을 붕괴시켰다. 긴 세월동안 존재해왔던 곤허의 성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모은미 역시 이 전투에서 육신을 잃었고 원신만 겨우 살아남아 자취를 감추었다. 탁삼은 그런 그녀를 뒤쫓는 대신 낙인만을 하나 남겼다.
시음종 역시 한제를 찾지 못한 탁삼의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탁삼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우의 선계였다. 그곳을 봉인한 진 앞에서 탁삼은 처음으로 신중해졌다. 하지만 이내 전보다 더욱 거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한데 그가 막 공격을 하려던 순간, 우의 선계 밖에 청림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탁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이 조종하는 수많은 상고 시대 연기사들을 이끌고 종적을 감추었다.
허나 그는 찾으려는 사람에 대한 단서를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탁삼의 출현으로 연맹성역은 술렁였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더구나 나천성역 수련자들이 탁삼의 존재를 두려워하며 물러가면서, 수백 년간 이어지던 전쟁이 마무리됐다. 탁삼 한 사람으로 인해서.
연맹성역에서 떠나기 전, 탁삼의 거대한 고함이 성역 전체를 뒤흔었다.
“이한제! 어디 있는 거냐!”
장소는 다르지만 운해성역 막라 대륙 귀원종의 여연비도 중얼거렸다.
“선배님, 어디 계시는 겁니까. 1년 후면 주종의 시합이 열립니다.”
그 무렵, 자도종은 빠르게 발전하여 5급 성역의 가장 강력한 여섯 종파 중 하나로 거듭났다. 그런 자도종의 종주 노운종은 1백 년 전부터 하늘을 올려다보며 뭔가를 중얼거리곤 했다. 그를 곁에서 보좌하는 노인만이 노운종의 입에서 가끔 흘러나오는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다.
“여 도우, 자네와의 대화로 나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네. 한데 벌써 1백 년이 지났건만 자네 소식은 들려오질 않는군. 나의 수준도 당시보다 훨씬 높아졌네. 자네와 다시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한편, 9급 성역의 안개가 짙게 낀 곳. 기이한 균열이 인 전장에서 이천매가 덤덤하게 흉수들을 죽여 나갔다.
이곳에 모인 여러 종파 수련자 중 이 파란 머리의 여인에게 경외심을 가지지 않은 자가 없었고 그중 상당수는 그녀를 연모했다.
이 전장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흉수와 수련자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흉수들의 기세는 오히려 격렬해졌고 점차 12급 또는 13급 흉수의 등장 빈도도 늘어갔다. 13급 흉수의 등장은 수련자들에게는 재난과 같았다.
수련자 연합의 주력인 요종의 입장에서는 자신들 외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수련자는 오직 넷뿐이었다. 그중 하나가 이천매였다.
이천매는 금색 붓을 법보로 사용했는데 이 붓으로 써낸 문자의 위력은 그야말로 극강이었다. 허나 그녀는 누구에게도 그 붓을 빌려주지 않았다.
한번은 그녀가 12급 흉수 여러 마리에게 둘러싸여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져 금색 붓을 전장에서 잃어버려 요종 사람들에게 구조되었다. 한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엉망이 된 상태에서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장으로 돌아가 그 붓을 찾아 돌아왔다.
이후, 수련자들은 그녀에게 그 붓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됐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벌써 1백 년이 흘렀군요.”
이천매는 간이 수련대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미루어 부상을 입은 듯했다. 전방의 안개 속에서는 수많은 흉수가 포효를 내질렀고 수많은 수련자가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전장의 참혹함도 흉수들의 포효도 관심 없는 듯 아득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운해성역, 안개로 뒤덮인 어느 황량한 대륙. 모은미의 원신은 곤허의 비술로 형성한 장벽을 두른 채 여기까지 도망쳐 와 겨우 육신을 응집하기 시작했다.
탁삼에게서 중상을 입고 육신을 잃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한제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한제, 지금 어디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이냐.”
어느 산봉우리의 동굴에서 모은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에 없던 외로움이 마음속에 퍼져 나갔다. 이 낯선 땅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짙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 ★ ★
칠채계가 빛을 잃고 어둠에 휩싸인 지도 1백 년이 지났다. 1백 년 전부터 외부 사람 누구도 이곳에 들어오지 못했다. 운혼자 또한 이곳에 들어오려다가 실패하고는 근처 동굴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진천군과 청의의 노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기이한 힘으로 뒤덮인 산봉우리 꼭대기에는 시체 한 구가 놓여 있었다. 한제의 육체였다. 1백 년이 지났는데도 고신의 육신은 상한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여기저기 먼지만 뽀얗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한편, 기이한 성역 안에서 붉은 식물에 맺힌 과실은 무럭무럭 자라 완전히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때, 과실에 한 줄기 신식이 나타났다. 신식은 과실의 기이한 힘을 흡수하듯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하나의 구슬이 되었다. 그리고 그 구슬이 나타난 순간, 한제는 한바탕 긴 꿈을 꾼 듯 천천히 깨어났다.
이 현상은 천역주로 인한 것이라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심지어 칠채화를 기르는 이도 과실 안에서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온 세상을 뒤흔들고 계내, 심지어 계외의 운명까지 뒤바꿀 어마어마한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불 속에서도 자신의 손가락이 탈 리는 없다고 자신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자신이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아득한 우주에는 온통 반짝이는 별들뿐이었다. 그 화려한 광경 속에서는 세월의 흐름조차 불분명했다.
고요했다. 모든 소리가 어둠에 묻혀버린 것 같았다.
전방 저 멀리 황량한 수련성이 하나 보였다. 빛 한 줌 발산하지 않는 이곳은 죽음의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죽음을 앞둔 늙은이가 운명에 저항하다가 내뱉은 마지막 숨결처럼 한 올의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기운이었다.
이 황량한 수련성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의 몸은 수련성 몇 개를 합쳐놓은 것처럼 거대했다. 음침한 얼굴로 수련성에 앉아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그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피부는 거칠었고 그 위에는 수많은 균열이 마치 문양처럼 기이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육신이었다. 세상과 함께 태어나 영겁의 세월을 자신조차 정확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시간을 보내온 것만 같았다.
거대한 몸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위압감은 성역 전제를 뒤덮고 성역에 존재하는 모든 생령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곳은 나천성역이었다.
수련자들은 눈이 바짝 졸아들었고 심장은 세차게 두방망이질 쳤다. 영혼조차 떨려와, 도저히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거칠고 흉악한 흉수들조차 그저 납작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그 거대한 존재는 마치 신 같았다. 미간에서는 여덟 개의 별 모양 반점이 회전하고 있었는데 그중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네 개뿐이었다. 나머지는 비록 사라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비쩍 마른 듯 어두웠다.
마치 성역의 지배자 같은 그 존재는 한참이나 온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멍하니 내뱉었다.
“그자의 기운은 우의 선계에도 뇌의 선계에도 없다. 심지어 섬의 선계에도 없다면 대체 어디 있는 것인가!”
흘러넘칠 듯 강력한 기운을 발하는 거인은 거친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 순간, 성역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하면서 그가 깔고 앉았던 황량한 수련성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때 발생한 폭풍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수많은 공간의 균열이 일어났고 그 사이로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하지만 거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거대한 존재, 탁삼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4대 선계의 장벽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세상 어디에도 그의 발걸음을 저지할 존재는 없었다.
몇 걸음을 옮기자 그의 앞에 거대한 회오리가 하나 나타났다. 안개가 자욱한 그 회오리는 운해성역과 이어진 통로였다.
회오리 안으로 발을 들인 탁삼의 거대한 몸은 곧 나천성역에서 사라져 운해성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나타난 순간, 운해성역 모든 종파의 수련자들은 심신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심지어 안개 속을 누비던 흉수들도 덜덜 떨었다.
9급 성역 내의 균열에서 달려들던 흉수 무리들 역시 곧장 후퇴하면서 1백 년이 넘게 이어져 오던 전투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거대한 파도처럼, 거친 폭풍처럼 운해성역을 휩쓸었다. 그 기운에 운해성역을 자욱하게 채운 안개조차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모두 밀려났다.
그때, 여러 갈래의 신념이 9급 성역에서 튀어나와 탁삼의 신념에 강하게 부딪쳤다. 소리는 없었지만 심신에는 온 세상을 뒤흔드는 천둥 같은 강력한 충격이 운해성역에 퍼져 나갔다.
평소의 탁삼이라면 곧장 살육을 벌였겠지만 지금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4대 성역 어디에서도 그의 기운을 찾지 못했다면 가능성은 하나!”
탁삼이 발을 내딛자 운해성역이 진동하면서 파문과 함께 전방에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그는 곧장 균열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그에게 달려들던 몇 갈래 신념은 주위를 훑다가 떠나갔다. 이날 운해성역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의 구체적인 이유를 아는 것은 수준 높은 극소수뿐이었다.
★ ★ ★
4대 성역 아래의 허공, 봉계의 대진(大陣)이 있는 곳. 이곳을 돌파한다면 계외로 나아가 태고의 성신에 이를 수 있을 터였다.
탁삼은 그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지난 며칠 동안 곳곳을 펼쳤지만 한제의 기운은 조금도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태고의 성신⋯⋯.”
그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지만 태고의 성신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한 그곳이야말로 서사가 탄생한 곳이리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저런 진은 없었으리라.